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는이야기/서재

정말_나오시마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_차현호 지음_171206 Xīngqísān среда

긴 여행 보다 짧은 일정의 여행 계획을 짜는 것이 더 어렵다. 보고 싶은 곳이 많아 버릴 곳을 선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일정을 쪼개어 여행의 피로를 증가시키는 것도 싫고, 긴 거리를 단축하기 위해 많은 돈을 쓰는 선택도 어렵다. 시코쿠 마쓰야마행 비행기 티켓을 끊어 놓은 지 한 달이 넘었는데도 아직 일정의 대강 조차 잡지 못하는 이유다.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책이나 읽자고 금왕도서관에 들렀더니 이 책이 눈에 들어온다. 하루끼 소설 읽기를 그만두기를 참 잘했다.


울산 석유화학공업단지를 보고 자라서 화학자가 되려다가 건축 전시회에서 화학을 배신하고 건축가의 길로 방향을 고쳐 잡은 '마음 얇은 사람' 차현호가 지은 책이다. 그래도 좋아하는 일을 찾았다니 잘 된 일이다. 100 쪽을 읽었는데, 중간 평가를 하자면 잘 썼다. 가고 싶은 생각이 적었던 세토내해의 섬들이, 꼭 가봐야 하는 곳이 되어 버렸다. 그가 가진 감성과 건축가의 시선으로, 내가 놓치기 쉬운 '그저 그런' 무엇인가를 묘사하는데, 호기심을 자극한다.  설득력이 있다. 코드가 맞는다. 2017년 8월에 발행된 초판이라는 아쉬움이 있다. 하루끼의 '상실의 시대'가 10년 동안 160쇄가 넘은 것과 비교하면 말도 안되는 흥행이다. 사랑이 좋기는 하지만 말이다.


"(다까마쓰항에서 배로 40여 분 후) 날렵한 수평 지붕과 이를 떠받치는 얇은 기둥, 벽을 대신하는 투명한 유리창. (중략) 페리 터미널 '바다의 역 Marine station Naoshima' (Artwork No. 202)이다. 멀리서 보면 바늘처럼 가느다란 기둥과 유리벽 때문에 지붕이 마치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가벼워 보인다." (34쪽)


차현호가 높이 평가한 안도의 최근작을, 그의 안내에 따라 인터넷에서 찾아 보았다. 물론 나는 그를 몰랐다. 파란 라벤더 동산에 부처의 머리가 삐죽 내밀어진 괴기스런 작품, atama daibutsu다. 참으로 별난 취미가 아닐 수 없다. 20여 년 전 석양 무렵 용인의 와우정사 불상을 처음 봤을 때의 느낌이랄까. 불상 앞에서 하늘을 배경으로 한 부처의 모습은 좋았다. 사진과 현장은 다를 것이다. 삿포로라.


"보통 건축가한테 "예술의 섬을 만들려는데 당신이 건축 계획을 맡아주시오"라고 한다면 열에 아홉은 '세상에 이런 기회가 내게 오다니' 하며 입이 귀에 걸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첫 반응은 신통치 않았나 보다. 나오시마 하면 오염된 바다, 제련소로 인해 섬의 절반이 민둥산이 되어버린 기억이 그에게 아직 남아 있었던 탓이다. (중략) 그런 곳을 문화가 살아 숨 쉬는 섬으로 만들겠다니. (중략) 1988년 어느 밤, 나오시마를 향하는 배에서 안도 다다오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다를 바라보게 된 연유다. (중략) 그리고 30년이 훌쩍 지난 지금, 나오시마는 죽기 전에 한 번은 가봐야 할 명소로 각광받고 있다." (38~9쪽)


농원에 내려올 때는 허접하더라도 내 손으로 집을 짓는게 좋았었는데, 요즘에는 백 년 이상 오래 남을 집을 짓고 싶어졌다. 부모님이 30년 정도만 쓰고 나중에 새로운 집을 짓겠다며 대충 지은 농원의 집을 고치고 싶어진다. 그러다 다시 생각해 보니, 지붕을 가벼운 기와로 다시 씌우고, 전실과 뒷 베란다 공사를 하게 되면 백 년 이상 쓸 수 있겠다. 


"지추미술관은 그 이름[地中]이 말해주는 것처럼 나오시마 자연 경관을 해치지 않겠다는 건축가의 의도 덕분에 지하에 자리하고 있다. (사실 언덕을 깊게 파헤쳐 공사를 한 다음에 다시 덮은 것이죠. 그래서 과연 자연을 존중하는 디자인일까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오시마 환경에 대한 존중이라기보다 빛을 극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안도 자신의 욕망이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 하는 ..... ) (중략) 미술관은 작품을 담는 곳으로, 공간은 작품의 배경으로서 뒤로 물러서는 게 정석인데, 이곳은 오히려 건축가의 공간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세계 어느 곳을 가더라도 이렇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미술관이 또 있을까 싶다." (45~6쪽)




대도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투자와 아이디어가 필요하다. 반면에 시골의 마을 만들기는 훨씬 쉬워 보인다. 잘 만든 시골마을로 도시인들을 옮겨오게 하는 것이 도시 문제를 해결하는 지름길이다. 우리 동네는 마을을 떠나 도시에 살다가 은퇴한 사람들이 다시 들어오고 있다. 저렴한 땅값과 깨끗한 환경 때문이다. 살기 좋은 마을들이 거의 노인 요양원으로 변해 버리고 있어서 안타깝다. '집(家 이에) 프로젝트'가 필요한 마을이 한 두 군데가 아니다. 마을 만들기의 핵심은, 농사 지어서 수억 원씩 벌고 있다는 허황된 이야기 말고, 여유롭고 멋지게 사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일과 놀이와 예술과 공부가 하나가 되는 마을이다. 굳이 관광객을 상대로 마을을 내어주지 않더라도 괜찮은 마을을 만들어 사람들이 모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관광객들에게 온전히 마을을 내줬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의 미래를 위해서 도움이 된다면 불편을 감수하기로 결심한 (중략) 혼무라에는 폐가를 고쳐서 작품을 하나씩 들인 집들, 이제는 갤러리라고 불러야 하는 집들이 마을 여기저기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중략) 통칭해서 '이에 프로젝트 家 project' 라고 부른다. 1997년 마을 주민이 떠나고 고택 하나가 비자, 빈집을 작품으로 바꿔줄 작가를 초대한 게 그 시작이다. (중략, 제임스 터렐의 '달의 이면') 놓치면 후회한다는 것. (중략) 자연스레 마을을 한 바퀴 둘러보게 하는 방식이 아주 인상적이다." (52~5쪽)

마을 만들기에 성공하려면 개성있는 주택들을 지어야 한다. 국가에서 지원하고 군차원에서 기획하여 리 단위로 마을 계획을 작성하고, 마을에는 지하망을 구축해서 상하수도와 전기, 인터넷, 가스를 공동으로 관리해야 한다. 아름다운 도로와 공원을 만들고, 건축 허가를 내주되 특성이 없으면 불허해야 한다. 다섯 집에 한 곳씩  폐수처리를 위한 연못을 만들고, 집집마다 반드시 정원을 갖추도록 하여 의미가 있는 꽃과 나무들을 가꾸게 해야 한다. 아주 가끔 고택들이 남아 있으니 그것들을 살려내면 더욱 좋다.    

"(이누지마 정련소의) 사진에는 무너져 내린 벽돌더미와 나무가 무성하게 자란 용광로, 그리고 폐허의 상징처럼 우뚝 솟은 굴뚝이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건축가라면 아마 폐허의 느낌을 어떻게 유지하면서 공간을 만들지 고민할 것이다. 깨끗하게 밀어버리고 시작할 수도 있겠지만, 폐허는 다른 장소에서 느낄 수 없는 독특한 감정이 적층되어 있으니 이를 지우기보다 이용하는 편이 이야기가 살아 있는 감동적인 공간을 만들어낼 가능성이 높다. 어떤 이는 이를 두고 '폐허는 농밀한 기억이 침전된 특정한 장소'라서 그렇다고도 한다. 그러니까 단순히 물리적으로 공간이 낡아서가 아니라, 장소가 품었던 이면의 이야기와 무의식적으로 연결된다는 뜻이다." (107쪽)

음성군이 검색어 1위에 올랐었다고 한다. 문화예술회관에서 공연하는 유키 구라모토 피아노 연주회의 가격이 단돈 2만원이기 때문이다. 물론 티켓은 15초만에 완판되었다고 한다. 이전에도 발레 공연이나 조지 윈스턴 연주회 등을 2만원으로 관람할 수 있게 했다고 한다. 다른 도시의 사람들로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인 모양이다. 정작 음성에 살고 있는 나는 주말이면 부천으로 올라와야 하니 이런 공연들을 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어쨌든 관심을 받는 것은 좋은 일이다. 매력이 있다.

"지추미술관은 나오시마의 자연환경을 해치지 않기 위해 땅속을 파고 들어갔고, 데시마미술관은 부드러운 곡선으로 주변과 어울리는 디자인을 입고 있으며, 이누지마의 세이렌쇼미술관은 자연의 흐름을 건물 내부로 들여와 특별한 설비 없이 내부의 온도를 조절하는 친환경 건물이다. (중략) 오기지마는 꽤 세련된 얼굴이다. 건물(페리 터미널로 결혼식 등 마을 사람들을 위한 행사에도 사용된다는 다목적 공간 / 무일)을 보고 있으면, 섬에 놀러온 하얀 얼굴의 도시 여인이 양산을 받쳐 든 모습이 떠오른다. 아마 20대 후반쯤 되지 않았을까." (131쪽)

농사 지을 땅을 사려고 돌아 다닐 때 바닷가 쪽은 가 보지도 않았다. 동해 바다와 남해 바다는 너무 멀었고, 서해 바다는 가까웠으나 이미 비싸졌고 진흙이 새옷에 묻는 느낌을 좋아하지 않아서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바라보는 바다가 너무 좋았고, 비행기든 고속열차든 빨리 이동할 수 있게 되니 생각이 달라졌다. 기회를 봐서 새로운 터를 보러 다녀야겠다. 생활밀착형 작품이라는 예술가의 답과 아름다운 바다에 끌리는 마음이 매우 좋았다.


"온바 乳母 おんば는 일본말로 '유모, 유모차'를 말한다. (중략) 비탈길, 좁은 골목길이 이어지는 오기지마에서 온바는 간단한 물건을 담고 종횡무진 다닐 수 있는 생활필수품이다. 온바팩토리는 이들의 수레를 멋지게 수리, 디자인해서 주민들에게 돌려주거나 새로운 스타일의 온바를 만들기도 한다. 굳이 말하자면 이동식 입체 작품인 셈이다. 생활 밀착형 예술이랄까. 아무튼 주민들이 자랑스럽게 온바팩토리의 수레를 밀고 다니며 섬에 풍경 하나를 더하고 있다. (중략) 섬의 일상에 밀착해 지속될 수 있는 것, 관객들도 계속 오고, 작품들도 지속될 수 있는 것. 온바의 작업은 이런 물음에 대한 답을 하고 있다. (중략) 섬의 골목에서 길을 잃어 돌아가려고 뒤로 도는 순간 골목 사이로 보이는 바다가 무척 아름다웠다" (139~143쪽)

예술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모양이다. 좀 더 젊은 시절에 미술에 눈을 뜨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정도다. 미술 이론의 암기는 열심이었지만 그것이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으니. 모든 문화에 대한 관심이 깊어야 한다. 그러면, 춤도 알아야 할텐데.

"300명이 넘는 마을 주민과 함께 간장 공장에서 남아도는 간장 병을 수거하여, 빈병마다 농도가 다른 간장을 주사기로 넣었다. 그 숫자가 무려 8만 개! 농도가 다르니 간장을 넣은 병의 투명도도 달랐다. (중략) 이런 8만 개의 병을 쌓아 벽을 만들자 벽은 아름다운 그러데이션을 보여줬다. 기억의 그러데이션이라고 할까. 마을 사람들도 수십 년간 간장을 만들면서 아마 이렇게 간장이 예술이 되는 순간은 처음 보았으리라." (183쪽)

어제(12월 10일) EBS의 여행 프로그램을 보는데, 스와힐리어로 케냐 사람들과 소통하는 그를 보았다. 소통이 없었다면 안타까운 빈곤과 생존을 위해 생명을 걸어야 하는 위험과 거친 노동과 험한 음식만을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소통이 가능해지자 정이 오가고 농이 오간다. 언어가 소통을 가로막는 벽이 된다는 생각을 해 보지 않아서 어떤 언어든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예술가들은 아예 언어를 모두 없애 버리는(ALL AWAY) 방법으로 새로운 소통을 시도했다. 재미있는 발상이다. 

"다카마쓰에서도 '올어웨이 카페' ALL AWAY CAFE라는 제목의 재미있는 먹거리 작품이 선을 보였다. (중략) 나는 당신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식당에 들어가면 뭔가 맛있는 지역 음식을 먹고 싶기는 한데 벽에 붙은 메뉴가 당최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는 거다. 손짓으로 이것저것 가리키며 주문을 한다. (중략) 서로 말이 통하든 토하지 않는 작품에 참여한 사람은 손짓과 눈빛으로 주문을 하고 나오는 음식을 불평하지 않고 먹어야 한다. 가격은 무조건 500엔. (중략) 여기에는 단순히 음식을 주문하는 퍼포먼스를 넘어서는 의미가 있다. 소통 수단으로서 언어는 훌륭한 방법이지만, 동시에 동일 언어 밖의 사람들과는 단절된다는, 어떤 의미에서는 장벽이 생겨버린다는 사실을 일러주는 것이다. 즉, 올어웨이 카페는 예술을 통해 이 벽을 한번 넘어보자고 제안한다. (중략) 꽤 매력적이고 배까지 든든해지는 작품이다." (219~220쪽)


참 좋은 발상이었다. 틀림없이 돈도 그리 많이 들지 않았을 것이고, 사람들이 제공하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전시하고, 서로를 사랑하며 위로하게 한다. 마을 만들기에 성공하려면 이런 독특하고 가슴을 울리는 창의성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매우 어렵다. 

"아와시마의 우체국도 1991년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고 섬을 떠났다고 한다. 그러다 2013년 예술제를 맞이해 우체국 문이 다시 열렸다. (중략) '표류 우체국'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중략) 주인공인 아휘(양조휘 분)는 사랑을 찾아 세상 반대편인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왔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바람피우는 연인 보영(장국영 분)과 힘든 식당일뿐이다. 하루는 식당에 세상의 끝 우수아이아로 가는 여행자가 찾아온다. 그는 여행하면서 세상 사람들의 소망을 녹음했다가 세상 끝에 도착하면 그들의 소원을 그곳에서 틀어주겠다고 말한다. 여행자는 아휘에게 녹음기를 쥐여주고 잠시 자리를 비운다. (중략) 표류우체국은 예술제 기간에만 열고 문을 닫으려 했으나 계속해서 도착하는 편지들 덕에 (중략) 한 해 약 1만 통이 넘는 우편물이 쌓이고" (288~292쪽)

시코쿠 여행이 아니었다면 이 책과는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끊임없는 호기심이 인간의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이라면, 어떤 책은 많은 호기심을 불러 일으킬 수 있고, 이 책이 곧 젊음의 묘약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너무 큰 기대를 걸고 읽을 필요는 없다. 하루키는 160쇄가 될 정도로 만인의 사랑을 받고 있지만 나의 사랑을 받지는 못했고, 차현호는 비록 1쇄지만 내 젊음의 묘약으로 평가받았다. 

"한 인간으로 세상의 어느 도시, 장소와 인연을 맺었다고 생각하는 곳이 몇 군데인가 있습니다." (30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