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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서재

일본을 위한 사랑 만들기_ 냉정과 열정사이_파란책_171220

금왕도서관에서 갈등했다. 한 권의 책을 더 빌릴 수 있는데, '나의 형,  체 게바라'와 '냉정과 열정사이'에서.

 

냉열을 가방에 넣고 체게바라를 펴고 의자에 앉았다. 냉열은 나에게 순서가 오지 않을지 모르지만, 체는 언제든 순서가 올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체의 이야기는 잘 알지 못하면서도 다 아는 것처럼 그립다. 볼리비아의 한 병사 이야기가 나온다. 서른여섯 살의 지친 혁명가의 목숨을 끊어야 하는 그는, 벌벌 떨다가 도망친다. 그리고는 다시 붙잡혀 들어온다. 그때, 체가 던지는 한 마디. 그것을 기억하기 위해 책을 덮고 부모님이 기다리시는 권안과로 갔다.

 

차에서도 집에서도 침대에서도 계속 붙잡고 있었던 덕분에 냉열은 24시간도 되지 않아 마지막 장을 덮게 되었다. '입담이 경이롭다'는 나그네님의 평가를 그대로 받아 들인다면, 책을 놓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평가에 반대한다면, 별 생각할 내용이 없어서 260쪽의 작은 책이기는 하지만 금방 끝낼 수 있었다.

 

이런 소설을 읽고는 어떻게 독후감을 써야 할 지 모르겠다. 청소년들을 독자로 하는 밑도 끝도 없는 사랑이야기라고 해야 할까. 첫사랑에 대한 끝없는 그리움을 표현하는 아름다운 이야기. 2000년 11월에 초판이 나오고 2016년 8월에 중판 82쇄가 나왔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를 '양'이다.

 

생생하면서도 멋진 표현들은 있다. 처음 이 문장을 읽었을 때 착상이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읽으니 기분이 묘하다. 일본인이 아니면 나올 수 없는 표현이랄까. 인간은 모든 생명과 마찬가지로 존재 자체로 존중받는 독립된 존재여야 한다. 독립된 자아로 살아가기가 매우 피곤하고 힘들기 때문에, 사람은 가끔 자유를 박탈당함으로써 행복하다고 느낄 수 는있다. 그러나 이게 일상이 된 쥰세이는 느닷없이 스승의 누드모델이 되기도 한다. 흐름도 맥락도 없어 보이지만 자아를 버렸다면,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다가 그는 스승을 뛰어넘는 위대한 기술자가 되고, 스승은 질투심에 눈이 멀어 사고를 치고 자살을 한다. 입담이 좋아서 그런지 허무맹랑해 보이는 스토리의 뒷부분이 자꾸 궁금해진다. 그렇다면 이것은 훌륭한 소설일까. 영화도 만들어졌다. 

 

 

"그녀의 주문대로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마치 신의 손바닥 위에 놓인 듯 잘 제어되어 기분도 좋다." (13쪽)

 

모든 노동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본인들을 우리는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메이지 유신 직전까지 800년 동안 사무라이들은 일본 사회를 '무사도'라는 이름으로 폭력 지배했다. 누구도 자신의 신분을 벗어나지 못했고, 사카모토 료마로 대표되는 메이지 세력들에 의해 비로소 사회의 틀이 조금 변하기 시작했다. 그것 역시 쇼군에서 덴노로 전근대의 상징을 교체하는 것에 불과했다. 결국 일본은 끊임없이 대를 이어 맡겨진 일을 해 내야 생존이 가능하다는 것을 그들의 유전자 속에 깊이 새겨둘 수밖에 없었다. 이 유전자는 최근 한 세기 동안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잘 제어되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일본인들이, 일에 대해 의미 부여를 했고, 열심히 일했다. 노동을 천시하는 사회보다 훨씬 빨리 발전할 수 있었던 힘이다.

 

"복원 일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잃어버린 시간을 돌이키는 세계에서 유일한 직업이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생명을 되살리는 작업...." (21쪽)

 

누구나 그렇다라고 끄덕일 수 있는 서술을 해내는 것이 작가다. 재능이 있어서 그럴 수도 있고, 노력해서 찾아낸 결과일 수도 있다. 이 평범한 문장이 모두의 고개를 끄덕이게 하여, 무려 17년 동안 이 책이 계속 인쇄되도록 하는 힘이 되었다. 나도 출판된 지 18년 만에 어제 처음 이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 대단한 인생의 지혜가 응축된 문장은 아니었지만 마음을 울리는 느낌이 있다. 

 

"사람이란 살아온 날들의 모든 것을 기억할 수는 없지만, 소중한 것은 절대로 잊지 않는다고, 난 믿고 있다." (42쪽)

 

급히 라파엘로의 초상화를 찾지 않을 수 없었다. 동양인을 어떤 특정의 서양인과 닮았다고 이야기 한다. 한국과 중국에서는 불가능하겠지만, 그래 일본이라면 가능하겠다. 아무리 허구라지만 어느 날 갑자기 제자가 스승의 실력을 뛰어넘어 버리고, 서양의 화가와 외모가 닮았다고 해 버린다. 절차와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비약이다. 미션 임파서블의 톰 크루즈가 대혼전을 치르고 나면 그냥 혼자 일을 다 처리해 버린 것과 같다. 절대로 밉지 않은 주인공. 쥰세이는 끝나버린 사랑을 잊지 않는다. 그 사랑은 태아의 유산으로 깨어졌었다. 사랑을 깬 것은 그였지만, 깨버린 사랑을 끝까지 잊지 못한다. 생명을 너무도 고귀하게 여기는 그는 사랑하던 여인의 생명 경시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물론 오해였지만 말이다. 인간의 아름다운 모습을 전부 섞어 놓아서 또 다른 사랑 영웅을 만들어냈다.

 

"라파엘로의 성모는 세계 최고라고 생각해요. (중략) 사실 난 라파엘로와 같은 우르비노 출신이죠. (중략) 여기서 그의 그림을 지키며 보내는 인생도 괜찮은 것 같아요. (중략) 아, 그러고 보니 당신, 라파엘로와 너무 닮았어." 그러면서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배를 잡고 웃었다." (46~7쪽)

 

사랑은 어떻게 표현해도 아름답다. 그렇지만 이렇게 표현했기 때문에 더욱 아름다웠을 것이다. 피렌체에는 사랑 이야기가 없었다. 멋진 사랑을 만들기 위해 피렌체의 권위에 사랑을 덧 씌운 것이 좋은 착상이었다. 사랑의 내용은 없는데, 피렌체의 사랑이라고 하니까 멋지게 느껴진다. 피렌체와 밀라노와 도쿄와 뉴욕 등 무수한 거대 도시들의 권위를 이용하여 사랑을 권위 있게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냉열의 사랑은 첫사랑이면서 잊히지 않는 사랑이면서 위대한 사랑이 되었다.

 

"땀을 흘리며 몇 백 계단을 필사적으로 오르면, 거기에 기다리고 있을 피렌체의 아름다운 중세 거리 풍경에는 연인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 주는 미덕이 있다고 했어." (99쪽)

 

혼자만의 외로운 사랑이 아니라는 확신만 든다면 언제나 과감히 도전해야 할 아름다운 도전이 사랑찾기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든 예술에 대한 사랑이든 같다. 너무 유치해서 회의가 들더라도 사랑해야 한다.

 

"왜 아오이는 이곳으로 왔을까. (중략) 과거에 사로잡히지 않고, 미래를 꿈꾸지 않는다. 현재는 점이 아니라, 영원히 계속되어 가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내 가슴을 때렸다. 나는 과거를 되살리지 않고, 미래를 기대하지 않고, 현재를 울려 퍼지게 해야 한다." (254쪽)

 

사랑하기 위해서는 만나야 한다. 만남은 헤어짐이나 외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인데, 그것이 사랑이라는 최고의 행복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인간은 만나고 사랑해야 한다. 사랑의 끝은 헤어짐의 고통이겠지만 사랑을 위해서는 그런 고통쯤은 감수해야 할 것이다. 

 

"수많은 사람을 만날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과 헤어질 것이다. (중략) 인간이란 헤어지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닌가. 그 고통에서 도망치기 위해 모두 새로운 만남을 필요로 하고 있다. (중략) (223쪽) 우리 두 사람 사이로 냉정과 열정이 번갈아 밀려와, 말과 감정을 억눌렀다. (240쪽)"  

 

공감하는 부분이 많은데도 큰 흐름에서 느껴지는 이 거부감은 무엇일까. 일본 문화에 대한 적개심일까, 분명하지는 않지만 느껴지는 다른 의도때문일까, 모든 사랑의 귀결점인 성행위에 대한 숭배 때문일까. 입담이 좋아 24시간을 잘 보냈다고 해야 할까. 깊이와 실존이 느껴지지 않는 쉬운 즐거움을 위한 연애소설이다.

 

- 냉정과 열정사이 / 츠지 히토나리 지음 / 양억관 옮김 / 소담출판사 / 2016년 8월 중판 82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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