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허구에 가깝다. 벌써 몇 년 동안 농사이야기를 쓰다 보니 별로 새로운 이야기가 없다. 그래서 최근 들어 기록하는 재미가 없어졌다. 어떻게 할까 하다가 이야기를 지어내기로 했다. 팩션이다. 사실과 허구가 뒤섞여 있으니 대체로 허구라고 받아들이면 좋을 것이다. 무일 박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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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마씨 할머니를 처음 만났다. 호리호리한 몸과 쪼글쪼글한 얼굴을 하고 먼 길을 걸어 다니시며 현역 농부로 열심히 살고 계시는 분이다. 밭둑에 앉아 새소리 들으며 외로운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허리가 구부러져 조용히 나타나 근처에 앉으셔서, 땡볕을 피하려고 보온통에 담아 온 시원하고 달달한 커피 한 잔을 맛있게 빼앗아(?) 드시더니 한 말씀 하신다.
"우리 집은 말이여. 농사가 워낙 커서 우리 손으로는 다 해낼 수가 없어. 일군들을 수도 없이 사서 대어야지. 내 젊어서는 일하랴 일군들 밥 해 먹이랴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 인근 땅이 전부 우리 땅이었거든. 마을 사람들도 으레 우리 집으로 일을 왔어. 그냥 도와주러 오는거야. 워낙 일이 많으니까 말이야. 참 많이들 일을 왔어."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마씨 할머니가 동네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줄 알았다. 예나 지금이나 가난한 살림들은 일자리 구하기도 쉽지 않았는데, 대지주의 집안에서 마을 사람들을 적극 고용해서 살림살이에 작은 보탬이라도 되게 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마씨 할머니는 새벽이면 우리집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판에 상토흙 담아야 하는데 사람이 없어'
'고추 심어야 하는데 일손이 부족해'
'모판 날라야 하는데 허리가 아파'
'땅콩 까서 심어야 하는데, 사위 놈이 너무 많이 사와서 손가락이 아파 죽겠어' 등등 끝도 없었다.
당시 팔순이 넘은 고령의 어르신이 부탁을 하니 아니 갈 수도 없고 해서 제초제 냄새도 나지 않는 우리 논바닥에서 얼씨구나 일어나는 풀들을 두 눈 번히 뜨고 쳐다 보면서도 마씨집 일을 도울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는 고맙다는 둥 마는 둥 점심 한 그릇으로 대충 인사하고 본인이 제일 열심히 일하시면서 자원봉사하러 나온 우리들에게 부지런히 일을 시킨다. 돌아보면 끌려 나온 것은 우리 식구 뿐이 아니었다. 온 동네 노인이나 젊은이나 가릴 것 없이 노역에 동원되었다. 마씨 할매의 말은 빈 말이 결코 아니었다. 다만, 내 생각과는 달리 정당한 노동의 댓가가 주어지거나 품앗이를 하는 것이 아니었을 뿐이다.
매년 마씨 할매의 부름에 응답하는 날은 줄어 들다가 이제는 없어졌다. 그렇지만 팔순의 어머니는 여전히 '안되었다' 하시면서 노구를 이끌고 구순을 바라보는 선배 농부의 땅콩씨앗을 까 드리러 한 나절 다녀 오시는 모양이다. 물론 옛날 같지는 않다. 우리 일을 우선하고 좀 쉴 수 있는 시기에 아주 잠깐 일 해주시는 것으로 선배 농부에 대한 예의를 차리신다.
지지난 주에 땡볕에서 콩밭을 매던 마씨 할매에게 큰 소리로 인사를 했는데, 눈길 한 번 슬쩍 돌리더니 인사조차 받지 않는다. 일이 힘든걸까, 일손을 안 보태 드렸더니 역정이 나신 걸까.
장마비가 물러나고 마씨 할매 사위가 찢어놓은 비닐하우스 창고를 아버지와 함께 수리하면서 자꾸만 그 집을 바라본다. 넓다랗게 지어 진 근사한 주택에는 사위의 인기척은 있으나 마씨 할매의 기척은 보이지 않는다. 와서 말이라도 시켜야 '할매 사위가 찢어 놓고 보수해 주겠다고 약속만 하고 방치된 지 일년이 넘어가요. 비가 새서 어쩔 수 없이 우리가 직접 하우스 수리하느라 바빠요'라고 시원하게 말을 할 수 있을텐데.
논 웃거름 용으로 20kg 화학비료 5포를 농협으로부터 받았다. 장마가 그치고 벼 꽃이 피기 시작하면 1,400평의 논에 뿌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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