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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농사 이야기

항상 선을 원하면서 악을 택했구나_160705

지난 주에 벼에 대한 무농약 인증을 받기 위해서 인증기관으로부터 인증에 필요한 서류를 받았다. 2년 전 유기농 기능사 자격증 취득 공부를 할 때도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들이지만 직접 서류를 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생각과 공부와 실제는 정말로 다르고, 무엇을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실제로 해 보는 방법 말고는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정말로 현명한 사람은 경험해 보지 않고도 알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두 가지 측면에서 무농약 인증을 신청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첫 번째는 볍씨 소독 문제이다. 그동안 좋은 볍씨를 재생산하기 위해 많은 애를 썼다. 부모님이 2001년부터 시험해 오셨으니 정말 오랜 기간 노력해 왔다. 소금물을 이용하여 튼실한 볍씨를 고르고, 목초액을 희석한 물에 볍씨를 푸욱 담가 두었다가 싹을 틔우기도 했으며, 돼지꼬리 가열기를 이용해 볍씨 담근물을 70도 내외로 가열하여 보기도 했다. 정부 보조가 있다고 해서 볍씨 온탕 소독기를 구매하는 것까지도 검토해 보았다.


이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도 최근 5년 사이에 급격하게 번지고 있는 키다리병을 예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작년부터는 농협에서 보급하는 농약을 이용해서 볍씨 소독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약을 이용한 볍씨 소독도 효과는 없었다. 논 전체를 뒤덮고 있는 키다리 벼들을 보면서 괜히 농약으로 볍씨 소독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년부터는 다시 옛날 방식으로 돌아가야겠다. 효과도 보지 못하고 농약을 쓰게 된 것이 억울하다. 결국 지난 2년의 볍씨 소독이 무농약 인증을 받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두 번째는 이웃 논의 제초제 사용 문제이다. 논을 구입하고 제일 먼저 한 일이 이웃논과 수로를 분리하는 일이었다. 농약이나 제초제를 사용한 물이 우리 논으로 흘러 들어오는 것을 막아야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잘 한 일이었는데, 문제는 논둑에 직접 사용하는 제초제였다. 이웃한 논은 논둑 위의 풀을 정리할 책임이 있고, 나는 논둑 아래 언덕의 풀을 정리할 책임이 있다. 


내가 먼저 예초기로 풀을 제거할 때는 논둑 위와 아래 언덕의 풀을 모두 제거하기 때문에 제초제가 뿌려지지 않는다. 그런데, 잠깐 다른 일로 바쁜 사이에 이웃논의 권쌩이 먼저 움직여 버렸다. 친절하게도 내가 해야 할 언덕의 1/3까지 제초제를 듬뿍 주었다. 고소한 콩국수에 뿌려지는 깨소금처럼 보이지만 누렇게 풀들을 말려 죽이는, 아니 거의 붉은 기운이 돌도록 태워 죽이는 제초제를 본 것이 지난 4월의 봄날이었다. 


아, 나의 게으름이여. 권쌩의 부지런함이여. 원망할 수도 없는 일. 결국 무농약 인증은 물 건너 가게 되었다. 모내기를 끝내고 다시 예초기로 논둑을 모두 베어냈지만 이미 뿌려진 제초제의 독성은 5년이든 10년이든 지속될 수 있다고 한다. 무서운 일이 아닌가.


메피스토텔레스는 '네가 누구냐?'는 파우스트의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메피스토펠레스 : 항상 악을 원하면서도 항상 선을 만들어 내는 힘의 일부이지요. (중략) 생성되는 모든 것은 죽어 없어지기 마련이니 부정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중략) 악이라 불리는 모든 것이 제 본래의 활동 영역이지요. (중략) 머지않아 빛이 물체와 더불어 몰락할 것입니다. (중략)


파우스트 :  이제 너의 고매한 사명이 뭔지 알겠다! 네가 크게는 파괴할 수 없으니 작은 것에서 시작하려는 속셈 아니겠느냐." (파우스트 / 괴테 지음 김인순 옮김 / 열린책들 / 58~9쪽)


괴테의 말을 빌려 이 상황을 정리하면 이렇다.


"깨끗한 농사를 짓는 나는, 항상 선을 원하면서도 때로는 악을 만들어 내는 농부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을 힘든 노동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게 하는 것이 인간으로서 나의 목표니, 농부들이 제초제와 농약을 뿌리는 것을 말릴 수 없다. 머지않아 자연주의자들은 고된 노동으로 육체와 함께 몰락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현대 농업의 현실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때로는 악을 행할 수밖에"


내년에는 더욱 깨끗한 농사를 짓기로 굳게 결심한다. 그러나, 올해의 무농약 인증 신청은 포기했다. 언젠가 받을 날이 올까. 다른 사람말고 "너의" 고된 노동에서는 언제 벗어나려고 하니.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