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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서재

포만감에 들뜬 탐욕스러운 시각과 떨리는 가슴이 만들어 내는 흥분_크로아티아 블루_151223

여행 스케줄은 매우 여유가 있다. 그래서 현지에서 발길 닫는 데로 한 달 동안의 여유를 즐기기로 했다. 잘 될지는 모르겠으나, 여행자의 마음을 버리고 한껏 게으름을 부려 보려고 한다. 왜. 이렇기 때문이다.

 

"크르크(Krk)에서 아침을 먹고 곧장 출발했는데도 센(Senj)을 지날 땐 이미 정오를 훌쩍 넘어섰다. (중략) 해지기 전 자다르(Zadar, 230km)에 도착하겠다는 계획은 이미 물 건너갔다. 수치상으로는 네 시간 정도의 거리지만, 자다르에서 두브로브니크(Dubrobnik)까지 이어지는 달마티아 해안에서 이런 단순한 셈법이 절대 통하지 않는다. 온대지방의 가장 아름다운 바다, 아드리아를 껴안고 달리는 이 길은 한 굽이 돌아설 때마다 멈춰서기 바쁘다." (167쪽)

 

아, 이런 여행을 하고 싶다. 터키의 시장 골목에서 만난 젊고 유쾌한 상인들, 이유없이 관심을 보여 준 주말르크즉의 어린 소녀, 그리고 아내를 쫓아 비를 맞으며 그린 모스크로 따라와 준 소년 등등. 과연 이번 여행에도 이런 오래 기억될 감동을 만날 수 있을까.

 

"소나무 밭 공터에는 어른들이 주먹만 한 쇠구슬로 구슬치기를 하고 있었다. 떠들썩한 인사로 여행자를 불러 세우고 음료수와 포도주를 권했다. (중략) 비비녜(Bibinje)는 장기 여행자들이 좋아하는 곳이라 했다. (중략, 크로아티아 사람들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는 프리모스텐에서) 마을을 거닐다 돌담에 곱게 핀 자줏빛 선인장 꽃에 마음이 묶이고 손이 간다. 그 돌담집의 사내는 꽃을 훔치는 나에게 타박 대산 향 짙은 커피를 건넨다.햇살이 부서는 그의 웃음이 선인장 꽃을 닮았고 목소리는 바다를 닮았다." (185~8쪽)

 

크로아티아는 비극의 땅이다. 아름다운 자연 경관과 고대 문명이 살아 있다고 해도 아픈 상처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 것이다. 그것을 생각해야 한다. 비극은 아무리 짧게 정리해도 길고 깊다.

 

"원래 아주머니네 가족은 두브로브니크에 살았고 그녀 위로 두 명의 오빠가 있었는데, 내전 중에 둘 다 세상을 떠났고 아주머니는 그 충격으로 다리를 절게 됐다고 했다." (218쪽)

 

여행이란 진짜 무엇일까. 현실을 피해서 안락을 위해 떠나는 것이다. 추구하는 모든 사욕을 채울 수 없어서 차라리 아무도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에서 제3자로서 또는 신에 준하는 높은 자리에서 가는 곳 모두와 모든 사람들을 평가하는 것이다. 누구도 상처받지 않는 그런 시공간을 여행이 제공해 준다.

 

"진짜 여행은 길을 잃어버리는 순간 시작되는 걸 알고 있으니까" (232쪽)

 

"GRATIAS AGO TIBI DOMINE QUIA FUI IN HOC MUNDO. 신이시여, 이 땅에 산다는 것에 감사드리나이다. 오미쉬(Omis) 마을의 작은 르네상스 궁전에 새겨진 글이다. 오미쉬가 어떤 곳인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앟아도 단박에 알 수 있는 말이다. 해변이 아름다운 두체(Duce)라는 마을에 멈춰서기 전에는 두체도, 오미쉬도, 전혀 알지 못했다. 특히 오미쉬처럼 아름다운 곳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게 오히려 신기할 따름이었다." (243쪽)

 

"만약 달마티아에서 머물고 싶은 곳을 꼽으라면 대답은 간단해진다. 마카르스카(Makarska)다. 우선 풍경만으로도 눈물 나게 감동적이고, (중략) 금방이라도 바다로 쏟아져 내릴 듯 아득한 비오코보(Biokovo) 돌산 절벽 아래, 육지가 마치 송이버섯처럼 바다로 튀어 나온 특이한 모양이다. 비오코보 산 정상까지 자동차로 오를 수 있어 이 멋진 광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253쪽)

 

"중세의 두브로브니크는 라구사(Ragusa)라는 이름의 독립국가로 (중략) 아드리아 해에서는 베네치아와 경쟁한 유일한 해상 무역 도시국가였지요. 13세기에 두브로브니크의 자랑인 두브로브니크 고성을 완성하고, 14세기부터는 해상무역을 통해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수준 높은 문화를 누렸습니다. 14세기에 세계 최초의 검역 병원과 지금도 운영되는 세계 최초의 약국이 문을 열었고, 양로원을 지었지요. 15세기에는 노예무역을 금하고 고아원을 지었습니다." (281~3쪽)

 

정말 여행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포만감에 들뜬 탐욕스러운 시각과 떨리는 가슴이 만들어 내는 흥분이다.

 

- 크로아티아 블루 / 글 사진 김랑 / 나무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