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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서재

잘하는 정치는 민족을 가리지 않는다_흉노제국이야기 4_151214~1220

중원의 마지막 흉노인들에 대한 기록을 읽으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떤 민족이라도 '잘하는 정치'는 비슷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경제력을 키우고, 국방을 안정시키며, 나이와 민족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고, 모든 공동체의 성원들에게 대화의 문을 활짝 열고 있다. 이런 지표들이 무엇이며, 어떤 수준인지를 알면 그 사회의 정치 수준을 알 수 있다.

 

"(흉노인인 저거몽손은) 국력을 키우기 위해 나라를 다스릴 방안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유능한 선비를 등용하고 세금을 감면하여 생산력을 높이는 등 국력을 키워갔다. 특히 실력이 뛰어나 인재들에게 중책을 맡기고, 중원의 황제들이 그랬듯이 조서를 내려 백성들 누구나 진언을 할 수 있도록 명했다. 또한 법을 위반하고 백성을 해치는 행위에 대해서는 대의멸친의 각오를 내세웠(다, 중략) 460년, 북위에 패한 또다른 유목민족 유연이 서쪽으로 옮겨오면서 저거안주를 패퇴시키니 이로써 북량을 계승한 왕조는 모두 멸망했다. 북량이 멸망함에 따라 흉노족은 두 번 다시 국가의 형태로 중국 역사에 얼굴을 내밀지 못했다. (중략) 그들 정부에는 한인과 소수민족들이 넘쳐났고 단순한 들러리가 아니라 주인으로서의 대접을 받았다. 흉노인은 지도층을 형성하고는 있었으나 전부를 차지하지는 않았다. 저거몽손은 중원의 황제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았다.

 

(중략) 위진남북조 시기는 민족 융합의 시기였다. 이 시기에 등장한 많은 민족들 중 흉노만 놓고 보아도 난폭한 야성을 지닌 혁련발발부터 뼛속 깊이 한화된 저거몽손까지 역사는 마치 확연히 다른 세 가지 유형을 비쳐주고 그것들이 융합되는 단계를 보여주고 있다. (중략) 북량이 멸망한 후 흉노는 중원이라는 망망대해 속에서 그 자취를 감추었다. (중략) 중국에서 할거정권이 군림하던 시기에 일찍이 몽골고원을 떠났던 또 한 무리의 흉노인들이 중앙아시아를 거쳐 유럽 내륙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230~6쪽)

 

전쟁은 약탈로 이어진다. 승자와 패자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되어 비극을 만들고 또 되풀이한다. 기회 있을 때마다 아이들에게 전쟁의 비극을 말해 주어야 한다. 많은 것을 감수하고라도 평화를 지켜가야 한다는 것을 알려 주어야 한다. 평화는 모든 시민의 지혜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이고, 지혜를 모아 정치가 이루어졌을 때 평화가 꽃 피는 것이다. 장진퀘이는 사회주의 중국에서 교육받은 사람임에 틀림없다. 제국주의 로마에 대한 서술이 100여쪽 이어지는 동안 단 한 차례의 호의적인 문구도 발견하지 못했다. 잔인하기로 따지면 항우와 비교하면 새발의 피고, 현명하기로는 맹자를 따르지 못할 것도 없는 사람들이 이룩했던 로마제국에 대한 평가가 다소 박한 것은 아닐까.

 

"(로마제국의 지방관리 루키피누스는) 국가가 서고트족에게 보급하라는 식량을 빼돌리고 개를 수십 마리 잡아와 물물교환을 강요했다. 개 한 마리 당 한 명의 노예를 바쳐야 했다. 서고트족은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교환에 응했고 자식을 팔아 고기를 얻는 경우가 허다했다. 윗물이 더러우면 자연히 아랫물도 썩는 법, 로마의 병사들도 서고트족의 신세를 악용해 각종 만행을 저질렀다. 서고트 군사의 부인과 딸에게 매춘을 강요하고 아들을 노리개로 삼았다.

 

(중략, 훈족) 그들은 우리와 함께 있지만 우리는 그들이 어디로부터 왔는지 알지 못한다. 그들은 성수를 말에게 먹이고 성전에서 여자를 희롱하며 아이들의 머리를 베어 기둥에 매달았다. 우리의 딸들은 옷이 벗겨진 채로 말에 태워져 이곳을 떠난 후 두 번 다시 볼 수 없었다." (344, 352쪽)

 

중원을 차지한 한나라(특히, 한서를 지은 반고의 형인 반초 장군)에 밀려서 중앙아시아를 지나 유럽으로까지 진출한 훈족에게는 상대가 없었다. 350년에서 400년 사이에 유럽은 대혼란을 겪는다. 강력한 로마제국도 계속되는 전쟁으로 군사력을 상실했고, 수없이 불어나는 강력한 유목민족들은 서로 살기 위해 경쟁하게 된다. 그중 최고는 훈족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의 삶은 가여웠다.

 

"그들이 먹는 것은 주로 야생식물의 뿌리나 짐승의 생고기다. (중략) 그들은 산속을 유랑하며 어릴 때부터 배고픔과 갈증을 견디고 추위에 맞서는 법을 배운다. 고향을 떠난 후에도 그들은 결코 다른 이의 집에 머물지 않는다. (중략) 그들은 모두 밤낮없이 말 위에서 거래를 하고 말 위에서 먹고 마시며 말 등에 누워 잠을 자고 꿈을 꾼다. 만약 중대한 의논 사항이 생길 경우에도 그들은 말 위에 앉은 채로 회의를 한다. (중략) 행동이 바람처럼 빨라 적들이 미처 발견할 틈도 없이 그들은 어느새 적의 진영 앞에 나타나 있다. (중략) 그들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전사들이다. (중략) 20년 동안 매일같이 로마인의 선혈이 콘스탄티노플에서 알프스 산맥으로 흘러들어갔다. ....... 훈족은 알란족을, 알란족은 고트족을, 고트족은 다시 타이팔리족과 사르마트인을 공격했고, 일리리아에서 쫓겨나온 고트족은 또 다시 우리 로마를 공격했다. 이 전쟁의 끝은 아무도 예측할 수가 없었다." (353~4쪽)

 

참으로 복잡하다. 많고 많은 사람들이 살았고, 그 사람들의 삶과 죽음에는 모두 이야기가 들어있다. 희노애락이 녹아있는 그 이야기들을 무시한 채로 밀리고 밀리는 싸움터의 결과만을 들어야 하는 것은 어찌보면 낭비다. 무엇이 머리 속에 남겠는가. 4세기 말 200년을 유랑한 훈족의 유럽 안착은 세계사를 섞어 놓았다.

 

"울딘(훈족의 지도자)은 하늘의 태양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태양이 비추는 곳이라면 난 어디든 달려가서 정복하고 말겠소." (중략) 울딘이 이곳(헝가리 동부 평원)에 온 순간 이전의 평화는 한순간에 깨지고 말았다. 후니문드(동고트족의 왕)는 감히 울딘에 대한하지 못한 채 그 대신 알란족을 밀어냈다. 게피다이족, 수에비족, 반달족, 부르군트족 등은 훈족 기병에 잠시 대항하다 곧 라인 강을 건너 갈리아로 옮겨갔다. 그리고 이미 그곳에 정주한 프랑크족, 알레마니족과 함꼐 한솥밥을 먹었다. 앵글로색슨족은 더 멀리 이동하여 영국해협을 건너 훈족 기병이 뒤쫓을 수 없는 브리타니아에 이르렀다. 그들은 잉글랜드의 주인이 될 때까지 켈트족, 주트족 등과 장기간의 전투를 벌였다.

 

헝가리 초원은 유럽 내륙의 마지막 초원으로 그 서쪽은 울창한 삼림지대였다. 삼림지대는 유목민족이 가장 허점을 드러내기 쉬운 곳으로 아무리 강한 군대도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쉬웠다. (중략) 울딘은 헝가리 초원을 점령한 뒤 채찍을 버리고 당근으로 게르만족을 잘 구슬려 투항하도록 했다." (357~9쪽)

 

역사는 '모든 생명의 삶'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흘러왔다. 그러나, 인간과 모든 생명을 존중하고, 자연에 대한 사랑을 가진 문명인들이 탄생하기까지 많은 세월이 흘러야 했다. 지금 21세기 이전의 모든 인간들은 아직매우 야만적이다. 진시황과 한나라가 북방민족인 훈족을, 로마제국이 200년 후에 이주해 온 훈족을 야만족이라고 표현했지만, 그들 모두 야만스러웠다. 생고기를 먹으며 잔인하게 사람을 죽인다는 훈족의 이미지는 사실이지만, 한족 또는 로마인과 똑같은 사람이었다. 서로에 의해 서로가 길러졌다.

 

"아이티우스(390년 출생)는 일찍이 근위군으로 선출되었지만 3년이나 서고트에 볼모로 잡혀 있어야 했다. (중략) 그는 영웅적 기개를 지닌 외모에 나약하지도 둔하지도 않은 균형 잡힌 체격을 갖췄다. 또한 매우 민첩하고 순발력이 뛰어난 숙련된 기병이자 사수로서 지치는 법이 없었다. 또 타고난 전사로서 이름을 떨쳤고 탐욕에 동요되지 않았다. 어떠한 사악한 유혹 앞에서도 그 뜻을 굽히지 않는 지혜를 지녔으며 늘 무한한 관용을 베풀었고 노동을 사랑했다. 위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굶주림을 참는 일에는 누구도 그를 따라올 자가 없었다. 411년, 그는 다시 볼모로 훈족 왕 루아에게 갔다. 아이티우스는 훈족의 언어를 배우고 훈족의 기마술과 궁술을 익혔으며 귀족들과 친하게 지냈다. 그가 볼모생활에서 얻은 최고의 수확은 훗날의 전략 파트너인 아틸라와이 만남이었다.

 

(중략) 아이티우스가 훈으로 오기 전에 아틸라(나중에 훈족의 황제가 되어 로마를 멸망시킨다)는 이미 라벤나(로마제국의 피난 수도)에 볼모로 보내진 상태였다. 아틸라의 볼모생활에 대해 전해오는 것은 거의 없다. (중략) 군사, 경제, 기독교에 정통하고 국제정세에 대한 시야를 넓히는 계기가 되었으며 로마 역사를 통해 국가와 민족의 분열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지도 알았을 것이다. (중략) 위선으로 가득한 로마 귀족들을 멀리해서인지 몰라도 아틸라는 그곳에서 마음이 맞는 친구를 사귀지 못했다.

 

아이티우스의 볼모생활이 끝나기 전에 아틸라가 '시기적절하게' 고향으로 돌아왔다. 둘은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의기 투합했다. 둘의 관계는 훈제국의 발전과 로마제국의 쇠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380~1쪽)

 

아틸라는 훈과 로마의 문화를 모두 계승한 인물이다. 그는 훈족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적절한 대책을 세웠다. 로마제국을 유지하는 대신에 훈의 경제를 지원하게 한 것이다. 군사적 재능이 뛰어나지 않았던 그는 강력한 훈족의 군사력을 배경으로 적당하게 위협을 가함으로써 얻을 것을 얻어내는 노회한 정치지도자였다.

 

"아틸라는 동로마의 조공 양을 더 늘리지는 않았다. 당시 동로마는 그 이상 조공을 마련할 수도 없는 형편인데다 자칫하면 정부가 해체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아틸라는 동로마를 훈제국의 금고로 삼을 뿐 무너뜨리고 싶지는 않았다. (중략) 동로마는 조공을 마련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각 원로들에게는 일정한 액수의 할당량이 주어졌는데 자신이 가진 재산보다도 높은 액수일 때가 많았다. 하지만 있든 없든 반드시 주어진 할당량을 채워야 했다." (397쪽)

 

아틸라를 암살하기 위한 동로마 제국 테오도시우스 2세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간다. 그가 어렵게 만들어 낸 자객은 아틸라에게 사실을 고하고 용서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런 역사가 당시 동행했던 역사가에 의해 기록되고 현재까지 남아 있다 하니 재미있다. 아틸라는 다시 로마제국을 용서했다. 이렇게 황제에게 말했다. 누가 야만인인가.

 

"로마의 황제가 명문가의 자제이듯 훈의 대왕 아틸라 역시 고귀한 핏줄을 타고 났다. 나는 내 아버지가 내게 물려준 존엄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로마 황제는 그 부모가 남기고 간 영예를 잃고 스스로 노예가 되기를 간청했다. 하늘의 운과 공적이 모두 아틸라에게 있으니 로마 황제는 마땅히 이 아틸라를 섬기되 자신의 주인을 해치는 사악한 노예가 되지 말라." (407쪽)

 

단물을 빨아 먹는다는 표현이 적절할 정도로 아틸라는 헝가리의 초원에서 로마와 갈리아를 통해 훈제국의 식구들을 배부르게 먹여 살리고 있었다. 비록 군사적 재능이 떨어져서 패배를 맛보기는 하지만 워낙 강력한 군사력이 그를 위대한 황제로 만들어 주었다. 물론 200년 전에 중원에서 쫓겨난 아시아의 패배자이기는 했지만 훈제국은 강력했다.

 

"카탈라우니아 전투에서의 패배는 아틸라의 체면을 조금 깎아내렸을 뿐 훈족의 날개를 꺾지는 못했다. 아틸라는 452년 봄에 다시 서로마로 출병했다. (중략) 아킬레이아를 포위했다. 아킬레이아는 아드리아 해역에서 가장 부유하고 번화한 상업도시로 인구가 20만명에 달하며 '북방의 로마'라고 (불리웠다. 중략) 3개월간 공격을 퍼부었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었고 (중략, 그러나 황새가 둥지를 떠나는 것을 보고) 성안에 먹을 거리가 없다는 것을 뜻했다. (중략) 아킬레이아를 함락한 후 아틸라는 토산을 쌓고는 훈제국의 초석을 다진 울딘에게 제사를 지냈다. 이곳은 울딘의 이름을 딴 우디네로 발전했다." (428~9쪽)

 

훈제국이 더 오랜동안 지속되었다면 감히 이런 생각도 할 수 없었을텐데, 로마인들은 구겨진 자존심을 회복하려고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신의 대리자라는 성직자들을 높이 받드는 일이니 더욱 열심히. 그러나 분명히 해 둘 것은 성직자는 성직을 수행하는 평범한 사람이지 성직에 잘 어울리는 진짜 성인은 아니다.

 

"전승에 따르면 레오 1세의 뛰어난 언변과 위엄 있는 표정, 화려한 주교복은 아틸라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중략) 레오가 성 베드로와 바울의 검을 들고 나타나 당장 군대를 철수시키지 않으면 아틸라의 머리를 베어버릴 것이라고 말하자 아틸라는 '신의 사자'에게 굴복당해 회군을 약속했다. (중략) 아틸라가 회군을 결심한 가장 큰 이유는 기후(이고, 중략) 말라리아까지 번지면서 전투력이 급속히 떨어졌다. (중략) 일라리크가 로마에 입성하고 나서 남하하는 길에 병사한 일이 미신처럼 전해오고 있어 아틸라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중략) 아틸라가 서로마에게 남긴 피해는 실로 엄청났다. (중략, 그나마) 그가 이탈리에에 남겨둔 선물이 있었으니 바로 베네치아였다. (중략) 이 베네치아 공화국이 살아남아 일부나마 로마의 전통과 문화가 계속 이어져올 수 있었다." (431~3쪽)

 

무력은 무엇일까. 강력하고도 무자비한 힘이 폭력으로 사용되어지는 것은 분명하게 경멸해야 한다. 그러나, 평화를 위해서는, 행사할 필요는 없지만, 실질적이고 강력한 군사력이 필요하다. 진시황 시절부터 시작해서 500년에 걸쳐 길러진 힘으로 100여년 동안 중앙아시아에서 유럽 대륙을 지배했던 훈제국. 너무나 강력했던 힘 때문에 스스로 팽창해야 했고, 로마제국을 무너뜨리고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하늘'이 지배하는 암흑의 봉건시대를 열었다. 적절히 소유하거나 적당하게 관리되지 않는 무력은, 자기 방어를 넘어 자기 파괴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아틸라는 무력 시위를 통한 로마제국의 복속을 원했지만 결국은 문명을 파괴하는 침략 전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유럽을 굴복시켰지만 스스로의 땅으로 물러나서 평화를 누리려던 그의 소망은 다 이루어지지 못했고, 평화로운 죽음만이 그의 진심에 보답했다. 그것도 새 신부를 맞이한 날 밤에.

 

"453년 여름 아틸라는 부르군트족 출신의 젊은 공주 일디코를 신부로 맞아들였다. (중략) 아틸라는 혼인을 치른 그날도 술이 거나하게 취해 잠이 들었다. (중략)아틸라가 술에 취한 후 침대에서 잠이 들었을 때 그의 코에서 선명한 피가 흘렀는데 그 피가 다시 목으로 들어가 그를 질식사하게 만들었다. (중략) 그대는 누구도 비할 수 없는 위대한 힘으로 스키타이 초원과 게르마니아를 다스리고 두 로마를 정복하여 무수한 도시를 지배했으며, 우리의 적을 우리에게 굴복시켰도다." (435~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