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와 매장에 대한 생각은 사람마다 달라서 의견 일치를 보기가 매우 어렵다. 그렇다면 각자 방식대로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도 어렵다. 각자의 의견을 모두 존중하면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가는 것은 어떨까.
먼저 매장은, 화장하고 분골해서 그 가루를 자연으로 돌려 보내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아무 곳에나 뿌릴 수 없다면 자기 집 마당에 평소 고인이 좋아하시던 나무나 꽃과 함께 묻어 드리면 좋겠다. 마당이 없으면 조그만 화분 여러 개에라도 나눠서 가족들이 나눠 모실 수 있다면 좋겠다. 제사는 최대한 자유롭게 지낸다. 가족이 모일 수 있는 한 최대한 많이 모여서 음식점, 종교기관, 집, 무덤, 해외 관광지 등등 장소에 구애되지 않고 조상들을 추억하고 그리워할 수 있는 시간이 되면 좋겠다.
백석은 제사 지내는 목구(목기)가 되어 제사를 표현한다. 핵심은 슬픔이다. 고인이 안계시니까 슬프고, 슬프다고 곡을 하니까 슬프고, 없는 살림에 제사상 마련하려니 슬프고, 힘들게 일해도 당연한 듯 무시당하는 제사 준비하는 여자들이 슬프고, 가진 것 없어서 제사에 참례 못해서 슬프고, 제사 지낼 일 생각하니 슬프고 등등. 그런 마음 때문에 목구와 슬픔을 연결한 것은 아닐까.
"먼 조상들의 최방등 제사에는 컴컴한 고방 구석을 나와서 (중략) 구신과 사람과 넋과 목숨과 있는 것과 없는 것과 한줌 흙과 한점 살과 먼 옛조상과 먼 훗자손의 거륵한 아득한 슬픔을 담는 것 (중략) 비 같은 밤 같은 달 같은 슬픔을 담는 것" (79~80쪽, 시 '목구(木具)' 중에서)
이런 시구절도 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으나 잃어버린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되살릴 필요를 절실히 느낀 부분이다. 백석은 그렇게 그의 고향 언어로 평화를 노래했다. 물구지는 무릇의 사투리인듯. 물구지는 구황식물로 어린 싹을 먹었다고 하니, 물구지우림은 물구지를 끓여 낸 물이 아닐까 싶다. 꽃이 참 예쁘다. 동굴네는 둥굴레의 사투리일듯. '아르대즘퍼리'나 '쇠조지'(쇠비름일까?)는 모르겠다.
"토끼도 살이 오른다는 때 아르대즘퍼리에서 제비꼬리 마타리 쇠조지 가지취 고비 고사리 두릅순 회순 산나물을 하는 가즈랑집 할머니를 따르며
나는 벌써 달디단 물구지우림 동굴네우림을 생각하고
아직 멀은 도토리묵 도토리범벅까지도 그리워한다." (86쪽, 시 '가즈랑집' 중에서)
현대 중국사의 핵심 사건인 시안 사변. 이야기꾼 김명호는 '중국인 이야기'에서 이렇게 정리했다.
"장쉐량은 1925년 6월 상하이 미국영사관 만찬에서 (중략) 쑨원의 처제 쑹메이링을 처음 만났다. (중략) 1927년 12월 쑹은 장제스와 결혼했다. (중략) 1928년 6월 장쉐량은 아버지인 동북왕 장쭤린이 일본군에 의해 폭사하자 친일세력들을 제거하고 동북의 군정 대권을 장악했다. 난징 국민정부의 장제스는 북벌군을 이끌고 베이징에 진입했지만 장쉐량과의 제휴가 필요했다. (중략) 장쉐량이 베이징에 왔을 때 그를 암살하거나 난징으로 유인해 감금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쑹메이링은 "장쉐량은 소인이 아니다. 국가 이익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장군과 친구가 돼야지 왜 제거할 궁리만 하는가"라며 장제스를 설득했다. (중략) 장쉐량은 두 달 후 동북 전역에 청천백일기를 게양했다. (중략) 중국의 황금 10년이 시작됐다. 장제스는 이때부터 공산당 섬멸을 지휘해 장시성의 중앙소비에트 홍군 주력에 치명타를 안겼다. 장정에 나선 홍군은 옌안에 안착했다(그곳에서 마지막 숨을 허덕이고 있었다). 장제스의 명령으로 동북을 일본에 내준 장쉐량은 시안에 주둔하고 있었다. 장제스는 장쉐량에게 옌안을 공격하게 했다. (중략) 시안에 온 장제스를 장쉐량은 1936년 12월 12일 밤 감금했다.
(중략, 쑹메이링은) 장제스를 대신해 장쉐량과 옌안에서 급파된 저우언라이와 협상했다. 내전 중지, 항일전쟁 준비, 옌안을 지방정부로 인정, 장쉐량 신변보장과 장제스를 최고지도자로 추대할 것 등에 합의했다. 쑹이 온 지 3일 만에 모든 게 평화적으로 끝났다. (중략) 시안사변이 난해하고 희극성이 강한 이유는 순전히 장쉐량과 쑹메이링 두 사람 때문이었다. 그러나 장제스는 난징까지 배웅한 장쉐량을 감금했고 1975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풀어주지 않았다. 타이완에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호랑이를 풀어놓아선 안 된다"는 당부를 아들 장징궈에게 세번이나 했(다. 중략) 장쉐량은 "두터운 정은 골육과도 같았지만 정견의 차이는 철천지원수와도 같았다"는 대련으로 반세기에 걸친 은원을 정리했다." (중국인 이야기 2권 / 김명호 / 한길사 319~323쪽)
중국에서 공식 편찬한 듯한 쩌우언라이 위인전에는 시작은 장쉐량이 했지만 마무리는 쩌우언라이가 한 것으로 정리되어 있다. 어떤 역사가 맞는 것일까. 이야기꾼일까 당의 선전일꾼일까. 이야기꾼에게 한 표. 왜. 지금은 이야기의 시대다. 어쨌든 공산당 선전꾼의 이야기도 한 번 읽어 보자.
"장개석을 죽여 버리면 내전을 정시시킬 수도 없을 뿐더러, 항일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하여 공동으로 일본 침략자를 물리칠 방법도 사라져 버리네.
(중략 / 1931년) 일본 제국주의가 동북의 대도시 심양을 공격하자 장개석은 장학량에게 '절대로 저항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 결과 10여 만의 대군이 총 한 번 쏘아 보지 못하고 심양에서 철수했다. 그래서 동북 3성(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은 모조리 일본 제국주의에게 점령당했다. (중략) 그들은 장개석의 투항, 매국, 내전정책에 강한 불만을 나타내며 항일투쟁에 나설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었다.
(중략) 1936년 4월, 주은래는 연안(당시까지는 국민당군이 점령하고 있었다)에서 장학량과 회담을 한 적이 있다. 장학량은 주은래에게 탄복하여 절대로 내전을 일으키지 않겠다고 언명했다. (중략 / 장학량과 양호성은) 수차에 걸쳐 '내전을 정지하고 일치하여 외적을 막자'고 장개석을 설득했으나 그는 들은척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장학량과 양호성은 서안 인민의 지지 아래, 1936년 12월 12일 쿠데타를 거행하여 장개석을 체포했다.
(중략 / 시안을 찾은 주은래는) 국내외 정세를 분석하면서 국민당으로 말하자면 이미 일부의 애국적 세력이 분화하고 있다, 영국과 미국 등은 중국을 독점하려고 기도하는 일본과 갈등을 일으키고 있으며, 바로 그런 이유에서 영국과 미국의 이익을 대표하는 장개석에게는 항일의 가능성이 있고 따라서 서안사변을 평화적으로 해결하여 장개석으로 하여금 항일에 나서게 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중략 / 시안사변이 해결되자 많은 사람들은)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나 한간(漢奸 : 민족의 배반자)이 싫어하는 일을 하자. 일본 제국주의나 한간이 좋아할 일은 하지 말자! (중략) 장개석은 석방되었다. (중략) 장학량 장군은 남경에 도착한 즉시 장개석에게 체포당했다. 양호성 장군도 후에 장개석에게 살해당했다." (135~143쪽)
압제와 전쟁과 반목의 시기에 평화로운 작가들은 맘편히 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백석은 친구인 허준을 빌어 자신을 이야기한다. 그들의 소심한 평화로움과 따뜻한 마음, 어찌할 수 없는 좌절이 느껴지는 듯하다. 그래도 사회에 대한 책임보다는 가족을 먼저 챙겼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아생연후살타(내가 살아야 일을 도모할 수 있다)'다. 목이 긴 시인은 백석을, 당신은 친구인 허준이고, 게사니는 거위다.
"다만 한 사람 목이 긴 시인은 안다 (중략)
아무것도 모르는 듯이 어드근한 방안에 굴어 게으르는 것을 좋아하는 그 풍속을
사랑하는 어린것에게 엿 한가락을 아끼고 위하는 아내에겐 해진 옷을 입히면서도
마음이 가난한 낯설은 사람에게 수백 냥 돈을 거저 주는 그 인정을 그리고 또 그 말을
사람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넋 하나를 얻는다는 크나큰 그 말을 (중략)
이 목이 긴 시인이 또 게사니처럼 떠든다고
당신은 쓸쓸히 웃으며 바독판을 당기는구려" (94~5쪽, 시 '허준' 중에서)
평화와 우정, 고향과 좌절 속에서 젊은 시인이 힘들게 살아가고 있을 때, 쩌우언라이는 역사의 한 복판에서 새 판을 짜고 있다. 중국 대륙의 통일을 위한 최후의 전쟁이다. 장쉐량이 위기에서 쩌우언라이를 구했고, 쩌우언라이는 전쟁 속에서 중국을 구한다. 그 과정이 이렇게 찬란하기만 했겠는가. 중국 대륙 곳곳에 내전으로 희생된 수많은 병사들을 위로하는 위령탑이 세워져 있다. 대만으로 쫓겨 간 장제스의 국민당에도 수많은 역사의 희생자들이 있었다. 비록 역사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그들이지만, 중요한 것은 바로 그들이었다.
"1946년, 주은래는 남경의 매원신촌 30호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 해 11월 15일, 국민당은 정치협상회의의 결의를 파기하고 일방적으로 '국민대회'를 소집한다고 선언했다. (중략) 주은래는 커다란 지도 앞에 서서 오른손으로 지도를 짚어 가면서 국내외 기자들에게 장개석의 반혁명적인 내전 발동 및 해방구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이라는 두 가지 죄상을 폭로했다. (중략) 우리는 인민에게 봉사하고 있습니다. 인민에게 의지한다면 반드시 중국의 양양한 미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략) 만약 당신이 우리를 위해 걱정을 하고 계신다면 우리는 당신에게 이렇게 답변해도 좋을 것입니다. '괜찮습니다' (중략) 인민해방군은 전투에 승리하여 남경을 점령했다. 그것은 1949년 4월 22일의 일이었다." (176~8쪽)
백석에게서 식민지 지식인의 의무 이행의 흔적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다. 식민지 시절 조차 즐기며 산 젊은 자유주의자는 가치가 없는 것일까. 아니다. 존엄하지 않은 인간은 없다. 죄는 미워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자고 했는데, 죄조차 짓지 못한 낭만주의자에게 어떻게 손가락질을 할 수 있겠는가.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다는 이 시는,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드러내는 자유주의자의 따뜻한 시선이 있다. 슬프고 아름답다.
여승(女僧)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늬 산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여인(女人)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女人)은 나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十 年)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山)꿩도 설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山)절의 마당귀에 여인(女人)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172쪽 / 시 '여승(女僧)' 중에서)
5년 전에 중국 김치를 수입하는 문제로 중국 공산당원들과 식사를 할 기회가 있었다. 그 때 원자바오 총리의10년된 겨울 외투 이야기를 했었는데, 그것의 원본이 바로 쩌우언라이였던 모양이다. 다시 그 기사를 찾아 보았더니, 원자바오의 겨울외투에 감동하면서, 그가 중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쩌우언라이 총리의 뒤를 이어 청렴하게 중국 정치를 이끌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중국인들의 소망을 전하고 있었다. 마치 성서를 읽는 듯한 이야기의 연속이라 흥미는 없지만 어쨋든 사실이라면 정치가들의 귀감이 되어야 할 일이다. 부자들이 정치가가 되거나 정치가가 되어서 부자가 된다면 올바른 정치가 구현된 것이 아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총리도 몇 벌인가 새옷을 맞추었습니다. 그것은 정확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총리의 옷을 기워 드린 것이 몇 번이나 되는지는 도저히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중략 / 주은래의) 파자마는 하얀 천에 푸른 격자무늬의 플란넬을 덧댄 것이었는데, 오랜 세월 동안 빨고 기운 탓으로 너무 닳아서 보풀도 일어나지 않고 푸른 격자무늬도 사라져 버린 하얀 천으로 변해 버렸다." (258~9쪽)
이제 마무리. 자유주의자 백석과 사회주의자 쩌우언라이는 고향 사람들을 사랑했다. 그들의 가난과 슬픔을 어루만져주었다. 백석은 아름다운 시로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고, 쩌우언라이는 따뜻한 마음과 정치가로서의 권한으로 고향 사람들의 삶을 개선해 주었다. 그들과 함께 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느꼈을 것이다. 20세기의 두 젊은이가 여든에 가까운 일생 동안 아름다운 삶을 살아내었다는 데 대해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도 계속 두 개의 이야기를 같이 소화해 나가야겠다. 재미있네. 그리고 자유가 없는 체제는 결코 발전할 수 없다. 북한이 자유주의를 억압함으로써 현재에 이르렀고, 중국도 자유가 없는 사회주의로는 발전을 이어갈 수 없을 것이다. 쩌우언라이로 대표되는 중국 정치가들이 시민들의 자유를 존중함으로써 오늘날의 발전이 가능했다.
"(1976년 1월) 주총리가 혼수상태에서 깨어났다. 그는 천천히 눈을 뜨더니 주위의 사람들을 한 사람씩 둘러본 다음 미약한 목소리로 힘겹게 말을 꺼냈다. "이제 내게는 더 볼 일이 없을 텐데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소. 다른 사람들이나 돌보도록 하시오. 그 사람들이야말로 여러분들이 필요하오." (중략) 그로부터 10시간 후 우리가 가장 경애하던 사람, 주은래 총리는 형형한 빛을 발하던 눈을 영원히 감았으며 그의 심장은 고동을 멈추었다." (265~6쪽)
"미망인 이윤희 씨가 1999년 2월 조선족을 통해 1995년 백석이 사망했음을 알리는 (중략 / 1959년에 평양에서 추방되어) 가족들이 차별과 멸시 속에서 살았음을 한스러워하고 있다." (244쪽)
- 책1 : 선생님과 함께 읽는 백석 / 우대식 해설 / 실천문학사(2009년)
- 책2 : 인간 주은래 / 소숙양 지음 / 이우희 옮김 / 녹두(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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