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접한 이야기들로 가득 채워진 여행기가 왜 이리 즐거운 지 한 번 손을 잡으니 놓지를 못하겠다. 다른 손에는 한참 전에 읽기 시작한 강유원의 두툼한 '고전인문강의'도 들려있다. 미국의 박민우라 평할 만한 빌 브라이슨의 여행기다. 박민우는 지지리궁상으로 허접하고, 빌은 여유있게 찌질하면서 허접하다. 교양있게 허접한 여행기를 개척하는 것이 나의 임무라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저녁 식사 전에는 산책을 나갔다. 역 주변 골목길에는 입이 벌어질 만큼 못난 매춘부들이 일정한 시차를 두고 어슬렁거렸다. 나이가 쉰 살가량. 미니스커트와 어망 같은 스타킹을 신고 괴상한 색깔로 입술을 칠하고 가슴은 무릎까지 처진 여자들이었다. 어떻게 먹고 사는지 참으로 불가사의했다." (150쪽)
퐁피두 센터를 한 번 보기도 어렵겠지만, 대단한 그곳을 한 번 보고 나서 대놓고 불만을 토로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대단하다고들 하는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건물이다. 그렇지만 그 안에서 진행된 현대식 모빌 예술전은 볼 만했다. 그리고, 광장에서 벌어지는 온갖 버스킹 행위들은 나름 흥겨웠다.' 정도로 비껴가며 심미안의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이 고작일 것이다. 그러나 빌은 사정 봐 줄 생각이 없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는 퐁피두 센터에서 리포트를 하는 기자들을 별로 보지 못한 것같다. 아마도 빌의 영향인 듯 싶다.
"나는 이곳을 좋아해 보려고 단단히 마음먹었지만 도무지 맘에 들지 않았다. 퐁피두 센터는 시작부터 끝까지 뭔가 잘못된 곳 같다. (중략) 퐁피두 센터 같은 건물에 대해 정말 맘에 안 드는 점은 그저 과시하기 위한 구조물이라는 사실이다. (중략) 그는 퐁피두 센터의 진정한 기능이 무엇인지 전혀 생각해 보지 않고 지은 듯하다." (75쪽)
대체로 비슷한 느낌을 받기도 하지만 다른 이야기도 있다.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보지 않았는데, 빌은 '유럽 각국의 국민들이 300년 동안 고정관념에 충실하게 살아왔다'며 히버트의 이야기를 인용해서 프랑스와 파리에 대한 격하 운동을 한다. 이 책이 만일 프랑스에서도 번역 출판되었다면 '똘레랑스'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대표 사례가 될 것이다.
"개선문만 해도 열세 개의 도로가 만난다. 상상해 보라. 파리의 운전자들은 세계에서 가장 병적으로 공격적인 운전자들이다. 다른 상황이었다면 신경 약물인 소라진을 자전거 타이어 펌프만 한 주사기로 투약하고 가죽끈으로 침대에 묶어놓아야 할 사람들이 모두 한 공간에 진입하여 열세 개 방향 중 아무 데로나 이동을 시도한다고 생각해 보라! 이게 사고를 내라고 고사를 지내는 일이 아니고 무엇인가? 프랑스 인들은 심지어 내연 기관이 발명되기 훨씬 전부터 험한 운전으로 유명했다. (중략) 사람을 실은 마차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거리를 지나가며 ..... 아이들이 마차에 치이거나, 치어 죽는 광경도 흔히 목격된다." (69쪽)
재미있는 이야기를 이곳에 다 옮겨 놓으면 - 나는 읽을 시간도 쓸 시간도 많다. 게다가 오타가 없도록 다시 읽어보는 퇴고의 시간도 많아서 이런 일을 할 수 있다. 나도 예전에는 이렇게 못했다 - 아무도 책을 읽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는 하지만, 이 책에는 이런 일들이 가득하다. 옛날 말로 B급 여행기, 허접한 여행기지만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좋다. 이 허접한 책을 권한 것은 놀랍게도, 가장 정숙한 여인, 그리미다.
"다른 국가들이 대부분 아주 쉽게 하는 일인데도 어떤 나라 사람들은 아예 개념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일도 있다. 가령 프랑스 사람들은 줄서기의 의의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잘 안 되나 보다. 파리에 가면 버스 정류장마다 사람들이 질서정연하게 서 있지만, 버스가 도착하기만 하면 이 질서는 순식간에 무너진다. 정류장은 비인도적인 수용소에 화재 경보라도 울린 듯이 아수라장이 된다. (중략, 영국인들은) 햄버거를 굳이 나이프와 포크를 사용해서 먹으려 하는 점 (중략) 왜 그러는지 여전히 미스터리다. 영국에 산 지 벌써 15년이 되었건만, (중략) 낯선 그들에게 다가가 조언해 주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야 한다. '저기요, 두 손으로 쥐고 먹으면 지금처럼 완두콩이 사방에 줄줄 떨어지지 않거든요?" (52~3쪽)
허접한 이야기들과 관계없지만 요즘 주로 마시는 것은 따뜻한 보리차다. 수천께서 직접 재배한 옥수수와 보리를 볶아서 만들어 주신 옥수수 보리차. 우주신이 사달라고 꼭 집어 준 차 내리는 주전자에 이 옥수수 보리차를 담고, 외제 물끓이는 전기 주전자에 뜨거운 물을 2리터 끓여서 부어 우린 다음, 일제 보온병에 담아 두면 언제고 따뜻한 보리차를 이틀 동안 마실 수 있다. 지금 막 내린 보리차를 앞에 두고 이런 글을 읽고 있으니 행복하기 그지 없다. 아들러는 행복이 공헌감이라고 했는데, 이건 대체 무슨 공헌감일까.
"역은 로마의 다른 공공장소와 마찬가지로 아수라장이었다. 창구마다 표를 사려는 손님들이 언제나처럼 과장된 체스처를 하고 있었다. 이들은 표를 산다기보다는 각 창구 안쪽에 앉아 있는 대단히 무관심하고 지쳐 보이는 이들에게 세상살이가 얼마나 고생스러운지 토로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중략) 나는 내 앞에 선 사람들이 머리를 쥐어뜯거나 울부짖다가 결국 표 한 장을 받아 갑자기 얼굴이 환해지며 자리를 뜰 동안, 40분이나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중략) 내 기차가 출발하기 1분 전, 마침내 내 차례가 왔다. 나늘 나폴리행 2등석 표를 한 장 샀다. 표 사기는 전혀 어렵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대체 왜 그 난리였는지 모르겠다." (227쪽)
이후의 글들은 다소 오래되고 진부하다. 새로운 방식의 이런 가벼운 여행기는 즐겁다. 조심스럽지만 박민우의 여행기가 한 수 위다. 공들여서 웃겨주는 박민우의 글과 빌의 글을 읽다보면 여행은 정말 가벼운 소일거리라 할 것이다. 정보, 필요하다면 다른 여행기를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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