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를 짓게 하려면 생산의 기쁨을 맛보게 해야지 이렇게 더러운 일을 시키면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잖아."
"이게 농사에요."
"지저분하고 힘들어서 농사는 안되겠다."
가을 농사 체험을 온 선배들과의 대화다. 대체로 정년을 10년 이내로 남겨두고 있어서 다음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고, 쉽게 꿈꾸는 것이 귀촌이다. 그래서 겸사겸사 농원으로 놀러 왔는데, 하필이면 부직포 걷고 비닐 걷는 일을 해야 하는 시점이었다. 할 일 없다고 슬슬 산책만 해도 좋았겠으나 "농사짓는 주기 전체"를 다 보겠다고 했으니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다. 그랬더니 이런 반응이다.
그래도 두 시간 동안 쉬엄쉬엄 열심히 부직포를 걷고 핀을 뽑아내고 들깨단을 걷어냈다. 기본이 성실한 사람들이다. 쉬는 시간에는 웃고 떠들며 놀았더니 나는 매우 즐거웠다.
돌이켜보면 귀농을 준비하면서 나는, 이런 힘든 농사일을 체험할 때조차 즐거웠다. 어리석은 일이었다. 내 땅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다면 험한 일도 별 일이 아니라고 착각했다. 그런데, 실제로 농사를 지어보니 농부는 온갖 험한 일을 전부 도맡아 해야 했다. 누구나 할 수 있으면서도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
20kg 퇴비 포대 200여 개를 어깨에 지고 날라다 삽으로 뿌리고(냄새나고 어깨와 팔과 다리가 고통스런 일이다), 트랙터를 빌려 밭을 갈아 이랑을 만들고 비닐과 부직포를 씌우고(위험하고 허리 아프고 다리 아프고 지루한 일이다), 풀을 뽑고 예초기로 긴풀을 깎고(위험하고 허리 아프고 덥고 시간이 많이 걸려 지루하고 답답한 일이다), 부직포와 비닐과 쇠말뚝을 걷어내고(먼지나고 지저분하고 팔아프고 허리 아프고 지겨운 일이다), 수확하고(엄청 힘들지만 즐거운 일이다), 나누고(고맙다는 인사를 듣기에 매우 기쁜 일이나 월급쟁이 통장에서 돈을 억지로 빼앗기는 기분이다), 팔고(사 달라고 비는 것도 아닌데 괜히 아쉬운 소리 하는 느낌이다), 뭔가를 만들어 저장한다(재미있지만 많은 정성을 기울여야 하고 힘이 많이 든다).
농부가 기쁨과 행복을 느낄 때는, 저 모든 일을 시작하기 전 새벽에, 그 모든 일을 하고 난 저녁에, 논둑이나 밭둑에 서서 자연의 경이로운 변화를 바라보며 내 것처럼 즐길 때다. 하루도 같은 날이 없다. 여린 작물들은 아이가 자라듯 몸집을 키우고 새싹을 밀어내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고라니와 풀과 병충해로 이리저리 몸이 뒤틀리고 때로는 죽어가면서도 뭔가를 해내는 것은 농부가 아니라 그들이다. 그들의 삶이다.
농부는 그저 쉬면서 지켜보며 깨달을 때, 즐겁고 행복하다.
삼성면 시장에 공연장이 만들어져서 준공식을 했다. 어우리패의 풍물공연이 있었는데, 마침 선배들이 내려와서 공연도 구경하고 사진과 동영상을 찍어 주었다. 너무 굳어 있는게 아니냐며 편안하게 하란다. 공연은 연습과 달리 틀려서는 안되기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서 얼굴 표정이 굳어지는 게 사실이다. 그런 긴장 속에서도 멋진 합주가 이루어지고 나면 마음 속에서 희열이 느껴진다. 표정이야 어떻든 내 마음 속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행복이 있다. 관중들이 보기에 그렇다면 앞으로는 잠깐씩 웃어줘야겠다. 與民同樂. 함께 즐기는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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