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는이야기/농사 이야기

마음 수양을 하다_161019, 수

쉬운 일이 아닐 것임을 알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논으로 갔다. 여기저기 처참하게 짓밟혀진 논을 보니 시민들의 가슴에 패악질을 하는 사악한 정치가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러나 공공선의 기준으로 정치판의 옥석을 구분해서 잘 갈고 닦으면, 평화로운 한반도의 번영을 위해 잘 쓰여질 것이다. 정치판과 자연은 다르다. 너구리들은 자연의 모든 공간을 이용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들은 천적이 없는 곳이라면 어디든 자신들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숲속에 잘 마른 따뜻한 은신처도 많을텐데, 아직도 습기가 많아 질척거리는 우리논에 거처를 마련한 이유는 뭘까. 습기는 따뜻한 볏짚으로 얼마든지 막을 수 있고, 주변을 둘러싼 따뜻한 벼들이 기분 좋은 소리를 막아주니 그렇게 아늑할 수가 없다. 게다가 너구리를 위협할 만한 천적이 주변에 하나도 없다. 인간이라는 괴상한 동물들은 낮에만 잠시 이곳의 주인인양 설치고 다니다가 밤이 되면 등불 아래 모여 뭔가를 하고 있다. 이제 이곳은 너구리들의 세상이다.


볏짚을 차곡차곡 포개어 습기가 올라올 수 없도록 철저히 방비를 해 두었다. 그 포개진 벼포기들을 슬슬 끌어올리며 작업을 하려니 보통 힘이 드는게 아니다. 6조식 콤바인으로 1분도 안 걸릴 면적을 낫으로 벼포기들을 일으켜 세워가면 작업을 해야 하니 여섯 시간을 꼬박 제자리에서 맴을 도는 기분이다. 너구리들의 보금자리는 그들의 생존본능대로 논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어서 낫으로 베어 둔 벼포기들을 논둑으로 옮길 방법도 없다. 점심 먹으러 오기 전에 진흙 구덩이에 묻혀있던 벼포기들을 꺼내어 왔다. 집에 와서 물로 깨끗이 씻으니 비로소 벼포기의 모습이 드러난다. 이렇게 잘 익은 벼포기들이 너구리들의 잔인한 공격에 희생되고 있다.


너구리들은 이래저래 우리 농사와 악연이다. 오리들이 논을 잘 메기 위해서는 야행성인 그들의 특성을 고려해서 밤에 논에 풀어 놓아야 한다. 그런데, 첫 해는 오리들이 이곳에 있는지를 몰라서 큰 피해가 없었는데, 첫 해의 마지막 며칠과 둘째 해부터는 너구리들이 오리잔치를 벌인다. 먹지도 않을 오리들을 일일이 쫓아다니며 다 잡아 죽여버린다.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는 것인지. 결국 오리농법을 포기해야 하는 가장 큰 원인을 제공한 것이 바로 너구리다.


중간중간 쇠도 쳐 가면서 자연의 일부인 너구리들을 미워하지 말자고 마음을 다잡는다. 그래 그냥 생존본능일 뿐이다. 내년부터는 결실기에 좀 더 주의를 기울여 우리 영역으로 그들이 오지 않도록 대비해야겠다. 쓰러진 벼도 세우고, 자르고, 옮기고. 다 해내지를 못했다. 해가 저물어 집으로 돌아왔다. 내일 오전에는 작업을 하지 않겠다. 이곳에서 힘을 쓰느니 산소밭의 들깨나 베어놓는 것이 답이다 싶다. 논은 안개가 자욱한 오전에는 물기가 많아서 작업하기가 너무 힘이든다. 그래, 고작 이틀 정도 더 일하는 것이다. 큰 문제는 없다.


향악당에 가서 땀나게 공연 연습을 하고 왔더니 머리 속이 개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