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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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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존하소서 보존하소서 보존하소서 보존하소서 정농 박 상 선 산아 산아 높은 산아 저 들판에 마음놓고 마실 물이 있는지 마음놓고 먹을 나물이 있는지 산아 산아 살피어라 저 들판에 황금 벼이삭 그 두렁에서 왠 눈물인가 저 푸른 배추포기 어이 주저 앉았는가 산아 산아 높은 산아 한 번쯤 굽어 살피어라
삶 정농 박상선 초년 망울 망울 맺힌 봉우리 터질듯 터질듯 부풀어서 방싯방싯 피어나듯이 빨간 볼 여린 손으로 봄이면 진달래 산을 여름이면 자운영 꽃밭을 꿀벌을 쫓아 헐덕이는 짚신짝 풀숲에 벗겨져도 윙 윙 날아가는 저 큰 왕 꿀벌을 따라가며 해 저무는 것도 잊었었네 하얀 눈송이 ..
희망이 있다_김남주 나 없이 의미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지만 내가 함께 한 꽃나무와 노래와 별과 사랑은, 이룬 것 없는 나의 노래와 사랑과 함께 끝없이 빛날 것이다. 비록 내가 사라진다해도 ===================================================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 김 남 주 내가 심고 가꾼 꽃나무는 아무리 아쉬워도 나 없이 그 어느 겨울을 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이땅의 꽃은 해마다 제각기 모두 제철을 잊지 않을 것이다. 내가 늘 찾은 별은 혹 그 언제인가 먼 은하계에서 영영 사라져 더는 누구도 찾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오늘밤처럼 서로 속삭일 것이다. 언제나 별이 내가 내켜 부른 노래는 어느 한 가슴에도 메아리의 먼 여운조차 남기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쉽게 쓰여진 시_윤동주 쉽게 쓰여진 시 윤 동 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를 들으러 간다 생각해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1942. 6) ================================== 쉽게 쓰여진 시에 붙여 ..
목련꽃이 바람에 날리다 목련꽃이 바람에 날리다 무일 박 인 성 혹독한 겨울바람에도 복실한 껍데기 속에서 오래도록 새봄을 준비한 순백의 목련꽃이 봄바람에 진다 봄은 햇살만이 아니어서 눈부신 아름다움을 거두어 갔다 고라니 한 마리 달빛 교교한 밤에 봄바람을 이기지 못하여 새로 갈아놓은 고운 이랑위를 흥에 겨워 거닌다 그 발자욱 속에 사룸의 푸른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봄은 그저 바람든 기분만으로가 아니라 진정으로 사룸을 잉태한다 * 사룸 : life. 일본이 만든 번역어 말고, 우리의 문화로 말과 글을 만든다. * 고라니가 밟아놓은 비닐 속에서 새싹이 자라나서, 마침내 작물을 이기며 온밭을 덮는다. 사룸이다.
불꽃으로 부녀를 심판하다_161209 불 꽃 순수한 마음이 없는 권력은 매우 지루하여, 주색잡기에 빠지거나 화려한 테레비와 달콤한 음식에 즐거워한다. 총탄과 촛불, 불꽃으로 부녀를 심판했다. 많은 이들이 승리했다 하고 누군가는 이제부터 시작이라 하는데, 그 심판은, 희미해진 꿈속의 아름다운 아이처럼 아스팔트 위..
풀 무일 박인성 풀들이 일어난다 내 영혼을 갉아먹는 돈과 권력과 명예와 사치와 욕망처럼 아, 풀들이 쑥쑥 올라온다 네 영혼을 지치게 하는 오만과 질투와 멸시와 무관심처럼 사랑은, 저만치서 무심한 가로등처럼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위로가 된다.
그저 바람이 부는 것은 아니다 바 람 무일 박인성 그저 바람이 부는 것은 아니다. 쏟아지는 햇살에 모든 것이 녹아 없어질 것 같아 차마 그대로 사라질 수 없다고 결기를 세울 때, 그 때 마침 저쪽에서 바람이 불어온다. 덮어도 덮어도 머리가 깨질듯이 아파서 고약하게 썩어가는 냄새가 천지에 가득할 때, 일어서는 등짝을 밀어올리듯 그 때 마침 저쪽에서 바람이 불어온다. 세상에 예쁘고 좋은 것이 그득한데도 개돼지를 부리듯 사람 위에서 즐거워 할 때, 파리떼를 날려 버리듯 그 때 마침 저쪽에서 바람이 불어온다. 말같지 않은 새빨간 말들이 난무하고, 위로하는 말조차 상처를 남길 때, 말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그 때 마침 저쪽에서 바람이 불어온다. 그저 바람만 부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