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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천국/러시아여행_바이칼에서 블라디보스톡

은빛처럼 반짝이며 시냇물이 흐른다_ 치타에서 하바롭스크로_170805 수보따 суббота

잠깐만 눈을 들어 밖을 내다보면 작은 시냇물이 은빛처럼 흐르고, 순한 소들은 메어있지 않아도 먹을 것이 널린 들판을 유유히 즐기고, 그런 소들과 시냇물과 초원과 숲을, 어린 왕자를 읽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 즐긴다. 끝이 날 것 같지가 않다.


그의 별에서
길들여진 장미 한 송이가 그를 그리워하고 있다


하늘에는

수 백 수 천만의 별들이 빛나고 있다

가끔 고개를 들어 은하수를 바라보면
어딘가에 있을 나의 별과
사랑하는 법을 몰랐던 자존심이 강했던 장미꽃이 있어서
어린 왕자는 행복하다


아침에 그리미가 잠깐 화장실에 갔지만 실패하고 세수만하고 나온다.


넓은 열차 속 화장실 누가 와서 쓰나요
새벽에 오키가 눈비비고 일어나
일을 보러 왔다가 세수만 하고 가지요.







밤 사이 옆 침대에 새로운 손님이 왔다. 아침 식사를 차리는데, 일단 예쁜 테이블보를 깔고, 커피와 홍차를 따르고, 전기구이 통닭 한 마리를 내놓고, 토마토와 빵과 오이로 성찬을 준비한다. 사진을 한 장 찍고 싶어서 즈드라스뜨븨쩨. 알아듣지 못했는지 대답을 하지 않는다. 흠. 게스트 운이 없다고 해야 할까. 부부는 다정하게 웃으며 대화를 나눈다.


열차가 달리는 동안에도 카톡 메시지가 잘 전달된다. 30분이 넘도록 문자 수다를 떨었다. MTC가 열차에서도 작동한다는 말은 아주 거짓은 아니었다. 핫스팟 기능도 하기 때문이다. 큰 기대는 하지 말아야 한다. 인터넷 서핑까지 가능할 때는 그리 많지 않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새벽은, 8월 5일 7시에서 9시 정도, 내 가슴 속의 멋지고 아름다운 이미지들을 끄집어 내기 좋은 시간이다. 머나 먼 추억 여행도 아니고, 근사한 여행의 기억도 아니다. 어제, 그제, 그리고 지금 창 밖을 스치는 모든 것들을 아름답게 기억하게 한다. 누군가에게 횡단열차는 뜨거운 깡통이고, 다른 누군가에는 아무런 자유도 없고 알무런 행동도 할 수 없는 군대 생활이겠지만, 더위를 견뎌내는 단순한 방법들을 실행하고, 아름다운 모습들을 발견하려 하고, 좋은 사람들과의 동행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아침으로는 빵과 커피와 떡국을 먹었고, 점심으로는 오뚜기 우거지 해장국과 떡국과 오뚜기 햇반을 먹었다. 오이와 토마토를 곁들였다. 난민과 같은 생활이라 하지만 가난한 살림에서 한 술 덜어내어 더 배고픈 누구에게 나누는 행위, 달걀 후라이 반쪽을 양보하는 미덕이 사랑을 더욱 깊게 한다. 비록 그렇지 않더라도 누가 무엇을 더 먹고 싶어할지를 살피는 마음 자체만으로도 사랑은 깊어지는 것이다. 먹고 살만하고 사랑이 깊어진다면 가장 훌륭한 여행이라 할 것이다.


이제 열 시간도 남지 않아서 화장실에 가서 프랭글스 샤워기로 머리를 감았고, 수건에 물을 적셔 샤워를 했으며, 15호차로 가서 깨끗한 화장실을 사용했고, 에어컨 바람을 잠시 즐겼으며, 쏘냐에게 다시 한 번 이름을 물었다. "까끄 바스 자붓(как вас зовут)". 여전히 그녀는 나를 외면한다.


화장실 앞의 소화기에 비닐 봉지가 하나 매달려 있었다. 도대체 누가 쓰레기를 이곳에 묶어 놓았을까. 이틀을 궁금해했다. 예절을 아는 그들이 어째서 이런 무도한 일을 저질렀을까. 오늘 그 답을 알았다. 충전기 때문이었다. 창문 저 위 쪽에 달린 콘센트에 스마트폰을 충전하기 위해서는 벽체 위쪽에 달린 소화기에 비닐 봉지를 매달아 그 안에 충전기를 연결한 스마트폰을 넣어 놓아야 두 시간 동안 스마트폰을 들고 서 있어야 하는 벌을 받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좌석 옆에 콘센트를 갖춘 행운을 누린 우리는 다른 승객들의 불편함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열차에 설치된 콘센트와 냉방장치를 보면서 노동자의 게으름과 정치가의 반대중성을 여실히 체험했다. 사용자의 입장에서 조금만 더 생각했더라면, 노동자도 언제나 편의시설의 사용자가 될테니까, 이런 식으로 콘센트를 설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 처음에는 그렇게 설치했다가도 어떻게든 옮겨서 설치했을 것이다. 시민 대중을 이해하는 정치가라면 설사 요금을 더 인상해야 했을지라도 30도가 넘는 깡통열차를 이용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노동자는 노동에 성실하게 임해야 하고, 정치가는 시민 대중의 자유와 행복 증진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노동자나 정치가들은 다시 교육을 받거나 퇴출되어야 한다. 그래서 사회주의는 퇴출되었다.


둘째 날이었으면 도저히 오지 않았을 날, 논산훈련소의 정문 앞이라면 너무도 까마득했을 그 순간이 왔다. 하바롭스크에 정시에 도착했다. 일부 역은 연착을 했지만, 오래 쉬기로 했던 일부 역의 정차시간을 줄이면서 중간역인 이곳 하바롭스크역에는 정시에 도착했다. 한 시간 정도 정차한다고 하니까 모든 승객들이 기차역을 빠져 나간다. 쏘냐에게 굿바이라고 인사했지만 끝내 답은 듣지 못했다.










열차에서 주고 받은 문자에 의하면 주인장이 마중을 나온다고 하기에 전화를 했는데 통화가 되지 않는다. 하필이면 심카드의 충전 유효금액이 오늘까지인 모양이다. 하바롭스크지역지도를 미리 다운받아서 숙소 위치를 설정해 두었다. 해 보자. 구글지도를 켜고 방향을 잡아 보았다. 비엔나에서 실패한 길안내를 다시 한 번 시도해 보았다. 노트 10.1의 위치 표시를 켜고, 화면 자동전환을 껐다. 잠시 후 나의 위치가 표시된다. 멋진 하바롭스크역을 등지고 지도를 보니 왼쪽 건너편에서 34번 버스를 타면 된다고 한다. 버스정류장 앞에 MTC가 있었다. 150py을 내고 다시 충전했다. 통화가 된다. 주인장과 천재의 통화 뱅뱅돈다. 전화를 바꿨다. 그녀가 나의 위치를 묻는다. 야 바그잘. 너는 어디냐고 물었다. 집에 있단다. 드밧쨔찌 미누뜨 야 브 도마, 아프토부스. 20분 후에 집에 도착한다, 버스타고. 하라쇼. 도착하면 전화해라. 하라쇼. 엉터리 러시아어로 소통이 이루어졌다. 천재가 놀라워한다.


구글에 의하면 22py이라는 버스 요금이 25py로 올랐다. 택시를 탈까도 생각했지만 6정거장이라 그냥 버스를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참 근사하고 예쁜 도시다. 큰 도시다. 버스를 타자 안내양이 돈을 받으러 다닌다. 그리고 앞문은 이용하지 않는다. 넓은 뒷문으로 승차하면 안내양이 요금을 받으러 다니고, 도착하면 뒷문을 열어 먼저 내리고 나중에 탄다. 캐리어를 들고 앞문에서 승차하는 우리를 뚫어져라 바라본 안내양의 표정이 불친절하기는 했지만 재미있었다. 짐 요금은 따로 받지 않았다.


멋진 거리를 지나서 아무르강이 곧 보일듯한 곳에서 안내양의 신호에 따라 내렸다. 길을 건너는데 신호등이 없다. 왕복 6차선인데 말이다. 우리가 횡단보도에 서자 모든 차들이 일제히 선다. 벌금이 많은가 궁금증이 확 일어나면서 인간으로서 대접받는다는 기분이 들었다. 두 계단을 내려서서 전화를 했다. 그녀가 나온다. 반갑게 맞이한다.


집은 화면에서 본 그대로다. 그녀는 커다란 두 아들을 보더니 집이 너무 좁지 않느냐고 걱정을 했지만 우리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오신 분들이다. 너무나 넓고 쾌적했다. 게다가 에어컨이 돌아간다. 행복해서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사실 매우 시원한 집이라서 에어컨을 작동시킬 필요도 없었으나, 15호차를 그리워했던 그 마음을 보상 받으려고 시원하게 돌렸다. 선풍기와 세탁기와 주방시설과 벽난로 까지 갖춰져 있었다. 쇼파 베드는 좀 작았지만 그리미와 내가 눕기에는 충분해서 이층의 대형 킹 침대는 아들들에게 양보했다.


푸욱 쉬다가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깜짝 놀랐다. 왠만한 레스토랑의 가격이 1인당 3만원은 주어야 스프와 샐러드, 메인메뉴를 먹을 수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온갖 사치품들을 파는 매장들이 즐비하고, 모델처럼 차려 입은 여자들이 가득했다. 청담동이군. 상황파악이 되었다. 일단 공원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멋진 카페가 나타난다. 조용하고 차분했다. 손님들은 와인 한 병을 앞에 놓고 품위있는 듯 앉아 있었다. 요란하게 치장한 여인들도 보였다. 그냥 앉기로 했다. 메뉴판을 뒤졌다. 스테이크 요리가 650py(13,000원) 뭐 이 정도면 괜찮다. 아, 그런데 100g당 가격이다. 그렇다면 실제 고기의 무게를 알 수 없으니 가격은 더 올라간다고 보아야 한다. 파스타와 샐러드와 스프 쪽으로 방향을 다시 잡았다. 270g 내외에 400py 전후다. 괜찮았다. 파스타(새우크림, 카르보나라, 연어 크림) 세 개와 파예야 하나, 샐러드 하나, 러시아 맥주 두 잔을 시켰다. 음식은 대체로 먹을만했고, 분위기도 좋았다. 2,200py을 지불하려고 하니 속이 쓰리기는 하다.


식당를 나와서 공원을 따라 강변으로 내려갔다. 소녀가 바이올린을 들고 버스킹을 하고 있다. 들어주었다. 박수도 쳐 주었다.


강변으로 나갔다. 모기가 달려든다. 모기 기피제를 온몸에 바르고 강변을 거닐었다. 다행이 앙가라강의 모기들처럼 사납지는 않았다. 이르쿠트의 화신인양 사나웠던 그 모기들. 야경이 참 아름답고 평화로운 도시다. 멋진 교회와 정원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오래된 유적이 없어도 아기자기하게 볼 것이 많다. 빨간 벽돌과 페인트칠이 잘 된 시멘트 구조물과 양철 지붕이 묘한 매력을 주는 도시다. 꽤 큰 도시라 외곽까지 더 돌아다니면 좋을텐데, 우리는 관광객이니 이런 화려한 모습에 현혹될 수 밖에 없다.







열 시가 다 되어 가니 피곤하다. 보드카와 안주를 사서 집에 가서 술 한 잔을 더 하기로 했다. 막심의 가격은 비쌌다. 이르쿠즈크의 슬류댠카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느낌이다. 간이역의 노점상들이 파는 가격과도 비교할 수 없다.  통닭에 파이에 오이사이다에 감자볶음 등등 안주를 다 사고 주류 코너에 갔는데, 담당자가 10시 1분이 되면 주류 판매가 끝난다고 알려준다. 그 말이 방해가 되어서 결국은 술은 살 수가 없었다. 그래도 괜찮은 정책이라 생각한다. 은근히 주량을 줄이는 효과가 있다.


아쉬운 마음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가씨 두 명에게 물어 보았다. 오, 영어가 통한다. 어디에서 보드카를 살 수 있나요? 아, 열 시가 넘어서 살 수 없어요. 바나 레스토랑에서만 사서 마실 수 있어요. 참 좋은 규칙이네요. 고마워요. 매우 아쉽지만 술 없이 안주만 야식으로 먹어 보기로 했다. 새로운 맛 오이 스프라이트와 함께. 가능했다. 술 없이도 멋진 저녁이었다.


뉴스공장을 들으며 그대로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