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덧 여행이 끝나가고 있다. 푸욱 잘 잤는지 6시 경부터 잠이 깬다. 6시 반에 알람이 울리고 40분에 일어나 샤워를 하고 짐을 쌌다. 7시 15분에 식당에 갔는데, 딱딱한 계란 말이에 흑미밥이 나왔다. 우리가 여유있게 식사를 시작하자 마자 단체 손님들이 들어와 작은 식당 안이 번잡해진다. 나또를 가지고 왔다가 먹지 못하고 그리미에게 넘긴다. 커피에 크로아상을 먹는다.
어제의 황당한 상황을 다시 만나지 않기 위해 로손에서 비상식량으로 계란 샌드위치와 야채 샌드위치를 사서 넣었다. 과자도. 호텔 앞에서 트램을 타고 고치역에 내려 나하리행 특급 열차의 좌석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필요없단다. 4번 승차장에서 보니 두 량 짜리 모네의 연못 열차가 기다리고 있다. 특별한 무엇이 없는 그저 동인천행 급행열차처럼 몇 개의 역을 건너뛰면서 운행이 된다. 사람이 없이 우리가 전세를 냈다. 출발시간이 다가 오자 제법 많은 사람들이 탄다. 좌석은 여유가 있다.
도시 구간을 잠시 거치더니 태평양이 차창 밖으로 좌악 펼쳐진다. 거대한 바다의 파노라마다. 열차 한 량 전체의 차창을 통해 태평양의 푸른 바다가 가득하다.
나하리역에 내려 무로토자키는 보지 않고 고치쪽으로 걷는다. 태양이 뜨겁다. 섬의 이쪽과 저쪽이 완전히 날씨가 다르다. 순례길을 따라 열심히 걷는다. 두 시간 정도만 걸을 계획이었는데, 세 시간을 걸었다.
왼쪽으로는 태평양 오른쪽으로는 큰 산이 놓여 있다. 붉게 물든 나무도 있어서 어제의 상록수림과는 달리 멋진 색을 보여준다. 하늘색도 좋으니 금상첨화다. 길가에는 수선화, 국화, 백합, 동백, 바다 채송화 등등 수많은 꽃들이 피어 있다. 언제나 피어 있는 이 꽃들은 순전히 여행객을 위한 장식이다. 매일 보는 사람들은 특별한 일도 아닐 것이다. 한 겨울에 따뜻한 지방에서 누릴 수 있는 호사다.
어제까지 특히 어제 2만 9천보를 걷고 났더니 발바닥에 불이 나고 오금이 아프다. 한 시간 쯤 걸은 다음 야스마 마을의 민속 교류관에서 일본식 정원과 저택을 구경하며 쉬었다. 안내 직원이신 할머니는 우리가 앉아서 쉬는 내내 차가운 마루 위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채로 기다리신다. 우리가 집안을 두리번거리며 무엇인가를 바라보면 얼른 일어나 설명을 하신다.
일본 민주주의의 선구자가 이곳 고치 출신이란다. 자유당의 당수였던 이타가키 타이스케는 82세의 나이에 자객에 의해 살해 당하면서도 '나는 죽지만 자유는 죽지 않는다'고 외쳤다 한다. 메이지 시대(1868~1912)에 청일 전쟁과 한반도 침략으로 군국주의 일본이 만들어지고 있는 역사 속에서 그의 외침은 작았지만 잊혀지지 않는 모양이다. 고치시를 중심으로 1877년부터 헌법제정, 국민이 뽑은 대표에 의한 국회 구성, 세금 낮추기, 자유로운 의사 표현과 집회의 자유를 보장하라는 자유민권운동은 제국주의의 광풍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일반 시민들의 의지였다.
역시 고치현 출신인 료마는 부국강병과 덴노로의 권한 이양으로 일본을 강하게 해야 한다는 군국주의 세력의 선구자에 불과할 것이다. 일본인들은 료마가 뜨는 것을 보면서 아베의 강한 일본 만들기에 환호할 지 모른다. 죽음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평화를 외치는 목소리는 작고, 전쟁을 부르는 목소리는 크다. 동네 곳곳에 평화헌법 개정 반대의 포스터가 붙어 있지만 일본 공산당의 외침일 뿐이다. 일본인들의 지지도 받지 못하는 정당의 외침은 공허할 뿐이다.
어제의 산길과는 달리 오늘은 계속 마을길을 걷고 있다. 27번 절이 있는데, 신봉산 산 위에 있다. 오르지 않는다. 마을길을 따라 작은 무인가게들이 있다. 귤 다섯 개를 한봉지에 담아 100엔을 받고 있다. 배추 한포기는 200엔, 자몽처럼 큰 귤은 800엔. 뭐든 내다 놓았다.
비닐하우스도 많이 보인다. 안에서 나무와 작물이 쑥쑥 자라고 있다. 날이 따뜻해서 야외에서 작업하는 농부들도 많다. 괭이로 밭이랑을 보수하고, 비료도 뿌려가며 뜨거운 땀을 흘리고 있다.
분명히 기차역을 따라 세 시간을 걷고 있는데 기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 과연 있을까. 쇼야마(하산)역에 도착해서 시간표를 확인해 보니 분명 쾌속 열차가 있다. 앞으로 15분 후에 출발한다. 아침에 준비한 샌드위치와 무인가게에서 산 귤로 점심을 먹는다. 오는 걷는 길에는 식당들도 문을 열고 있지만 내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끼니를 해결한다. 맛좋다.
고치역에 도착해서 보니 오늘 이동한 기차 요금만 5,200엔. 시코쿠 레일패스가 없었다면 이런 여행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호텔로 가는 트램도 왕복 2인 800엔이다. 고작 2km를 이동했다.
한 번 더 우동을 먹기 위해서 사카이데로 가는 기차를 탔다. 마루구메에서 갈아타야 하는데, 1시간 40분이 걸린다. 산길을 구비구비 돌아가는 기차는 흔들림이 심해서 청룡열차를 탄 기분이다. 키보드가 없었다면 일기도 쓰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이틀째 강행군을 한 그리미는 열심히 잠을 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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