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부터 쏟아져 내리는 안개가 대지를 하얗게 뒤덮는다. 기온이 높아서 얼지는 않으니 시야를 가로막지는 않지만 밖에 세워둔 자전거의 안장 위로 물이 흥건하게 고였다. 헤르메스를 타고 음성에 슬슬 다녀왔는데, 곳곳에서 빈 들이 늘어나고 있다. 들깨를 베어내고, 벼를 거두고.
어제 저녁 향악당 식구들에게 물었더니 우리 논을 망치고 있는 것은 너구리란다. 따뜻한 보금자리를 만들어 이리저리 옮겨다니면서 논 한 배미를 금방 망쳐 놓는다. 너구리답게 왠만한 협박에는 도망가지 않는다. 한 번 자리를 잡으면 콤바인으로 벼를 다 베어내도 끝까지 도망가지 않다가 마지막 벼포기까지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뒤룩뒤룩 살이 오른 모습을 한 채 숲속으로 천천히 달아난다. 어제 저녁 논을 두 바퀴나 돌면서 꽹가리를 두들겨댔는데,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너구리, 여우같은 녀석.
너구리 녀석이 망쳐놓은 논은 콤바인으로 수확할 수 없다고 한다. 이리저리 벼포기를 엮어놓아서 서로 엉켜있기 때문에 콤바인이 지나가면 흙덩이째 벼포기가 뽑혀 나락에 온통 흙이 섞여버린다. 낫으로 일일이 베어 별도로 탈곡하는 방법말고는 없다. 지난 여름 편안하게 일하게 되어 좋다고 했더니 자연의 한 피조물인 너구리에게 크게 당하고 있다. 수확으로 바쁜 가을에 땀깨나 흘리게 생겼다.
서울을 다녀오신 아버지를 모시고 오느라 오늘 논에 들어갈 타이밍은 놓쳤다. 어쩔 수 없이 들깨밭으로 갔다. 눈으로 보기에 몇 평 되지 않는 들깨밭인데, 300평 들깨밭을 낫으로 베자니 엄청 넓다. 어머니께서 일부 들깨를 베어 놓았는데도 열 이랑 이상이 남았다. 한 이랑 한 이랑 베어나가는데 시간이 만만치 않게 걸린다. 두 시간 가까이 일을 했는데, 겨우 다섯 이랑을 했을 뿐이다. 나머지 다섯 이랑을 하고, 산소밭의 들깨도 베어야 한다. 내일은 하루 종일 일을 할 수 있으나 두분이 들깨를 베는 동안 나는 벼를 베어야 한다. 너구리 이녀석들. 어떻게 원수를 갚지.
그나저나 6시만 넘어서면 해가 져 버리니 일할 시간이 줄어 들어 행복한 가을이다.
'사는이야기 > 농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헛된 일을 헛되지 않게 하다_161024, 월 (0) | 2016.10.24 |
---|---|
마음 수양을 하다_161019, 수 (0) | 2016.10.19 |
왠 녀석이 뒹굴었느냐_161012, 수 (0) | 2016.10.12 |
부직포를 차곡차곡 개다_161006 (0) | 2016.10.06 |
진딧물약과 벌레약을 사다_160906 (0) | 2016.09.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