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시가 되어 몸을 편안하게 일으켰고, 뜨거운 물을 끓여 그린필드 홍차 티백을 우렸다. 그리고 남은 물로 맥심커피를 탔다. 어제 쓰지 못한 일기를 쓰면서 음악을 들었다. 1층에서도 2층에서도 편안하게 잘들 잔다. 아침은 러시아 여행 최초로 누룽지탕을 끓였고, 비장의 반찬 무말랭이와 미소 된장국으로 간을 더했다. 어제 막심(콜택시 어플인 막심이 아니고, 쇼핑센터 이름)에서 산 오이와 고추로 야채를 보충했다. 몸에서 이 모든 것을 쫙쫙 빨아들이는 기분이다. 흡수가 잘 된다.
점심인지도 모를 아침을 먹고 집을 나서자 콤소몰 광장 위로 멋진 하늘, 그 아래에 파란색 교회가 근사하게 우리를 맞이한다. 집 앞 사거리는 어느 방향으로 사진을 찍어도 그대로 그림엽서가 되었다. 한참을 감탄하다가 아무르강으로 내려간다. 하바롭스크 광장에서 일하는 북한 노동자이 점심 시간을 맞이하여 쉬고 있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넸더니 반갑다고 인사를 다시 건넨다. 근육이 탄탄한 것으로 봐서 건강하게 잘 살 수 있을 것같다. 한국 관광단을 이끌고 다니는 젊은 가이드가 북한 노동자들을 보면 말을 걸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한다. 우리는 괜찮은데, 그들이 북한 정부로부터 위해를 당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터키의 돈두르마 아이스크림과 비슷한 맛을 내는 쫀득쫀득한 길거리 아이스크림을 사서 나눠먹고 천국의 계단을 멀리 돌아서 내려간다. 멀리 돌아서 공원 입구의 그 가게 근처로 가자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샤슬릭 집이 나온다. 관광객이 많이 찾아오는지 영어로 잘 응대해준다. 돼지고기와 양고기 샤슬릭을 시키고, 모히토 두 잔과 감자튀김까지 가벼운 간식을 들었다. 놀라운 것은 공원 안의 레스토랑이라 술을 팔지 않는다고 한다. 원하면 자기가 가져온 술은 마실 수 있다고 한다. 그런 줄 알았어야 술을 가져오지. 공원 근처에는 아예 술을 팔지 않는다. 참 좋은 제도다.
아무르강은 물살이 세서 흙탕물처럼 보이는데도 비키니를 입고 수영을 하거나 선탠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일요일이다. 모래사장 위에서 배구네트를 걸고 젊은 여자들이 건강한 몸을 뽐내며 비치 발리볼을 하고 있다. 남자들은 전부 시원한 그늘에서 구경만 하고 있고, 여자 심판에 여자 선수들이 두 개의 코트를 장악하고 땡볕에 땀을 뻘뻘 흘리며, 거친 모래 위에 몸을 내던져 배구를 하고 있다. 참 묘한 스포츠다.
아름다운 공원을 걷고 있자니 휴가를 나온 기분이다. 두 손을 놓고 자전거를 타던 한 소녀는 윙크를 보내며 스스로를 자랑스러워 한다. 버스킹을 하는 그의 앞에는 2py 동전 3개가 떨어져 있다. 내가 5py을 보탰어도 220원이 오전 내내 그가 버스킹을 해서 받은 돈이다. 그 돈으로는 노래 부르느라 애쓴 그의 목을 시원하게 적셔 줄 아이스크림 한 스푼도 사먹지 못할 것이다. 개의치 않고 열심히 부르는 것을 보면 가수 데뷔를 위해 무대 공포증을 해소하기 위한 훈련이 아닐까 싶다.
치즈루마를 사서 먹었다. 180py인데, 양이 참 많다. 한 끼 식사로도 충분한 양이고, 고소하다. 저쪽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다. 13살, 20살 이란다. 내 나이가 얼마쯤 되어 보이냐고 물었더니, 35살쯤 되어 보인다고 한다. 54살이라고 했더니 깜짝 놀란다. 밝고 건강하고 유쾌한데다가 영어도 잘하는 신세대 러시안들이다. 자전거를 타고 노는 모습이 보기에 좋다. 비가 내리기에 우산을 하나 줄까 했더니 괜찮다고 한다.
황금빛 지붕을 얹은 교회를 방문했다. 비가 내려 잠시 피하고 있는데, 왠 여자가 판도라라고 하면서 책을 한 권 선물한다. 소년들이여 안녕하신가. 대화도 통하지 않는 그녀가 왜 갑자기 천재에게. 숙소로 가지고 와서 보았더니 도서관에서 빌린 듯한 책이다. 아무래도 정신이 이상한 사람인 모양이다. 숙소에 두고 나왔다.
정신 나간 그녀든 구걸을 하는 사람들이든 매우 조용하다. 그래서 딱히 위협이 되지 않아서 좋았다. 우리가 잘 판단해서 움직이면 된다. 아주 가끔씩 경찰들이 보이는 것을 보면 치안이 아주 심각한 상태는 아닌 모양이다.
교회의 외관은 훌륭했다. 화려한 듯 화려하지 않고,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동화 속의 성처럼 작고 아기자기 하다. 검소하다. 다만, 조용히 하란다. 경건함이 미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종교의 이름으로 사람을 노예처럼 부리려 하지만 않아도 좋은 일이다. 정숙 정도는 흔쾌히 지켜 줄 용의가 있다.
숙소로 돌아와 두 시간 정도 쉬고 다시 야경을 보러 나가기로 했다. 쉬는 시간은 왜 그리도 빨리 지나가는지. 비가 계속 오락가락하는데 심하게 쏟아지지는 않는다. 꼭 에어컨을 켤 필요는 없었지만 습기 제거를 위해서 틀어 두었다. 음악 소리가 잘 들리도록 고요하고 깨끗한 숙소다. 맘에 든다.
사치품 거리를 걸으며 사람들을 구경했다. 잘 차려입은 멋쟁이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다. 그 속에서 노동에 찌든 낡은 작업복을 입은 북한 사람이 또 한 명 지나간다. 스마트폰으로 열심히 통화를 하면서. 발걸음이 처지지 않는 것을 보면 식사는 잘 하신 모양이다.
쇼핑센터에 들려서 503py을 주고 치즈 가는 강판을 하나 사서 나왔다. 마트료쉬카 인형도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사고 싶을 만큼 예쁘지는 않았다. 나무로 만든 리코더가 있는지 물어 보았더니 없다고 한다. 어제의 실패를 거울 삼아 오늘은 너무 늦기 전에 술을 사기로 했다. 주류 판매점인 알코마켓이 중앙시장 바로 옆에 있었다. 경비원의 감시의 눈초리가 매우 기분은 나쁘지만 술값은 저렴하고 좋았다. 13,000원 짜리 샴페인을 8천원에 할인 판매하고 250py로 2천원을 할인하는 보드카도 있었다. 맥주 2캔까지 해서 900 py 정도. 잘 됐다. 오늘 저녁에 마셔 보고 괜찮으면 내일 사서 가져 가기로 했다.
저녁을 어디에서 먹을 것인지 고민이 되었다. 술탄 바자르에 갔더니 시끄럽고 요란했었고, 시내 구경을 하면서 몇 곳을 돌아다녀 보았지만 적당하지 않았다. 결국 리퍼블릭 카페에서 블랙 스파게티, 버거, 야채말이, 모히또 등등으로 간단하게 먹을 수밖에 없었다. 입가심으로 에스프레소를 마셨는데, 커피향과 쓴 맛이 개운하게 오래 남아 좋았다. 1,700py. 야채말이는 양이 많아서 술 안주로 먹을 수 있도록 포장을 했다.
보드카와 샴페인 모두 만족스러운 맛이다. 밍밍한 맥주에 비하면 가격도 저렴하고 훌륭한 맛이다. 그래서 결심을 하고 선물용을 포함해서 몇 병을 살 것인가를 한참 의논하다가 갑지기 생각이 났다. 우리는 액체류를 살 수 없다. 38만원에 구입한 비행기표 때문에 1인당 10kg의 기내짐만 허용이 되고, 추가 화물은 별도의 비용을 내야 한다. 정확하게 얼마를 내야 하는지 나오지는 않았는데, 급히 인터넷을 돌려보니 5만원 정도라고 한다. 허참. 배 보다 배꼽이 큰 상황이 되어 버렸다. 포기하기로 했다. 그리미는 좋아한다. 독한 보드카가 내 몸을 상하게 하지 않을까 걱정이었다고 한다. 불과 40도인데 말이다.
부어라 마셔라. 거의 다 마실 뻔 했는데, 내일은 또 내일의 일정이 있으니 그만 마시고 쉬기로 했다. 오늘도 16,000보를 걸었다. 뉴스공장을 들으며 잤다. 국내 정치는 여전히 처리해야 할 범법자들의 재판으로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다. 죄 지은 만큼만 벌을 받으면 될 것이다.
진로 24도 1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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