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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서재

될 지는 모르겠으나, 천천히_THE left_170303

하인리히 하이네의 '아타트롤'을 읽으며, 다음 백과사전을 뒤적이다가 1830년 7월 혁명과 루이 필립의 실패를 보았다. 1789년 대혁명 이후로 수많은 생명들이 야만의 희생물이 되는 안타까운 역사도. 사회주의자들의 이상 사회를 향한 혁명은 계속해서 실패했고, 페레스트로이카로 기대했던 현실 사회주의의 이상은, 오히려 완전한 실패의 길로 접어 들었다. 러시아와 소련 연방에 사회주의는 사라지고, 자본주의가 해결사로 들어섰다.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근본은 인간의 야만성이 결코 극복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배가 고프면 눈이 뒤집어져 버리고 마는 너무나 인간적인 인간의 모습.


지난 달말 출판사를 하는 선배를 만났다. 여전히 자부심에 차서 책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가 펴낸 책, 'THE left'. 언제나 패배자일 수밖에 없으나, 당위 정의 인류애에 있어서만큼은 정수에 있는 THE 그들. 900쪽이 넘어서 제대로 시도할 시간이 없었는데, 천천히 한 번 가보자. 어차피 역사다.


인간을 중심으로 역사를 바라보면, 역사는 끊임없이 야만의 껍질을 벗어가는 과정이다. 역사가 변화할 때마다 폭력이 동반된 이유는, 인간의 야만성이 그대로 드러난 결과다. 지금 이 순간, 어쩌면 야만성이 많이 벗겨져 있는 이 순간에도 폭력에 의한 변화만이 역사 발전의 동력일까. 역사를 돌아보면 아니라고 부정하기 어렵지만, 천천히 가더라도 야만에 이끌려진 폭력은 없어졌으면 좋겠다. '역사의 천사'가 미풍에 밀려 날아다니다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려 낙원에 도착하는 해피 엔딩을 기대해 본다. 틀림없이 아주 먼 훗날에. 


"역사가는 역사학의 천형이라 할 수 있는 지속과 변화라는 문제를 결코 피할 수 없다. (중략) 주어진 관계들이 움직이지 않고 고정된 것처럼 보인다. (중략 / 그러다가) 느릿느릿 전개되는 습관적인 미래에 대한 기대가 풀린다. (사라진다 / 중략) 발터 벤야민이 포착한 역사의 천사 angel of history 이미지는 기억할 만하다. 이 천사는 '낙원에서부터 불어오는 폭풍'이라는 멈출 수 없는 힘에 의해 보이지 않는 미래로 떠밀린다." (9~11쪽)


이 책의 지은이 제프 일리 Geoff Eley는 1949년에 '복지국가의 자식'으로 태어나, 1968년의 서유럽 혁명이 낳은 '이례적인 성과에 의해 자라났고', 많은 것을 기억하고 알고 있으며, '커다란 열정과 그만큼 커다란 후회'로 이 책을 썼다고 한다. 부럽다 이 사람의 삶이. 지중해에 던져진 시리아의 아이가 푸르른 슬픔으로 나타나는 시대에, 오직 노란 리본으로만 기억되는 세월호의 아이들이 차가운 바다 속에 잠드는 시대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 때문에.


아마도 이 책의 결론은 이것일 수도 있다. 동의하고 공감한다. 그래서 생각컨대, 좌파들은 이제 없다. 자본주의 체제 속의 민주주의자와 평화주의자만이 있을 뿐이다. 자연주의자와 녹색당 조차도 과하게 느껴지는 그런 민주주의자가 되는 것이 좌파가 발전하는 길이 아닐까. 좌파의 폐기가, 완결되지 않은 좌파의 역사를 완성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혁명은 좋은 평을 받지 못한다. 스탈린주의의 참화와 소련의 수치스러운 붕괴로 인해 러시아혁명의 해방 효과는 거의 전부 지워져버렸다.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스탈린주의가 저지른 만행이 공산주의의 윤리적 신뢰성에 치유할 수 없는 손상을 (중략 / 그러나) 모름지기 좌파의 역사는, 인간의 잠재력을 제한하고 왜곡하며, 공격하고 억압하고, 때로는 심지어 완전히 없애버리려고 하는 불평등의 체제에 맞서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싸움이었다. 그리고 이 역사는 분명 아직 완결되지 않았다." (11~14쪽)


명색이 정치학을 전공했는데도 민주주의 발전의 역사에 대한 어떤 논리도 가지고 있지 못해서 부끄럽다.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과 미국 독립운동으로 시민들의 자유와 권리가 신장되기 시작했고, 때마침 발전한 자본주의 경제력에 힘입어 수립된 복지국가들이 민주주의의 힘을 강화시켰다는 정도로 민주주의 역사를 이해했다. 자본주의가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어린이와 여성 노동의 제한과 8시간 노동제의 정착을 위한 노동조합의 싸움도 크게 기여했지만, 이것 또한 자본주의 발전 과정의 하나로 인식했었다. 사회주의는 그저 더 나은 이상을 추구하는 것이고, 현실에서 패배했기 때문에 민주주의 발전에 무엇을 기여했는지 알 수 없었다. 민주주의는 영국을 비롯한 유럽 대륙과 미국에 의해서 발전된 것이라고만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제프 일리는 이렇게 말한다.


"유럽의 민주주의는 허약하고 (중략) 최근에야 발달한 것이다. (중략) 민주주의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것들을 필요로 한다. 자유 보통 비밀 성인 동등 투표권, 표현 양심 집회 결사 언론 등의  고전적인 시민자유, 재판 없이 구금되지 않은 자유 등등. 이런 기준에 따르자면 민주주의는 19세기 동안 세계 어느 곳에서도 달성되지 않았고 1914년 이전에는 단 네 나라에서만 이루어졌다 - 뉴질랜드(1893년), 오스트레일리아(1903년), 핀란드(1906년), 노르웨이(1913년)가 그들이다. 


(중략) 민주주의는 (중략) 대중이 그것을 요구하기 위해 집단적으로 조직했기 때문이다. (중략) 이 책에서 다루는 대부분의 시기 동안 민주주의라는 깃발을 계속 치켜든 것은 사실 사회주의의 전통이었다." (29~33쪽)


민주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