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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농사 이야기

얼마나 새로운 생명력이 솟구치는지_160803

선재길의 새벽 공기나 무일농원의 새벽 공기가 다르지 않음을 확인했다. 상쾌하고 행복하다. 아니 상쾌해서 행복하다. 곧 가을이 다가올 것을 이 뜨거운 공기 속에서 느낄 수 있다. 그러면 또 한 해가 간다. 허걱. 우리가 늙는 것은 행복의 파국을 피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니 세월 가는 것을 슬퍼할 일은 아니다. 메넬라오스의 죽임을 피해 파우스트와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헬레나는 아들의 죽음으로 사랑의 끈과 생명의 끈이 모두 끊겼다고 생각하며 슬퍼한다. 그러나 당당하게 받아들인다. 행복과 아름다움은 오래 화합하지 못한다며.


김장 배추와 무를 심을 밭에 풀들을 예초기로 베어냈다. 일주일 내에 갈지 않으면 다시 풀이 무성할 것이다.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황무지에는 얼마나 많은 새로운 생명력이 솟구치는지 알 수 없다. 그리하여 두터운 옷이 땀물로 젖고, 달콤한 체액의 유혹에 온갖 종류의 모기와 등에(greenheaded monster)와 선녀 벌레가 달라 들어도 묵묵히 예초기를 돌려야 한다. 두 시간 반이 지나서야 일을 끝냈다. 야외 샤워실에서도 파티를 기다리는 하루살이와 모기들과 벌레들에게 둘러싸여 지루한 줄을 몰랐다. 집중, 그것은 희망없는 무료함을 잊게 하는 명약이다.


창문으로 서늘한 기운이 들어와 벗겨진 어깨를 얼려 버리는 바람에 잠이 깨었다. 대략 눈꼽만 떼어내고 산소밭으로 갔다. 휴가를 다녀 온 사이에 일부 이랑의 풀을 뽑으셨는지 생각보다 아주 상태가 좋았다. 호미를 들고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며 쇠비름과 바랭이와 명아주를 걷어 내었다. 열 다섯 이랑 위를 슬슬 걸으며 부담없이 풀을 헤치우고 나니 기분이 참 좋았다. 아, 이런 것이 노동의 행복이구나. 지나시던 땡글이 아주머니가 '아유, 저 땀좀 봐. 이제 일 그만하세요' 하며 격려하신다. 걱정도 격려가 되는 것이 또한 노동의 기쁨이다. 자꾸 노동이 기쁘다고 하니 누군가 또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평화롭게 살고 싶다고 찾아올까봐 겁난다. 기쁨은 정말 찰나의 순간이고, 99.9%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의 연속이다. 쉬는 시간 조차도 무료하여 우울하다. 이것이 진실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치밀한 관찰자가 되지 못하기는 하지만 이제 나는 풀에게서 무언가를 찾아내야 한다. 오늘은 쇠비름과 바랭이로부터 보았다. 뽑아서 부직포에 던져 두었던 바랭이와 쇠비름의 일부가 다시 살아난 것이 분명히 보였다. 뿌리가 끊겨 물이 말라 버렸으니 분명히 말라 죽어야 하는데, 그들 중 일부가 살았다. 줄기에서도 나오고, 살짝 남아있던 뿌리에서도 나온 뿌리가 부직포를 향해 바늘끝같은 실뿌리를 뻗는다. 그러다가 문득 미세한 구멍이 그 실뿌리에 걸리게 되면 부직포를 뚫고 다시 땅 속에 뿌리를 박을 수 있다. 그러면 살아난다. 어떤 풀들은 다른 풀들의 줄기에 뿌리를 밀어넣어 본다. 그 중 우연히 물기가 있는 줄기에 뿌리를 내릴 수 있게 되면 그 풀은 다시 살아난다. 죽음 속에서 삶을 이끌어 낸다. 언제나 새로운 생명력은 사방에 널려 있다.


그 모든 풀들을 전부 밭둑으로 던져 버리고 상쾌한 새벽 공기의 행복을 그리워하며 집으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