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고 나서 뉴스를 보니 80여년 만에 기록된 최고의 5월 기온이란다. 그 더위 속에서 여든이 넘은 고령의 부모님은 벌써 2시간 째 참깨밭에 흙덮기를 하고 계신다.
사방이 조용한 가운데 움직이는 것은 짝짓기를 시도하는 20cm 남짓의 노랑새들이 내는 괴상한 소리다. 새들의 노래 소리는 높고 맑고 상쾌해서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어째 저런 소리가 날까. 멀리 보이는 그들의 모습은 노란색을 기본으로 해서 무척 아름답다. 신께서 아름다운 색과 목소리를 동시에 주시지 않았나 보다. 공작과 학과 왜가리가 멋진 모습과는 달리 스티로폼 상자 부서지는 듯한 괴상한 소리를 내는 것도 같은 일일 것이다.
겨우내 야외샤워장 옆에 망가진 침대 받침대 위에 쟁여 두었던 부직포를 마음이로 날라다가 밭이랑에 깔기 시작했다. 진흙 투성이의 검은 부직포는 보여지는 것도 지저분하지만 일하기도 참 더럽다. 일단 습기에 눅눅해져서 곰팡내가 후욱 나고, 풀의 잔뿌리가 뒤엉켜서 기생충이 번진듯 보이고, 진흙이 덕지덕지 묻어서 길가에 던져진 쓰레기 같기도 하다. 이런 시커먼 물건을 어깨에 메고 가는 기분은, 누구나 그렇듯이 좋지 않다. 게다가 어제 저녁에 빨아 말려서 깨끗해진 작업복이 단숨에 더럽혀지는 순간의 기분은 더욱 말이 아니다. 그런 기분 속에서도 부직포는 깔아야 한다. 이것을 깔지 않으면 수십 조에 달하는 풀부대들의 공격을 이겨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제초제를 듬뿍 주어 깨끗하게 가꾸어진 밭을 바라보는 느낌은 참 좋다. 시커멓게 더럽혀진 부직포가 깔려있는, 군데군데 너덜너덜해진 냄새나는 천조각이 주욱 깔아져 있는 무일농원의 밭은 보기에 더럽다. 깨끗하게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이렇게 지저분하고 초라하게 농사를 짓는 일이 되고 있다. 아, 폼나게 농사를 지어야 하는데, 이런 상황이라면 너무 가엽지 않은가.
그런저런 생각으로 부직포를 깔고 고정핀을 2m 간격으로 박을지 1.5m 간격으로 꼽을지를 고민하며 땡볕 아래서 숨을 헐떡이며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스윽 귀신이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사람도 아닌지 발자국 소리도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불안감에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지나가고 있었다.
500평 밭이라지만 길가에 붙은 쪽에서 부모님과 함께 작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걸어 온 그녀가 우리 세 가족을 보지 못했을리 없다. 그런데도 그녀는 인기척도 없이 스윽 우리 옆을 스쳐 지나갔다. 오십줄을 훌쩍 넘긴 그녀의 불은 몸매가 내 예리한 감각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나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벌써 5년 째 같은 마을에 살고 있고, 만날 때마다 언제나 고개 숙여 큰 목소리로 인사를 했는데도 그녀는 우리를 왜 모른척하고 지나 갔을까.
추측하건대 그녀는 아마 인사를 나누며 가깝게 지냈던 사람들한테 큰 사기를 당했을 것이다. 도시에서 작은 건설회사를 운영하며, 무난하게 살아가던 그들이 어느 날 갑자기 마을로 내려와 허름한 집을 짓고 살게 된 이유가 그것 말고는 딱히 없을 것같다.
어느 누구를 만나더라도 그녀는 절대 인사를 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하다가, 너무 답답해서 어머니가 어른들을 보면 인사를 하라고 지시(?)를 내리셨다고 한다. 그래도 어쩌다 한 번 가뭄에 콩 나듯이 인사를 하지 절대로 인사를 하지 않고, 쾡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외면하고 자기 할 일을 한다고 한다. 그 일이라는 것도 밭둑에 돋은 쑥을 캐는 것처럼 집중하는 것도 아니고, 어쩌다 눈에 띄는 예쁜 들꽃 한 송이 바라보는 것처럼 스치듯 지나가는 일이 전부다.
하루에도 몇 번씩 밭둑과 논둑을 지나가는 그녀가 혹시 정신이 이상한 것은 아닐까. 그것은 아니다. 우리가 그녀에게 잘못한 일이 있을까. 아니다. 뭔가 알지 못하는 비밀을 그녀는 감추고 있다. 뜨거운 햇살 아래에서 그녀의 정신세계를 분석하다 보니 어느덧 11시가 되었다. 재활용품도 정리하고 다른 이랑에 깔 부직포도 각 이랑으로 가져다 놓은 뒤에 일을 정리했다. 스윽, 그녀가 또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언제고 이 의문에 찬 여인의 행위를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기다리자, 시간은 내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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