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이 강렬하게 내리쬐니 벼는 잘 마르겠다. 겨울 중국여행을 준비하기 위해 잠을 좀 설쳤더니 눈꺼풀이 무겁다. 오전 내내 한 일이라고는 벼 젓는 끌개로 마당 구석구석을 돌면서 벼를 저어주는 일이 전부다. 좀 두꺼운 곳은 힘을 주어 벼를 끌어내어 얇은 곳으로 옮겨주고, 잘 마른 벼들 속에서 덜 마른 벼들이 위로 올라오도록 끌개질을 한다. 마당 가득한 벼들 위로 줄무늬가 길게 이어진다. 햇볕을 받아서 가볍게 음영이 생기고 누런 색으로 맛깔난 모습이 드러나면 마음이 평화롭다. 목요일 오전까지 말리고 오후에 보관용 포대에 담아놓을 수만 있다면 정말 좋겠는데.
포천에서 이모부 내외가 오셨다. 일년이면 대여섯 차례 서로 왕복을 하니 가까운 친구나 다름없다. 두 시간 가까이 걸려서 내려오시면 집주변 간단하게 산책하고, 부지런히 점심 준비해서 술과 함께 한 끼 식사를 나눈다. 한 달 전부터 연로하신 부모님을 모시느라 일이 많이 늘어나셨을 것이다. 가족이야기, 농사이야기, 땅이야기, 최순실 이야기로 끊임없이 다툼없이 이야기를 이어 나간다. 대화의 주제와 내용은 언제나 비슷하다. 우리나라 땅은 바닷가 근처가 최고라는 이모부 주장, 옛날에는 정말 농사짓기 힘들었지만 지혜롭고 재미있었다는 아버님 주장, 아름다운 정원을 만드는데 드는 노력은 그리 힘들지 않다는 이모 주장, 맛있게 먹으니 고맙다는 어머니 주장, 최순실이 정말 강하기는 하지만 박근혜의 무능과 무식과 할머니 고집이 생각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무일의 주장까지. 벗과 같은 가족과 4시간을 먹고 마시고 놀았다.
맛이 덜 들기는 했지만 김장용 배추를 서른 포기 가까이 뽑아 드리고, 대파와 쪽파까지 깨끗하게 담아서 차에 실어 보내니 작별이 아쉽다. 정미한 쌀을 마음이에 싣고 포천으로 놀러가는 것으로 올해의 만남 일정이 끝날 것이다.
아버지는 새벽비에 대비해 비닐을 준비하시고, 어머니와 나는 들깨밭으로 가서 앉았다. 토닥토닥 다 큰 아들놈 등 두들겨 주듯이 들깨단을 내려치고 있자니 천지에 가득했던 햇살이 종이장 만큼이나 엷어진다. 큰 그룻 하나만큼 추스려서 집으로 돌아오는데, 빈들에 남아서 찬 비를 맞아야 하는 들깨단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드러누웠다. 아직도 하루 일거리가 남아있다.
아버지를 도와서 완벽에 가깝게 벼들에게 우의를 씌웠다. 비는 오지 않을 것같은데 너무 과잉이 아닐까 싶다. 이모부 구워드리려고 사온 오리고기는 깜박 잊고 내놓지 않는 바람에 우리들의 저녁 안주가 되었다. 소주 석 잔에 맥주 한 잔으로 부른 배를 두드리며 향후 정국이 어떻게 전개될지를 전망해 본다. 할머니와 십상시들의 확신에 찬 오판으로 정국은 더욱 낭떠러지로 가고 있다. 친위 쿠데타가 걱정될 정도로 민심과 정국이 좋지 않다. 대구에서의 할머니 지지율이 8.8%, 60대 이상 지지율이 21%라고 하니 지지기반도 완전히 붕괴되었다. 좋지 않은 일이다. 대구와 영남, 강원의 시민들과 보수층에서 선택한 대통령의 수준이 이것밖에 되지 않는다면 할머니를 선택한 많은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임기는 의전용으로라도 마치게 하고 싶었는데, 쉽지 않을 모양이다. 스스로 타락의 구덩이로 들어가고 있다.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곡에 등장한 말이 다시 떠오른다.
"누가 악행을 사랑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늘 그렇게 하느니라. 그자가 파멸의 나락에 떨어져 신들을 두려워할 줄 알도록!" (아리스토파네스 희곡 '구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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