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7일 월요일 아침, 황교안 총리 대행은 특검법 연장을 거부했다.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의 핵심 수사가 마무리 되었고, 11번의 특검 중 역대 최대 규모로 충분한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검찰 수사를 포함해 115일 동안 충분한 수사를 했고, 여야 합의에 의한 연장 요청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대선이 진행될 수 있는 상황에서 특검이 정치 상황에 휩쓸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모든 근거가 거부를 위한 명분이다. 이유는 특검 연장을 통해 더 많은 비리가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한 조치라고 본다. 청와대 압수 수색을 에둘러 반대한 것과 맥이 닿는 행위로 감춰진 비리들 중에는 본인과 관련된 사안들도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정치권에서는 법무장관과 국무총리로 임명해 준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보은 차원이라는 말도 있는데, 불가능하다. 박대통령이 최순실 이외에는 아무도 믿지 않았는데 황총리에게 은혜를 베풀었을 가능성은 없을 것으로 추정한다. 황총리는 명예와 권력을 쫓는 사람으로 박근혜와 최순실이 부리기에 좋아서 현재의 위치에 오른 것이다. 황총리가 선뜻 자리를 내놓거나 사건의 실체 규명을 위해 적극 나서지 못하는 것은, 알면서도 거부하지 못한 자신의 잘못이 드러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한다. 눈치만 보면 명예와 권력을 쫓아온 그가, 얻을 것도 없는데 엄청난 부담을 안고 이런 결정을 내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명예란 무엇이고, 권력은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필부다.
오늘 탄핵심판의 최종 변론이 이루어지고 있다. 모두들 열심히 해서 역사에 기록될만한 자료가 남겨지기를 바란다.
몇 년 전 동대문플라자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을 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 멋졌기 때문이다. 사진으로 볼 때와는 완전히 다르다. 몇 번을 오가며 보아야 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개인이 이런 작품을 소장한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게다가 그의 박물관은 우리 민족 문화의 우수성을 일반 시민들이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도록 무료로 개방하고 있다고 한다(2014년부터인가 봄 가을 두 차례의 전시회를 동대문플라자에서 유료로 열기로 했기 때문에 간송미술관에서 상설 전시를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이렇게 돈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부자와 지식인이 배워야 할 인물이다.
요즘 사람들이 예의를 모른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가정교육의 결과이니 누구에게도 책임을 돌릴 수가 없는 우리 모두의 일이다. 남다른 사람은 가정교육의 내용도 다르다. 간송 집안에서 분노를 표출하는 것에 대한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있다. 이 책이 꾸며진 내용도 들어간 전기라 했으므로 지어진 이야기일 수도 있으나 내 스스로와 우리 아이들에게도 이 이야기는 꼭 해주고 싶다.
"희로喜怒의 감정을 중후하게 해야 한다. 특히 함부로 화를 내면 욕됨이 따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51쪽)
훈민정음 해례본을 구입하는 과정도 재미있다. 누군가가 무엇을 소중하게 간직한다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그 누군가는 재력도 있고 심성도 차분해야 하며, 그 무엇은 잘 만들어진 것이어야 한다. 우리집에 있는 것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20년 된 물소가죽 소파와 선풍기 정도.
"김태준은 대학 졸업 후 경학원(지금의 성균관대학교)과 경성제국대학 등에서 조선문학을 강의했다. 천재라고 불릴 정도로 총명했고 발표하는 글의 수준이 높아 따르는 제자가 많았다. 김태준은 여러 제자 중에서도 서예가 이용준을 가장 총애했다. (중략) 글씨도 잘 쓰고 한학에도 밝았지만, 무엇보다도 사회주의자인 스승의 뒤를 따르겠다고 주먹을 불끈 쥐었던 것이다. (중략) 가문의 선조가 여진 정벌에 큰 공을 세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상으로 세종대왕께 [훈민정음]을 하사받아 세전가보로 전해내려오고 있습니다.
(중략) 이 훈민정음 매각을 통해 얻게 될 구전으로, 자신이 가담하고 있는 '경성콤그룹'의 활동자금을 충당해야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중략 / 찢겨진 첫 두 장의 복원을 위해) '암기의 천재'라고 불리던 김태준은 경성제대 도서관에서 [세종실록]을 보고 외워다가,조선미술전람회에서 서예로 특선할 정도로 글씨를 잘 쓰는 이용준에게 안평대군체로 적게 했다.
(중략) 김태준이 병보석으로 석방된 것은 2년 후인 1943년 여름이었다. 감옥에 갇힌 사이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중략 / 간송이 말하기를) [훈민정음] 값으로는 만원을 쳤습니다. [훈민정음] 같은 보물은 적어도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해요. (중략 / 김태준이 답하기를) 간송의 후덕한 인품에 감탄할뿐이오. 사례비로 천 원은 너무 큰돈이지만 (중략) 책 값을 과분하게 받았으니 다른 책도 몇 권 더 주면 좋겠다는 (중략) 편지를 다 쓴 김태준이 봉투에 이용준의 주소와 이름을 적은 후 전형필에게 건넸다.
(중략) 전형필은 밤이 새도록 [훈민정음]을 읽고 또 읽었다. 만들어진 지 500년 만에 발굴된 보물 중의 보물이었고, 전형필이 수집을 시작한 지 13년 만에 성취한 대발굴이었기에" (365~377쪽)
책 속에서 좋은 그림을 발견했다. 김명국이라는 분이 그린 '비급을 펼쳐보다'. 살만큼 살아서 특별히 원하는 것이 없을 것같은 노인 두 분이 두루마리 족자를 펼쳐들고 열심히 이야기를 나눈다. 무엇일까. 세상을 평화롭게 할 비책이라도 있는 것일까. 필멸하는 인간이 불멸하는 방법을 알게 된 것일까. 평화로운 세상에서 제 수명까지 건강하게 살다가 방금까지 일하던 논밭을 바라보며 쉬다가 조용히 눈을 감을 수 있다면 좋겠다.
간송은 애정과 안목이 없으면 하기 힘든 일을 해 나갔다. 혈기왕성했을 때 잠깐 빠지는 것도 아니고, 나이가 들어 더 이상 할 일이 없어 취미 활동을 위해서도 아니다. 민족문화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사람과 돈을 대할 줄 알았던 재능으로, 우리 민족의 찬란한 문화 유산들을 지켜내기 위해 평생을 노력했다. 참으로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스승 오세창이나 동료 이순황과 같은 인물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도 다행스런 일이다. 평생동안 사기를 당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이순황은 전형필이 가고자 하는 길의 끝이 어디인지 도무지 가늠되지 않았다. (중략) 이름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화가의 그림도 소중하게 여겼고 (중략) 거간들에게 전형필은 최고의 고객이었다. 북촌이나 서울 근교, 지방의 몰락한 양반집을 찾아다니며 서화 전적을 구해오는 거간들이 한남서림에 들르면, 좋고 나쁨을 가리지 않고 모두 구입했을 뿐 아니라, 먼 길에 수고했으니 목이라도 축이라며 술값까지 얹어주었다." (152쪽)
요즘도 많은 사람들이 예술품을 거래하고 있다. 수년 전 친구가 조각 작품 전시회를 한다고 해서 가려고 했는데, 또다른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전시회를 하니까 작품 하나를 구입해 주자고.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보지 않았는데, 친구에게서 전화를 받고 보니 맞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아무리 여유있다고 해도 돈을 주고 예술품을 구입한다는 생각은 해 보지 않았다. 일 이십 만원으로 막 구입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결국 전시회 구경 가서 축하한다는 말만 하고 구경만 잘 하고 왔다. 앞으로도 아마 그럴 것이다. 남다른 생각이 아니면 아마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좋은 그림이나 조각이 있으면 항상 이런 생각이 든다. '저걸 한 번 그려보아야겠다'
"당시 서화점 주인들은 수장가와 거래할 때 '얼마 주세요' 혹은 '얼마 내세요'가 아니라 '얼마에 올린다'는 표현을 썼다. 그러면 점잖은 수장가는 두말 않고 지불하고, 점잖지 못한 수장가는 흥정을 했다. (중략) '나눠달라'는 말은 '양보해달라'와 같은 뜻으로, '팔라'는 말의 정중한 표현이었다. 당시에는 이런 표현에 따라 수장가의 품격을 판단했다." (111쪽)
간송이라는 아호를 받는 과정을 읽는 것도 좋았다. 남의 이름을 짓고, 그 이름을 즐겨 사용하게 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생각만 떠오른다면 아이들의 아호도 내 손으로 지어주고 싶다. 천체물리학과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좋아해서 우주신이라하고, 뛰어난 머리로 열심히 공부한다는 천재아들과 그림을 즐기고 있다는 그리미 정도로 다들 원하는 별명을 부르고 있지만 더 많은 의미와 상상력이 결합된 호를 지을 수 있으면 좋겠다. 겉 멋만 따라해서는 안되는데 .....
"(오세창과 전형필이 만나 나누는 대화) 서화를 모으는 일은 마음처럼 쉬운 일이 아니네. 재물도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오랜 인내와 지극한 정성이있어야 하지. 그러니 일단은 학업을 마친 후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면 그때 다시 생각해 보게.
(중략) 탁본입니다. 역매 어른의 인장이 있으니, 어르신께서 보관하시는게 옳다고 생각해 가지고 왔습니다. (중략) 고성각자 탁본! 고구려 평양성 축성 때, 건축 과정 일부를 기록한 성석편의 글자를 탁본한 것으로, 고구려가 언제 평양성으로 천도했는지를 알 수 있는 연도가 새겨져 있었다. (중략) 선친께서 중국으로 보냈던 탁본이 다시 돌아와 이렇게 떠돌아다니고 있었다니 (중략) 이렇게 온전한 성돌의 탁본을 보게 되다니
(중략) 나도 자네에게 답례를 해야 늙은이의 체면이 서겠구먼. (중략) 젊은 자네가 흰 두루마기를 입고 들어오는 순간, 깊은 산 속에서 흐르는 물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네. 그래서 산골물 간 澗 자! 그리고 [논어] <자한편>에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라는 말이 나오는데, '날씨가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알 수 있다'는 뜻이네. (중략) 자네에게 이 문장에 있는 손나무 송 松 자를 넣어 '간송 澗松'을 주지. 마음에 드는가?" (72~76쪽)
간송이 이순황과 함께 평생의 벗으로 삼은 일본인 신조도 있다. 이들 세 사람의 팀웍이 깨지지 않고 잘 유지된 것만 보아도 기분 좋은 일이다.
"서화에 비해 값이 엄청난 청자는 일본인 골동품상들이 주도하고 있습니다. (중략) 일급 청자들이 일인 손에 낙찰되어 일본으로 건너갈 때마다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중략) 청자에 대한 고급 정보는 아직도 일본 상인이나 거간들의 손에 있으니, 일본인 거간을 따로 구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중략 / 신보 기조는) 큰 물건을 많이 취급하면서도 거만한 적이 없었습니다. 조선에서 20년 넘게 장사해서 조선말도 곧잘 하고, 경성 구락부 주주이면서 세화인도 겸하고 있으니, 경매를 하실 때에도 도움이 많이 될 겁니다." (174쪽)
추사 김정희와 흥선대원군의 이야기도 알게 되어 즐거웠다. 추사라는 서예가와 대원군이 한 시대를 살아간 사람이었다는 것을 전혀 몰랐었는데, 이 책을 읽으며 하나로 연결되고 나니 작은 깨달음을 얻는 듯 즐거웠다.
"(외종 형인 박종화가) 나는 역사소설이 적성에 맞는 것 같네. 그래서 요즘은 영운(김용진으로 어머니는 흥선대원군의 외손녀이고, 할아버지는 영의정 김병국) 어른 댁을 드나들며, 조선 말기의 대원위(대원군)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그 집에 좋은 그림과 글씨가 (중략) 대원위 대감은 젊은 시절에 난이나 치며 세상일을 잊고자 한다면서 추사 선생의 집을 드나들며 난초 그림을 배우셨다는 이야기 (중략) 전형필은 그림을 보는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세로 1미터가 넘는 화폭에 가냘프면서도 우수가 가득한 표정의 여인 (중략) <미인도>가 계속 눈앞에 어른거렸다. (중략) 영운 어른이야 조상 대대로 내려온 작품들이니 꼭 지키고 싶으시겠지만, 자제분들 생각은 다를지도 모르지. 어느 집이나 그렇지 않겠어. (중략) 저에게 양보하시는 것이 아니라 박물관에 양보해주시는 것입니다." (193~209쪽)
간송이 무턱대고 돈을 뿌려 민족 문화를 지키려 한 것만은 아니다. 사람에 맞게 장사면 장사답게 그렇게 행동했다. 우리 나라의 긴 역사에 자린고비 영감이나 독립운동가 이회영 이시영 가문, 간송 전형필과 같은 부자들이 있었다는 것만으로 즐거운 일이다. 우리 집안에도 돌아가신 정자 홍자 할아버지께서는 마을에서 밥 짓는 연기가 나지 않는 굴뚝이 있으면 쌀자루를 짊어지고 가서 죽이라도 끓일 수 있도록 도와 주셨다 하니 또한 자랑스러운 일이다.
"예상대로 야마나카는 1만원을 내린 4만 원에서 더 이상 양보할 수 없다고 못을 박았고, 신보는 2만원 이상은 힘들다고 했다. (중략) 큰 안복을 누렸으니 이번 여행이 헛되지만은 않았습니다그려. (중략) 서로 만 원씩 양보해서 3만원에 이 화첩을 수장하시면 안되겠는지요? 만약 만원이 부담되신다면, 전 선생이 편한 날짜로 정해 주시는 어음을 받겠습니다. (중략) 외상을 하면서까지 수집하지는 않는다는 원칙이 있습니다. 저도 마지막으로 말씀드리지요. 2만 5천 원을 준비해왔습니다. (중략) 3만 원이면 일본 수장가들 중에서도 살 사람이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길게 생각하지 않고 전형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중략) 제가 양보하겠습니다." (252~4쪽)
보성고등학교에 대한 이야기도 좋았다. 영훈고, 영남대와 상지대를 대표로 하는 사학재단의 온갖 전횡을 보아 왔던터라 간송의 이야기가 좋았다. 사립학교들 특히 사립대학교들에 대한 정비가 시급하다. 교육의 질을 높이고, 대학 등록금 부담도 절반 이하로 줄여서 필요한 과정별로 대학교육과 기술교육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모두가 대학생이어야 하는 시대는 이제 끝났다. 대학에 투자할 돈의 절반으로 기술 개발과 임금 상향 조정에 힘써야 한다.
"(천도교와 조계정이 이어서 운영하던 보성고보는) 1935년 재단법인 고계학원으로 넘어갔다. (중략)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촉탁을 지내면서 일제에 협력하던 자가 재단 관리자로 임명되었다. 그는 10년 이상 재직해온 교사들을 축출하기 위해 '불령선인'이라는 꼬리표를 달아 일본 경찰에 밀고하는 등 갖은 횡포를 부렸다. (중략) 1939년에는 더 이상의 재정 부족을 감당하지 못해 폐교 위기에 놓였다.
(중략) 보성고보는 1906년 대한제국 황실 재정을 총괄하던 내장원경 이용익 대감이 고종 황제의 칙명을 받아 세운 학교일세. (중략) 널리 열어 사람다움을 이루게 한다는 뜻을 가진 '보성'이라고 지어 하사하셨지. (중략) 기미년 만세운동 때 천도교주 손병희 선생이 민족대표로 나섰고, 당시 보성고보 교장이던 최린을 앞세워 독립선언서를 학교에서 인쇄하는 등 독립운동과 관계가 깊은 학교라네. (중략) 교육 사업을 통해 어려운 처지의 민족을 구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라는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중략) 학교를 인수한 전형필으 학교 행정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지만, 교장과 수석 교원을 일본인으로 임명하라는 총독부의 압력을 막아내는 일에는 앞장섰다. (중략) 매해 2만 5천원의 개인 재산을 부담했다." (350~55쪽)
간송과는 달리 문화 유산으로 재벌이 되려고 했던 사람의 이야기도 재미있었다. 누군가는 이 글을 읽으면 광산업에는 손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겠지만 말이다. 금광 개발로 큰 돈을 번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해 한국의 언론계를 장악한 것처럼 가끔 성공한 사람도 있다. 방응모가 무슨 큰 일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밤의 대통령'이 된 것으로 그는 행복했을 것이다.
"이희섭은 신보가 찾아와 불감을 구입하겠다는 전형필의 이사를 전하자, 그 배포에 깜짝 놀랐다. (중략) 신보가 자신의 구전은 받지 않겠다고 하자, 한참을 생각하다 12만원으로 깎아주었다. (중략) 당시 일본은 군수산업 호황으로 경제 상황이 좋았고, 이희섭은 그런 분위기에 편승해 값을 호되게 책정했다. (중략 / 간송은) 통일신라시대의 금동 불상 두 점을 구입 (중략 / 이희섭은) 모은 돈으로 자철석 매장량이 엄청날 것으로 추정되는 함경북도 무산의 철산을 샀다. 그러나 갖고 있던 돈뿐 아니라 은행 융자금까지 다 쏟아부었어도 광맥은 발견되지 않았다. 결국 백만자자 이희섭은 빕쟁이로 전락했고, (중략) 임금을 받지 못한 인부들에게 발견되어 인민군 보위대로 끌려갔다. 그 후 이희섭을 본 사람은 없다. 전쟁이 끝난 후, 그가 전 재산을 바친 무산의 철산에서 무려 13억 톤이 매장되어 있는 자철광이 발견되었다."(345~57쪽)
간송의 최후도 한국 현대사의 비극과 사학비리의 문제가 발단이 되었다.
"전쟁의 피해로 허망하게 된 것은 놔두고 갔던 서화 전적뿐이 아니었다. 1950년 2월 국회에서 농지개혁 법안을 통과시켜, 소작인에게 농지를 분배하고 토지 대금으로 지가증권을 발행해 지불했다. 그러나 전쟁 중에 화폐 가치가 한없이 추락해 지가증권은 모두 휴짓조각이 되었다. 논도 잃고 소득도 잃고, 농지가 아닌 땅이 조금 남았을 뿐이다. (중략) 1959년, 보성중고등학교에서 엄청난 재정 사고가 발생했다. 교장이 서무 관리를 소홀히 해, 재단이 엄청난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중략) 혼신의 힘을 다해 재단 빚을 다 갚은 후, 급성 신우염으로 쓰러졌다.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투병 생활이 이어졌다. (중략) 백발의 스승 위창 오세창이 다가오더니, 큰일을 이루었다며 그를 안았다. 1962년 1월 26일, 나이 57세 때다." (392 ~6쪽)
길지만 한 편의 영화를 보듯 즐겁게 읽었다. 재벌이 될 수는 없으니 미곡상으로 거부가 된 간송 집안의 이야기를 따라 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가 남긴 것들을 고마운 마음으로 즐겁게 감상하며 사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가 아닐까 한다.
고맙습니다.
- 간송 전형필 / 이충렬 지음 / 김영사(2011년 2월 1판 11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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