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기념일 행사를 무사히 마치고, 윤석양 이병의 인터뷰를 보았다. 보안사의 협박에 못이겨 나약한 자신은 운동권 친구의 이름을 댔고,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며, 잘못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기 위해서 보안사의 사찰 문건을 들고 탈영했지만, 여전히 자신이 가장 나쁜 사람이었기 때문에 조금도 자랑스럽지 않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잘 안 바뀐다고 말하는데, 제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사람은 오히려 바뀌는 거 같아요. 그런데 사회라고 하든 체제라고 하든 이런 건 오히려 잘 안 바뀌는 것 같더라구요"
정권이 여섯 번 바뀌는 동안 국군 보안사와 후신인 기무사가 국토 방위에 하등 관계가 없는 민간인을 사찰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변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삶의 목표가 자신들의 사욕을 추구하는 사람들 중에서 변함없이 지조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세상이 바뀌지 않을 것이다.
야만의 역사(The brutal history 쥐스또까야 이스또리야 жестокая история)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신석기 시대의 인류들은 풍족하지 않았는데도 서로 나눠 먹으며 살았다고 한다. 청동기 시대로 넘어 오면서 더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었는데도 인류는 쉬운 쪽으로 역사를 발전시킨다. 영웅들의 시대.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등장하는 오딧세우스와 아킬레우스, 헥토르 등은 사람을 잘 쳐 죽이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예쁜 아내들과 노예와 금은보화를 잔뜩 걸머지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싸웠다. 그런 살인마들을 영웅으로 추앙한 시대가 청동기 시대이고, 지난 오천년 동안 영웅의 의미는 바뀌지 않았다. 오다와 히데요시, 이에야스로 이어지는 일본의 3대 영웅이나 이토와 같은 메이지의 영웅들 또한 아시아인들 특히 우리 한민족을 최대한 많이 죽인 것으로 일본의 영웅이 되었다. 꼭 기억해야 할 일이다.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야만의 상태에서 벗어난 상태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세상을 지배하면서 이만큼 좋아졌다. 그렇다고 야만의 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것은 아니다. 죄없이 희생되는 사람과 자연이 대폭 줄어 들었다는 정도다. 끊임없이 좋아지고 있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꽃을 피우게 하는데는 좌파 또는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가 큰 역할을 했다. 자유와 인권과 복지의 경쟁이 없었다면 현재의 수준까지 올라오는데 훨씬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런데, 녹색당과 페미니즘으로 대표되는 넓은 의미의 좌파를 제외하고 사회주의(사회민주당)와 공산주의(공산당)는 사라져 버렸다고 제프일리는 담담하게 말한다.
"1960년대 이전의 한 세기 동안 사회당과 공산당은 유럽에서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커다란 작업을 수행하면서 선거를 통해 지지를 확보하고 정교하게 발전되 대중조직들에 자신들의 영향력을 뿌리박고 있었다. (중략) 1960년대 말에서 공산주의가 몰락한 1989~91년 사이에 사회주의 전통은 위기에 빠져들었고 지금도 이 위기에서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공산주의자들의 경우에 이것은 분명 소련의 정당성 상실(1968년 체코 침공과 1981년의 폴란드 노동운동 탄압으로 민주주의를 유린했다) 및 최종적인 몰락과 연관된 것이었지만, 사회민주주의 역시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케인즈주의의 종언과 더불어 방향성을 상실함으로써 마찬가지로 쇠약해지는 경험을 했다.
두 경우 모두에서 이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에 대한 설득력 있는 대안으로서는 그 생명력을 다했다. 대중의 인식 속에서, 특히 공적 논쟁에서 허용되는 언어 속에서 사회주의 사상은 반향을 모두 잃어버렸다. 자본주의를 대체하는 - 중앙에서 계획되고 관료적으로 조정되는 국가 부문에 기초하여 경제를 재조직하는 - 신뢰할 만한 프로그램으로서의 사회주의는 사라져 버렸다. 예견 가능한 프로젝트로서의 사회주의는 현실적인 시야에서 완전히 멀어졌다." (33~38쪽)
자본주의가 군사력을 앞세우는 제국주의로 전환되지만 않는다면 자본주의 자체의 역동성과 경쟁 때문에 굳이 새로운 대안을 고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가장 평화로운 가치인 종교도 신의 이름으로 전쟁을 해 온 지 수천 년이 넘었다. 평화로운 방법으로 야만성을 극복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조금씩 앞으로 나갈 뿐이다. 지금 현재 삶의 고통에 처한 사람들에게 따뜻한 시선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도록 집중하는 것. 그것으로 점점 더 야만의 역사에서 벗어날 수 있다.
- THE Left / 제프 일리 지음 유강은 옮김 / 뿌리와이파리(2008년 초판 2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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