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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농사 이야기

사람이 살고 봐야지_160524, 화

비가 내리니까 온 세상이 깨끗해지는구나. 20대까지의 젊은 시절에는 바지와 양말과 발가락을 축축하게 만드는 습기가 싫어서 비 내리는 날에는 짜증이 났었다. 우산대가 낡은 우산은 왜 그리도 자주 휘고, 그 척척한 것을 들고 만원 버스에 구겨타서 어디를 가야 하는 상황은 정말 끔찍했었지.


그런데, 30대를 넘기면서부터 비 내리는 것이 좋다. 야영을 하는 좁은 텐트가 아쉽지 않을만큼 천막 위에서 울리는 빗방울 소리가 가슴을 울리는 음악처럼 들리고는 했지. 빗소리의 아름다움이 느껴지면 점점 어른이 되어 간다고 생각해도 될거야.


어제는 밭작물을 심은 고랑 옆의 이랑에 부직포를 덮었다. 부직포를 덮지 않으면 제초제를 뿌려야 하는데, 가습기 살균제 사고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병들기 이전부터 산 생명(풀이나 벌레)을 죽이는 약을 뿌리며 농사를 지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으로 풀을 죽이는 맹독성 제초제 대신에 맨몸으로 풀을 뽑으며 농사를 지었지. 너도 아마 어렸을 때 적어도 한 번은 이모부의 밭에서 풀을 뽑았을텐데, 기억이 나니?


그렇게 몇 년을 허리가 부러지고 손가락 근육이 마비가 될 때까지 풀을 뽑았더니 도저히 힘들어서 안되겠더라. 깨끗한 것도 좋지만 사람이 살고 봐야지. 그 때 나온 대안이 부직포라는 넓은 천을 밭에 까는 것이다. 새로 산 부직포를 깔고 나면 밭이 시커멓게 변하지. 그래야 햇볕이 땅으로 들어가지 않아서 풀이 자라지를 않거든.


그런데 기묘한 일은 시커먼 부직포를 덮은 밭은 정말 볼품이 없다. 제초제를 뿌린 밭은 작물들이 싱싱하게 잘 자라서 싱그러운데 말이야. 깨끗한 밭에 풀은 물론이고 벌레나 사람조차 살 수 없는 화학물질이 뿌려져 있는데도 그저 보기에는 깨끗하고 깔끔하니 농부들은 제초제의 유혹을 떨쳐버릴 수가 없지. 깨끗하다는 것을 외형으로만 판단한다면 이런 함정이 있어. 아마도 세상 모든 일이 마찬가지일거야. 그래서 어렵다고 하는 것이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원선이에게 쓰는 편지가 군대 위문편지가 되었구나. 그래도 편지를 쓰고 읽는다는 것은 즐거운 일일거야. 오늘부터는 아마도 농장 뒤편의 군부대에서 들려오는 저녁 나팔 소리를 들으며 원선이와 찬혁이를 떠올리게 되겠지. 건강하게 만나자, 사랑한다, 원선아, 찬혁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