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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농사 이야기

폐하, 어찌 권력만큼 분별력을 갖추시지 않으셨나이까_160712

이 글은 허구에 가깝다. 벌써 몇 년 동안 농사이야기를 쓰다 보니 별로 새로운 이야기가 없다. 그래서 최근 들어 기록하는 재미가 없어졌다. 어떻게 할까 하다가 이야기를 지어내기로 했다. 팩션이다. 사실과 허구가 뒤섞여 있으니 대체로 허구라고 받아들이면 좋을 것이다. 무일 박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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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도 않는 비를 핑계 삼아 아침 일은 쉬고, 오랜만에 헤르메스를 타고 음성을 다녀왔다. 가는 동안 좀 더웠지만 돌아오는 내내 비가 쏟아질 듯 검은 구름이 몰려 다니고 있어서 약간 불안했으나 정말 시원했다. 아이들도 이미 내린 비를 핑계삼아 집에서 쉬고 있어서 90분 동안 실컷 오카리나 연습을 하고 돌아왔다. 엘콘도파사. 마지막 줄까지 다 끝냈지만 아직도 속도를 다 내지 못한다. 캐논 변주곡이 되었으니 이것도 될 것으로 믿는다. 연습으로 안되는 것은 없다.


빙그레 할머니는 마음이 따뜻하시다. 언제나 다정한 미소로 주변 사람들을 조용하게 챙기신다. 밥도 국도 건더기도 커피도 따뜻한 자리도 마을 사람들을 위해서 열심히 만들어 주신다. 여든이 넘으셨으나 소녀처럼 맑은 인상을 갖고 계실 수 있는 것은 포근한 마음과 행동 떄문일 것이다.


빙그레 할머니는 어머니와 동갑이어서 그러신지 유난히 서로를 챙기시는데 보기에 참 좋았다. 어머니가 오리알을 한 댓 개 비닐 봉투에 담아 가져다 드리면 어김 없이 뜨끈한 팥죽 냄비를 들고 오신다. 까치로부터 지켜낸 땅콩 한 사발을 가져다 드리면 서울의 딸 내미가 사다 놓은 커피 믹스 한 봉다리를 가져다 놓으신다.



임대료라고는 덩그러니 있는 무덤 하나만 벌초하면 되는 300평 넓고 반듯한 밭을 우리가 빌릴 수 있게 해 주신 것도 빙그레 할머니다. 얼마 되지 않는 농사 지어서는 돈 한 푼 벌 수 없으니 근처에 취직이라도 해야 되는 것 아니냐고 당신 일처럼 우리집을 걱정하신다. 아들이 농사지을 힘이 조금 남아도니 땅이나 좀 더 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잊지 않으셨다가, 땅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득달같이 땅주인에게 전화를 해서 우리집에 맡겨야 한다고 이야기를 넣으신 모양이다.


오늘은 그 땅에 들깨 모종을 했다. 나는 오늘 처음 나갔지만 수천께서는 벌써 며칠 째 들깨 모종을 하고 계신다. 시원찮은 장마비가 모종 심기에 매우 좋은 환경을 제공해 주고 있다. 논의 풀은 많이 잡혀서 급하지 않아 산소 땅의 풀을 뽑아드리면 훨씬 일하시기 좋다고 말씀하셨다. 벌씨 세 번째 풀을 매는 것인데, 서너 포기씩 남아 있던 풀이 잠깐 한 눈 파는 사이에 엄청 퍼져 있었다. 갑자기 암담한 생각이 들었다. 그순간 '그래, 일단 한 포기만 잘 뽑아내자'고 마음을 고쳐 먹었다. 한 포기 또 한 포기 하다 보니 어느 덧 한 줄을 해결했고, 수천께서 모종을 착착 심어 오시는 동안에도 두 줄을 더 뽑을 수 있었다. 내일 새벽까지 하면 위쪽의 풀은 전부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


빙그레 할머니가 마냥 좋으신 것만은 아니다. 지난 번 마을 비빔밥 회식 때의 일이다. 어서 와서 밥을 먹으라 하시는데, 겉옷을 입지 않고 있어서 주저주저 하고 있었는데, 동네 사람들이라 괜찮다고 하시기에, 체면 불구하고 들어가서 식사를 했다. 어깨에 수건 한 장 걸치고. 회관에서의 식사지만 마을의 할머니들이 준비하시는 것이라 항상 죄송하고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맛있게 식사를 하는 동안 빙그레 할머니의 말씀이 부드럽게 흘러 나온다.


"같이 먹자고 할 때, 괜시리 빼고 그러는 사람은 이쁘게 보이지가 않어. 아, 생각해서 챙겨 주려고 하는데,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엉덩이 잠깐 못 붙이느냐고. 할머니들 음식이 맛이 없더라도 정성을 생각하면 달게 먹어 줘야지."


그러고 보니 마을 소동계 날 전에도 커피 한 잔 타 주시면서 강력하면서도 부드러운 말씀이 있으셨다.


"방씨 말이여. 안되겠어. 뭐 큰 벼슬이라고 유세를 하는 모양인데. 말 함부로 하고, 계산 희미해서 안되겠어. 이참에 다른 사람으로 갈아야겠구먼. 자기도 뭐 손 털겠다 하니 아예 바꿔 버리자고."


그러시더니 정말로 마을 일 보는 사람을 바꿔 버리셨다. 부드럽지만 강단지고, 마을 일에 결코 소홀함이 없으며, 어른으로서의 권위를 십분 발휘하신다. 소학교도 제대로 다니시지 못해서 당신 이름자도 힘겹게 쓰시고 주민등록번호도 제대로 외우고 있지 못하신 분이지만 공적인 일 만큼은 현명하게 처리해 내신다. 할머니도 다 같은 할머니가 아니다.


괴테는 불놀이에 빠져 위험에 빠진 황제에게 의전관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오, 청춘이여, 청춘이여, 너는 어찌 적당히 즐거워할 줄 모른다더냐?

 오, 폐하, 폐하, 어찌 권력만큼 분별력을 갖추시지 않으셨나이까?" (236쪽 / 파우스트 / 열린책들)


옛날이나 지금이나 청춘의 방탕함과 권력자의 무분별함은 어찌할 수 없는 문제였던 모양이다. 아, 싸아드도 생각난다. 자신과 공동체를 동시에 위험에 빠트리니 말이다.


그러나 우리 마을에는 충분한 분별력을 갖추신 부드러우면서도 할 일을 하시는 빙그레 할머니가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