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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서재

백석 그리고 쩌우언라이 1_170205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 것으로 예상한다. 21세기의 한 농부가 우연히 두 사람에 관한 책을 동시에 읽다가 재미삼아 한꺼번에 정리해 보자는 생각이 들어서 엮인 것뿐이다. 백석은 1912년에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 1995년에 죽었고, 쩌우언라이는 1898년에 지앙쑤셩 江苏省 Jiāngsū Shěng 에서 태어나 1976년에 죽었다. 살만큼 사신 분들이고 유명하신 분들이며, 관심과 애정이 가는 분들이다. 쩌우언라이는 중국 정부에서 발간한 위인전의 느낌이어서 크게 감동을받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백석의 평전과 시모음은 실천문학사에서 우대식이라는 분이 해설하였다.


"은래는 공가의 남녀 사촌들과 사이가 좋아졌다. 곧잘 술래잡기를 하며 놓았는데, 그것은 의화단과 관련된 것이었다. 전사가 양귀자(서양인을 가리키는 비칭)와 괴단(나쁜 사람, 서양인에게 협력하는 중국인을 지칭)을 잡아오면 재판을 하는 놀이였는데 재판관은 항상 은래였다. 마지막으로 은래가 현관의 단 위에 서서 엄숙한 얼굴로 서양인과 중국인 악당에게 그들의 죄상을 열거한 다음 그에 대한 처벌을 선고했다. 그러면 모든 전사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인간 주은래' 이하 '주은래' 24쪽)


"민족정신, 모국어에 대한 애정, 외국어 학습, 많은 독서 등으로 그의 학창 시절이 흘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1929년 오산고보를 졸업한 백석은 정주에 머물게 되는데 당시 오산고보를 졸업했다면 상당한 지식인이라고할 수 있었다. (중략) 1930년 1월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그 모(母)와 아들'이 당선된 것을 보면 아마도 문학에 뜻을 두고 스스로 공부를 했을 가능성이 크다. 


(중략) 백석의 일대기에는 큰 전환점이 되는 일이 일어났다. 당시 금광 운영으로 큰돈을 벌고 뒷날 조선일보를 인수하는 방응모의 후원으로 일본 유학을 떠나게 된 것이다. 방응모 역시 정주군 출신으로 조만식 선생과 친분이 두터웠을 뿐 아니라 백석의 아버지와는 고향 선후배 사이였다. (중략) 백석은 이즈반도를 꼭 한 번 가보고 싶어했다. 동창 가운데 이즈반도 출신들에게 무조건적인 친근감을 표현했을 정도로 이즈반도에 대한 깊은 호감을 지니고 있었다. 졸업을 앞둔 시기에 백석은 이즈반도를 여행하게 된다. 마차를 타고 낯선 젊은 여인과 일행이 되어 금귤이 익어가는 마을과 해안을 달리는 여행은 백석의 뇌리에 깊게 남았다." (백석 22~5쪽)


大江东去 Dà jiāng dōng qù 큰 강은 동쪽으로 흐른다. 중국여행 동안 즐거움을 준 말인데, 마릴린 먼로가 주연한 영화 '돌아오지 않는 강(river of no return)'의 중국어판 제목이었다. 소동파의 적벽회고는 이렇게 시작한다. 


大江东去,浪淘尽,千古风流人物

Dà jiāng dōng qù làng táo jǐn qiāngǔ fēngliú rénwù

큰 강이 동으로 흘러, 물결이 천고의 풍류 인물들을 모두 쓸어가 버렸다.


쩌우언라이는 이 노래를  이렇게 노래한다. 대륙의 끝은 바다가 아니라 그 너머에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당시의 희망은 군국주의 일본이었다. 쩌우언라이는 압록강을 건너 부산항을 거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백석과 쩌우언라이는 일본이라는 땅에서부터 다른 길을 걷는다.  


大江歌罢掉头东 Dàjiāng gē ba diào tóu dōng

큰 강은 동으로 흐른다는 노래는 끝났고 

머리를 동으로 돌려 큰 바다를 건너 항해한다


"1917년 7월, 주은래는 동경에 도착하여 두 명의 중국 유학생과 함께 협소한 일본인 집에서 하숙생활을 했다. (중략) 주은래에게 일본은 실로 아름다운 나라였다. 일년 내내 눈에 덮여 있는 부사산은 마치 하얀 모자를 쓴 소녀 같았다. (중략) 그러나 근면한 일본 인민은 자본주의와 봉건주의라는 이중의 중압 아래서 빈한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중략) 그가 일본에 온 것은 구국의 진리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일본의 현상은 그를 새로운 고민에 빠뜨렸다. 


(중략) 바로 그때 레닌이 지도하는 러시아 10월혁명이 발발했다. (중략) 주은래는 자신의 사상을 검토했다. 그리하여 군국주의로 중국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던 지금까지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중략 / 1918년 5월 6일) 일본 정부가 중국 정부에 제출한 시베리아 출병 요구를 반대하는 중국인 유학생들이 신전의 중국요리집에서 대대적인 반대집회를 열었다. 주은래는 이 대회에서 발표할 항의문을 기초했는데, 일본 정부가 중국을 침략하고 모욕한 것과 중국 국내 군벌들의 매국행위에 대해 항의하는 내용이었다. (중략) 1919년 4월, 중국의 5.4 운동 전야에 일본을 떠나 자신이 성장한, 고난에 가득 찬 사랑하는 조국으로 돌아갔다." (36~40쪽)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군국주의 일본은 승전국의 지위를 인정받아 파리강화회의에서 독일의 조차지인 산뚱반도와 칭다오를 차지하게 된다. 이런 소식이 전해지자 중국 베이징의 대학생들이 들고 일어나 5.4 운동이 일어난다. 당시 파리강화회의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김규식, 베트남의 호찌민, 그리고 중국 대표가 쫓아가서 민족자결주의를 선언한 윌슨에게 희망을 걸고 독립과 국토회복을 청원하지만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다. 영국과 동맹하여 칭다오의 독일군을 공격한 제국주의 일본만이 주목받고 이득을 챙겼다. 아시아의 비극은 바로 파리강화회의가 뿌린 비극의 씨앗이다. 제국주의자들끼리의 싸움에 무슨 인권과 정의가 있었겠는가. 결국 중국의 지식인들은 사회주의에 경도된다.


"1919년 9월 (중략) 천지 학생연합회와 여계(女界) 애국동지회는 긴밀하게 손을 맞잡고 천진 애국운동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중략) 각오사가 정식으로 수립되었다. 


(중략 / 주덕은) 강무당(청말에 각 성에 설립된 장교 양성학교)에 합격한 후 그곳에서 손중산이 지도하는 동맹회에 가입하여 민주혁명의 길을 걸어 왔다. (중략) 혁명의 성과가 원세개에게 찬탈당하자 (중략) 사회주의야말로 중국을 구할 (중략) 중국 공산당 서기 진독수를 만났다. (중략 / 진독수는) 당신 같은 군출신에게는 혁명의 자격이 없다. (중략 / 주덕은 베를린에 있는) 주은래의 집으로 찾아갔다. (중략) 주은래는 주덕이 흔들리지 않는 공산주의 전사라고 확신했다. 그를 입당시킴에 있어 아무런 주저도 없었고, 입당을 위한 소개자도 요구하지 않았다. 


(중략) 제1차 국공합작을 성사시킨 후 혁명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광주에 황포군관학교를 설립했다. (중략 / 1925년 주은래는) 황포군관학교 정치부 주임으로 발탁되었다. (중략 / 황포군관학교의) 교장이 되자 장개석은 심복들을 끌어들여 사당을 만들어 학교를 개인적 세력 부식의 장으로 바꾸고자 했다." (50~86쪽)


5.4 운동의 실패로 한계를 느낀 쩌우언라이는 프랑스로 다시 유학을 떠난다. 그곳에서 쩌우언라이는 리스쩡을 만난다. 리스쩡은 의화단 사건 후 영국과 프랑스, 독일, 일본을 비롯한 연합국에 의해 갈갈이 찢기는 중국을 보면서 유학을 떠난다. 그런데, 공부는 안되고 먹을 것은 없다. 한숨만 내쉰 것이 아니라 중국에서 두부 만드는 기술을 가진 농민 40여명과 프랑스인 70여명을 고용해서 두부공장을 차렸다고 한다. 그런데, 이 공장에서 엄청나게 돈을 벌어 1910년부터 10년간 17차례에 걸쳐 농민 3천여 명을 프랑스로 불러 일하며 공부할 수 있도록(근공검학 勤工俭学 qín gōng jiǎn xué) 지원하였다고 한다. 그 때 프랑스로 와서 공부한 인물들이 바로 쩌우언라이와 덩샤오핑, 리리싼, 차이허썬 등 근현대 중국을 이끈 인물들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숨 쉴 공간이 남아 있던 중국에 비해 식민지배를 받고 있던 조선의 젊은 자유주의자는, 취직해서 삶을 꾸려 나가야 했다. 기자로서 시인으로서 잘 나가는 듯 했다. 


"1934년 청산학원을 마치고 귀국한 백석은 자연스럽게 '조선일보'에 입사하여 교정부 기자로 활동하게 된다. (중략) 1936년 1월에 전설적인 시집 '사슴'이 간행된다. (중략) 이제 백석은 기자이자 시인으로 안정적인 가운데 문학 활동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중략) 돌연 조선일보사를 사직, 평생 친우였던 허준에게 그 자리를 넘겨주고 4월에 함흥 영생고보 영어교사로 부임하기에 이른다. 


(중략) 백석은 바로 시대의 멋쟁이 모던 보이였다. 모발을 모두 뒤로 넘어가도록 빗은 '올백'형에다 유난히 광택이 나는 가죽 구두를 신은 그는 유행의 첨단을 총망라한 매우 세련된 멋쟁이였다. (중략) 영생고보로 부임하자마자 함흥에서 가장 큰 요릿집이었던 함흥관에서 백석은 함흥 권번에 소속되어 있던 기생 김자야를 만나게 되고 (사랑을 나눴다 / 중략) 함흥 시절 그는 옛날 경치를 그대로 간직한 중리라는 곳에 살았다. 중리에는 그의 말에 따르면 밤꽃 냄새가 나는 회색 담들이 늘어선 골목이 있었다. 그는 이 골목을 나귀를 타고 다니고 싶어하였다. 


(중략) 이 낭만적인 태도는 그의 시 곳곳에 드러나지만 현실에 대한 부적응으로 나타나고 오래지 않아 함흥을 떠나는 이유가 된다. (중략) 가난한 나는 나타샤와 산골 마가리(오두막)에 가서 살고 싶다. (중략)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25~33쪽)


'복잡한 가정사와 봉건제의 관습'을 피해 만주로 간 백석은 가난하고 쓸쓸했다. 해방과 함께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북한의 사회주의는 그와 어울릴 수 없는 옷이었다. 1995년 83세를 일기로 숨을 거둘 때까지 그의 재능은 더 이상 발휘되지 못했다고 한다.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세상을 택했던 쩌우언라이는 사회주의 중국을 건설해 냈고, 스스로를 택했던 백석은 오래된 젊은 시인으로 남았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이미 궁금할 나이는 지났지만 혹시 손주들을 키우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이야기다. 들은 풍월이야 많아서 언제든 이야기를 해 줄 수 있을 것같았는데, 막상 하려고 하면 잘 되지 않는 것이 옛날 이야기다. 구수한 입담을 지닌 할머니들이 부럽기도 하다. 백석의 시에서 처음 들어보는 주먹만하게 작은 조막귀신 이야기가 나와서 반갑게 읽는다. 동지 지나서 내리는 눈을 받아 치료용으로 쓴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순박하고 가여워 찔끔 눈물이 날 지경이다. 눈을 받는 엄마와 아이의 바쁜 모습이 예쁘기도 하다.


"날기멍석을 져간다는    닭보는 할미를 차 굴린다는    땅 아래 고래 같은 기와집에는    언제나 니차떡에 청밀에 은금보화가 그득하다는    외발 가진 조마구    뒷산 어느메도 조마구네 나라가 있어서   오줌 누러 깨는 재밤    머리캍의 문살에 대인 유리창으로   조마구 군병의 새까만 대가리 새까마 눈알이 들여다보는 때    나는 이불 속에 자즐어붙어 숨도 쉬지 못한다 


(중략) 섣달에 내빌날이 들어서    내빌날 밤에 눈이 오면    이 밤엔 쌔하얀 할미귀신의 눈귀신도   내빌눈을 받노라 못 난다는 말을 든든히 여기며   엄매와 나는 앙궁 위에 떡돌 위에 곱새담 위에 함지에 버치며   대낭푼을 놓고 치성이나 드리듯이 정한 마음으로    내빌눈 약눈을 받는다   이 눈세기물을 내빌물이라고   제주병에 진상항아리에 채워두고는     해를 묵여가며 고뿔이 와도 배앓이를 해도 갑피기를 앓어도 먹을 물이다" (72~3쪽 '고야 古夜' 중에서 / 길게 띄워쓴 것은 백석이 아니라 무일)



신해혁명후 군벌들의 난립과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으로 분열되던 중국은, 소련의 원조와 쑨원의 지지로 이루어진 제1차 국공합작(1924년)을 통해 발전의 전기를 마련하지만, 쑨원의 죽음과 함께 국공합작이 파기되고 내전상태에 빠진다. 1930년부터 장제스는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중국공산당을 토벌하지만 공산당의 홍군은 마오쩌둥의 유격전으로 맞서 힘의 균형을 이룬다. 장제스는70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총공격을 감행하는데, 이 때 공산당은 마오쩌둥을 끌어내리고 유격전 대신에 정규전으로 국민당군에 대항하다가 궤멸 직전에 이르게 된다. 위기에 처한 홍군은 1934년 10월부터 약 10만명의 병력이 장정 Long March 長征 cháng zhēng 을 시작한다. 장정 과정에서 당 지도권을 다시 장악하게 된 마오쩌둥은, 18개의 산맥을 넘고 24개의 강을 건너며 지도부를 단련하고 홍군의 핵심을 양성한다. 그러나 9만명의 홍군을 잃은 처절한 패배의 여정이었다. 그러나 극한의 어려움 속에서 단련된 공산당은 불과 8천 명만이 살아남았어도 굳건했다. 홍군은 1936년 12월 서북지방의 산시성[陝西省]  옌안[延安]에 도착하여 전열을 정비한다. 난징 대학살 등 일본 침략이 극악해지면서 내전에 앞서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야 한다는 여론이 우세해진다. 결국 국공 양당의 화합으로 제국주의를 물리쳐야 한다고 생각한 장쉐량은 시안사변을 일으켜 제2차 국공합작을 성사시킨다. 미국의 지원을 받은 중일전쟁과정에서 중국공산당은 마침내 중국을 장악하게 된다. 


쩌우언라이는 창쩡의 끔찍한 시기에 마치 예수님처럼 행동했다고 전기에는 쓰여 있다. 죽은 사람을 살리는 기적을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아픈 환자에게 자신의 말을 양보하고, 문맹인 병사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등 성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중국은 분명히 자본주의 국가처럼 보이는데, 만들어 낸 영웅을 좋아하는 사회주의 국가의 허접한 모습을 이런 글에서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1993년에 나온 책이니까 그동안 많은 변화를 겪었겠지만, 중국 특파원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공산당원 교육은 아직도 이런 식의 우상화 교육으로 당성을 심어주고 있는 모양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오병이어의 기적과도 같은 신화를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온다.


"병사들은 이미 보릿가루가 떨어진 지 오래라 행군 도중에 들풀을 뜯어 먹었다. 본부에서는 군마를 잡아 고기를 먹으라고 명령했다. 사람은 많고 말은 적어 말고기도 금방 동이 났다. 마침내 홍군에는 혁대를 구워 먹거나 종이조각을 씹어 공복을 채우는 사람도 생겨났다. (중략) 주은래는 자신이 소중하게 남겨 두었던 얼마 안 되는 보릿가루를 모조리 끓는 물에 풀어 모두에게 나눠 마시라고 명령했다. (중략 / 아무 것도 먹지 못하며 걸었던) 주은래의 커다란 두 눈동자가 형형한 빛을 발했다. 그러나 그의 수척한 얼굴 근육은 부들부들 떨렸다." (12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