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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서재

2009년에 국적을 회복한 단재 신채호_후통, 베이징 뒷골목을 걷다_171128

밤길을 밟아 향악당에 들려 풍물을 한 시간 치고, 농원으로 돌아와 온수매트에 엎드려 베이징 뒷골목 후통에 대한 이야기를 읽는다. 신채호 선생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가슴이 여릿하다.


"4월 10일(1919년), 임시정부의 조직을 발의하는 역사적인 회의가 상하이 프랑스 조계 내 진선푸루에 있는 한 주택에서 열렸다. (중략) 가장 민감한 문제는 정부 수반인 국무총리의 추대를 놓고 벌어진 논란이었다. (중략) 신채호는 이에 결렬하게 반대했다.


"미국에 들어앉아 외국의 위임통치나 청원하는 이승만을 어떻게 수반으로 삼을 수 있단 말이오. 따지고 보면 이승만은 이완용이나 송병준 보다 더 큰 역적이오. 이완용 등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아직 우리나라를 찾기도 전에 있지도 않은 나라를 팔아먹은 자라는 말이오."


(중략, 1922년 25세의) 김원봉이 신채호를 찾은 것은 요인 암살이나 주요 시설에 대한 테러 못지않게 선전 활동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암살과 파괴만이 능사가 아니다. 행동만이 있고 선전이 뒤따르지 않을 때, 일반 민중은 행동에 나타난 폭력만을 보고 그 폭력 속에 들어있는 바 정신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부절하는 폭력과 함께 또한 꾸준한 선전과 선동과 함께 계몽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248~257쪽)


친일파들을 제외하고는 편안한 일상을 살 수 없었던 시대. 신채호 선생과 가족들의 고단함은 대단했다.


"1924년 3월에는 생활고도 해결하고 집필 활동도 계속하기 위한 방편으로 베이징 톈차오 인근 관인후통에 있는 관인쓰에서 새벽 2시에 일어나 오후 10시까지 부처에게 배례하는 61일간의 계를 마치고 정식으로 승려가 되었다. 그러나 신채호의 승려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중략, 1년 만에 승려 생활을 청산하고 동가식서가숙 하던 중) 1928년에는 독서와 집필에 몰두한 나머지 눈병이 악화되었고, 완전히 실명하기 전에 어린 아들을 보고자 모자를 베이징으로 불러들여 1개월 남짓 같이 살다가 다시 돌려보냈다." (259~260쪽)


신채호의 마지막은 뤼순감옥에서의 8년이었다. 무정부주의동방연맹에 참여하여 폭탄 제조소 설치를 위한 자금을 모집하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0년형을 받았다. 그의 마지막 길은 참혹했다. 


"그의 건강이 심각한 상황에 이르자 형무소 당국은 서울의 가족에게 병보석 출감을 통고했다. 가족들은 일가친척 가운데 힘을 쓸 수 있는 친일파 인사를 보증인으로 세우고 가출옥을 제의했다. 그러나 신채호는 그대로 죽을지언정 친일파에게 자신의 몸을 맡길 수 없다 하여 이를 거절했다. (중략, 1936년 2월 21일) 신채호는 세민트 감옥 독방에서 쇠약한 몸으로 심한 노역과 추위에 시달리다 쓰러졌던 것이다.


(중략) 신채호는 화장되어 그 유해가 가족에게 인계되었다. 신채호는 생전에 "내가 죽으면 시체가 왜놈의 발끝에 차이지 않도록 화장하여 재를 바다에 뿌려 달라." 라고 하였으나, 가족들은 그를 매장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망명객인 터라 호적 같은 게 있을 리 없는 까닭에 매장 허가를 받을 수 없었다. (중략) 신채호는 해외로 망명을 떠난 이후로 "왜놈이 만든 호적에 이름을 올릴 수 없다."라며 스스로 무국적자가 되었다. 신채호가 국적을 회복한 것은 그로부터 97년의 세월이 흐른 2009년 3월 1일 가족등록부에 그의 이름이 오르고 난 뒤였다." (263~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