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명관의 상상력을 기발하다고 해야하는 걸까? 벽돌공장의 바크셔 춘희로 들어가는 이야기부터 남다르다. 어떻게보면 새로운 모습의 SF소설이다. 천명관은, 사람을 뛰어넘는 힘을 지닌 사람(람어사 -> 남어사)를 만들어낸다. 그 사람은 밑바닥의 밑바닥에서 태어났다. 남어사는 큰힘을 가지고 있지만, 생각은 쉽게 한다. 지킬 것은 지키고, 할일은 한다. 나의 삼촌 부르스 리에서도 그랬듯이. 그리미의 뜻으로 어머니께 부르스리를 빌려다 드렸더니, 먹고 마시는 것을 잊으시고 읽으신다.
남자와 여자는 한자에서 나온말이다. 오랜 삶이 있는 땅에 남자와 여자를 가르키는 말이 암컷과 수컷말고는 없나? 그래 가시버시가 있다. 아내와 남편의 순우리말이다. 이제부터 남자는 버시라 하고, 여자를 가시라 한다. 춘희는 가시 남어사다.
1부 부두
먼지를 떨어내는 일, 나를 공격하는 것들을 방어해내는 일, 공격을 방어해내지 못하면, 비록 먼지라도 내 사룸은 끝난다. 끊임없이 움직여야 한다, 더러운 것을 몸과 마음에서 닦아내야 한다.
"삶은, 끊임 없이 쌓이는 먼지를 닦아내는 일" (11쪽)
못생긴 노파와 덜떨어진 총각의 이야기에서 노파의 애꾸눈 딸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끔찍하다. 어디에서 들어본 일조차 없는 놀라운 이야기다. 사람됨이 아예 없는 사람을 만들어내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일 것으로 짐작했다. 그 처음은 못생김이다. 못생김으로써 모든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차별을 받는다. 못되먹은 사람됨은 보호받지 못하는 사회에서 만들어진다.
책을 다 읽고 났더니, 틀렸다.
춘희로 가는 이야기는 지나친 사랑이다. 춘희의 할아버지나 엄마인 금복이가 모두 사랑의 힘을 아는 사람들이었고, 진짜 사랑을 겪었다. 걱정이나 칼잡이도 사랑을 따랐다. 그들의 사랑은 세상의 차가움 속에서 슬프게 식어간다. 가시 남어사는, 어쨌든 사랑은 넘쳐났던 사람들로부터 태어났다.
천명관의 고래는 2023년 맨부커상 최종 후보에 올랐지만 수상하지 못했다.
2부 평대
천명관다운 아름다운 시다.
기름기 잘잘 흐르는, 꾸밈이 없다.
삼양동 달동네만큼 날것 글대로의 외침이, 평대에 관한 시에 고스란히 묻어있다.
"이름은 평평하나 너른 벌 하나 없고
이름은 집터로되 사람 살 집 아니로다
~ ~ ~
이 개새끼들아! 그만 좀 짖어!" (183쪽)
길을 가다보면 반드시 고개가 있기 마련이고, 일에도 고비가 있다. 사람들은 쉽지 않은 고비를 만나면, 미신을 끌어들이며 포기하려고 한다. 지실은 지실일 뿐이다. 건희석렬이라는 고비가 우리나라 민주정 앞에 놓여있다. 차분하게 넘어서면 그만이다.
"일꾼들 사이에선 공장터에 지실이 들었다는 흉흉한 소문까지 나돌았다." (237쪽)
* 지실 : 어떤 재앙으로 해가 되는 일. 재해. 사고 등 : 지실이 들다 / 지실들다
죽음은 사실 나와 세계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좁고 답답한 곳에서 전자교환이 이루어지는 나라는 닫힌계에서, 세계라는 넓은 곳에서 매우 많은 전자교환이 이루어지는 열린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사라지는 것은, 나라는 좁고 닫혀있는 세계다. 내가 사라짐으로써, 나는 넓은 세계의 영원한 삶을 얻게 된다.
"죽으면 사라지는거야. 그리고 헤어지는 거지, 영원히." (249쪽)
3부 공장
약속은 어려운 일이다. 할때부터 망설여지고 지키기는 더 힘들다. 처음 이글을 만났을때 좋았던 이유는, 약속의 어려움을 새로운 말로 이야기해 주었기 때문이다. 가슴이 살짝 아프면서 따뜻해지는 그런 말이었다.
손거리(손가락을 걸고 약속하는 일 = 손걸이 -> 손거리 = 약속)은 어렵지만 좋은 일이기도 하다. 좋은 마음들이 만날때 손거리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손거리가 없는 삶을 생각해보라. 얼마나 삭막한가? 지키지 못하더라도 손거리를 해야 할 순간에는 망설이지 말아야 한다. 소년은 결국 원하지 않던 계곡에서 손거리를 하지 못한채 눈을 감았다. 정말 슬픈 일이다.
"또 만나자고. 하지만 언제 오겠다는 약속은 못해.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게 바로 약속이거든." (490쪽)
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다. 진실이 만들어지고 나면, 사람마다 진실을 받아들이는 마음(한울)이 다르다. 사람은 한사람 한사람 모두 한울 = 커다란 울타리 = cosmos다. 한울 = 커다란 미리내 = 커미에 들어온 진실은, 커미 속에서 떨린다. 떨려버린 진실은, 처음에 만들어진 그 진실일 수가 없다. 그래서 천명관의 말처럼, 설명과 해석을 유예하고, 찧고 까불지 않고 가만히 있다보면, 처음 만들어진 진실에 가까이 다가갈수 있을지도 모른다. 모두가 진실에 접근하기는 쉽지 않다.
거짓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 것일까? 거짓은 더러운 폭력이다. 더러운 폭력을 만나자, 춘희는 모가지를 비틀어 얼굴을 물어뜯어 버렸다. 거짓은, 더러운 밑바닥이 드러나도록 철저하게 드러내야 한다. 우리는 춘희처럼 남어사가 아니기 때문에 한번에 그렇게 만들수는 없다. 천천히 조금씩 거짓을 드러나게 만들고, 사람과는 다른 철가면으로 만들어놓아야 한다. 철가면을 뒤집어 쓴 거짓들은, 우리의 힘으로, 마침내 영원히 사라지게 되고 말것이다. 거짓의 철가면이, 아직도 힘이 세고, 거짓과 폭력의 힘이 남아있다고 해서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조금만 시간이 흐르면, 햇빛을 받아 사라지는 서리처럼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진실이란 손안에 주는 순간 녹아 없어지는 얼음처럼 사라지기 쉬운 법이다. 그래서 어쩌면 혹, 그 모든 설명과 해석을 유예하는 것만이 진실에 가까워지는 길이 아닐까?" (517쪽)
고래를 읽으며 떠오르는 의문 두가지.
1) 왜 다들 사회를 떠나려 하는가?
틀렸다.
사람은 사회 속에서 살아야 한다. 사회를 떠나는 것은 곧 죽음이다. 죽음이 열린세계로의 영원한 여행이므로 슬퍼할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닫힌계로서 비롯된 삶은 그럭저럭 살아내야 한다. 떠나려하는 마음은, 영원에 대한 갈망이 아니고, 닫힌계를 유지하는 어려운 일을 피하려는 어리석은 몸부림이다.
어려움을 이기고 고비를 넘어가면, 기쁘고 즐거운 세상이 펼쳐진다. 어렵다고, 억지로 벗어나려고 하면, 무리한 힘을 쓰다 다치거나 힘없이 무너지게 된다. 고통을 이겨낸 기쁨과 즐거움을 맛볼수 없다. 사회는 우리의 보금자리다. 자본주의가 민주정과 뭇사람의 구원이듯이, 사회는 우리의 든든한 울타리다. 벗어나려 하지말고, 닫힌계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쏟아부어야 하는 어려운 일들을 받아들이고, 힘든 일을 이겨내어 더 큰 기쁨을 누릴수 있어야 한다.
2) 사랑행위는 왜 그렇게 그려지나?
단순하고 짜릿한 읽는 즐거움을 주기 위해서다.
천명관의 사랑이야기는 은유가 없다. 가시와 버시가 만나 사랑을 하게되면 결국 사랑행위로 이어진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주어, 읽는 사람에게 짜릿한 즐거움을 준다. 멋진 사랑을 찾지도 않고, 숨겨진 아름다움도 없다. 있는 그대로의 그림을 글로 전해준다. 그래서 천박하게 느껴지는데, 그게 천명관의 글쓰는 재미다. 날것 그대로인 사랑의 모습을 봐라. 너희들도 이렇게 사랑하거나, 이렇게 사랑해보고 싶지 않니? 영화로 보지 않더라도 너무 쉽게 떠오르는 그림들이다.
위대한 건축물의 재료를 남긴 춘희를 읽다가, 이름석자를 대한민국에 크게 남긴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봤다.
건희석렬이와 한덕수, 최상목이 말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세금이 아까워진다. 세금 내는 것을 즐기지만, 춘희나 반편이만도 못한 이들이 거들먹거리며 세금차를 타고, 우쭐거리며 세금카드를 쓰는 것을 생각하니, 세금이 너무 아깝다. 반편이들만 반편이가 아니고, 멀쩡해 보이는 것들도 모두 다 반편이인, 반편이들의 세상을 눈앞에서 보고 있다.
춘희는 마지막 순간까지 사룸 속에서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저들은, 힘 안들이고 잘먹고 잘살기 위해, 열심히 비굴하게 거짓과 거짓 비슷한 말을 끊임없이 지껄여댄다. 춘희보다 못한 것들의 계엄과 내란을 거의 석달째 지켜보며, 비웃을수밖에 없다.
그나저나 웃지 못하는 사람들의 삶은 어쩌면 좋은지 모르겠다.
잘 읽었다. 이틀에 걸쳐서 맹렬하게 읽었다. 꽉 짜여진 엄청난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야기들은 시간을 떼우기에 좋다.
가시 남어사superman라는 말을 만들게된 이야기들이니 내게도 의미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