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갈까 말까를 몇 번이나 고민하다가 오후 6시가 다 되어서야 옷을 챙겨 입는다. 천재도 우주신도 따라 나선다. 밥이나 준비하라고 그렇게 부탁을 해도 호박 줄기라도 잡아야 한다면서 그리미도 호미를 잡는다. 그래, 그것이 농부 가족의 숙명이다.
아침부터 그리미의 목소리가 높다. 금이 간 싱크대 수도 꼭지를 빨리 고쳐 달라는 것이다. 물론 고치고 싶다. 그러나 벌써 두 어번 검토해 보았더니 내 실력으로는 도저히 고칠 수가 없다고 판단되었다. 애만 쓰고 돈까지 버리느니 조금 불편하더라도 그냥 쓰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돈 주고라도 고치라고 닥달을 하는데, 어디에 전화를 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할 수 없이 싱크대 밑에서부터 다시 한 번 점검에 들어간다. 이것들은 분리하고 저것들을 풀어내면 분해는 될 것이다. 일단 급수관의 밸브를 잠그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잠금 나사를 감으로 돌리기 시작한다. 돌지 않는다. 반대로 돌린다. 역시 되지 않는다. 한참을 씨름하는데도 꼼짝도 하지 않는다. 정농께서 연장을 챙겨 오셨다.
힘 빠진 아들을 대신해 잠금 나사를 돌려 보신다. 역시 꼼짝도 안한다. 아래서 잠금 나사를 잡고 있는 동안 위에서 수도 꼭지를 돌려 보시라고 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돌기 시작한다. 희망을 갖고 이 작업을 했다. 열 번, 스무 번. 해체에 성공하는 것 같다. 온 몸에 기가 빠져 나갔는데도 나사는 다 풀리지 않았다. 연중 최고의 더우에 지쳐 화장실로 숨 돌리러 간 사이에 정농께서 마져 힘을 쓰니 나사가 다 풀렸다. 휴, 1단계 성공이다.
여기서부터 다시 생각을 해야 한다. 5년 전에도 이 싱크대 수도 꼭지를 분해하고 보니 복잡한 내부 구조 때문에 재조립할 엄두가 나지 않았었다. 왜 이렇게 복잡할까. 급수관은 분명 온수와 냉수 두 개 뿐인데, 수도 꼭지에는 4개의 선이 원통 속에 묻혀있다. 찬찬히 자세히 들여다 보니 두 개의 관을 하나로 이어주는 관이 있고, 그 관은 말단 수도꼭지이며 주름관이다. 그 주름관을 늘였다 줄였다 할 수 있도록 두겹으로 겹쳐서 원통 속에 집어넣은 것이다. 그 주름관을 해체하기 위해서는 중간에 나사를 풀어야 한다. 바로 그것이 복잡한 구조의 핵심이었다. 됐다. 망가진 수도관을 전부 해체하였다.
부속을 45,000원 주고 사다가 조립했다. 구조를 알고 나니 일사천리로 작업이 진행되었다. 우주신의 도움을 받아 잘 보이지 않는 설명서를 자세히 읽고 천천히. 물이 새지 않도록 흰색 테이프로 잘 잠고. 결정적인 것은 망가진 수도관을 가게에서 받아주지 않았던 일이었다. 그 수도관에는 연결 밸브가 있었는데, 만일 가게에 그것을 버리고 왔다면 작업은 완료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미와 어머님이 속 시원해 하신다. 싱크대 바닥에 벽지를 잘라 깨끗하게 정리까지 끝내고 나니 오전이 지나가 버렸다. 동생 가족들도 간다.
윗밭의 풀을 예초기로 돌렸다. 벌을 치기 위해 쑥을 얻던 곳인데, 벌통이 5통으로 줄어들면서 그냥 방치해 두었더니 엄청난 크기로 자라 있었다. 예초기 날을 쌩쌩 돌리는데도 쉽게 잘리지를 않는다. 여름 태양볕이 강할 수록 풀들은 강해진다. 뿌리로부터 충분한 수분과 양분을 공급받으면서 줄기와 잎을 마구마구 번성시키고 키운다. 해가 다 넘어갔는데도 온몸이 땀으로 흥건하다. 저녁에 향악당에 가서 다른 농부들 이야기를 들었더니 오후 4시 반부터 일한 농부들이나 6시에 나가서 작업한 나나 놀라운 더위의 위력은 틀리지 않았다.
그래도 놀라운 것은 땀을 뻘뻘흘리고 났더니 몸이 개운하고 기운이 솟는 느낌이다. 죽지 않을 정도로 노동을 하는 것은 삶의 활력소가 되는 것만은 틀림없다. 오후 내내 시원한 에어컨 밑에서 책도 보고 오카리나도 불어 보았지만 뭔가 개운하지 않았는데, 팥죽땀을 흘리고 났더니 개운하다. 그리미도 아이들도 할머니의 호박밭을 정리해 드리고 매우 즐거워 한다. 두 분의 몸도 마사지까지 해 드렸다고 하니 훌륭한 아들들이다.
향악당에는 지난 번에 공연을 나간 대야리에서 많은 신입회원들이 오셨다. 한방 가득 모여서 하루 종일 먹은 수박을 또 먹고, 역시 땀흘리는 여름이 사람 살기에는 좋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부족한 장구도 추가로 구매하는 등 더위에 지치지 않는 활력을 나누고 집으로 돌아온다.
두 시간 동안 예초기를 돌려 쑥대는 전부 제거했다. 뒷정리를 해야 하는데 도저히 몸을 쓰기가 힘들어서 그냥 두었다. 야외 샤워실에서는 모기들이 잔뜩 대기하고 있었다. 샤워기를 돌려 찬물을 뒤집어 씌우니 잠깐 도망간 듯 하지만 물만 그치면 끊임없이 나의 체액을 쫓아 주변을 맴돈다. 그래도 뒤집어 쓴 찬물 덕분에 노동으로 몽롱했던 정신이 번쩍 난다. 아, 쑥 대나무여 여름은 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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