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을 테러방지법이 통과되는 일련의 과정을 보면서 매우 우울해졌다. 일본보다 작은 섬으로 갇혀진 대한민국은, 수많은 무고한 죽음들을 겪었는데도 여전히 섬의 전쟁을 그만두지 못하고 있다. 섬의 전쟁은 달아날 곳이 없어서 끔찍한 비극을 초래한다. 그래도 희망의 불씨라 한다면 더 이상 국회가 점잖은 정치인들의 격투기장이 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평화롭다. 할 말 있으면 며칠 동안이라도 다 하고, 그것을 들을 사람은 듣고 무시할 사람들은 무시하면서, 표결로 처리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민주주의의 성숙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비상사태를 임의로 이야기한 것처럼, 국가보안법의 방패인 테러방지법은 전쟁의 근거로서 미래의 역사에 자주자주 등장하게 될 것이다. 힘과 권력과 배경과 재산이 없는 가난한 시민들이 불행한 역사의 희생양이 되지 않기만을 간절히 기도한다. 배부르게 먹고 방귀나 뻥뻥 뀌어대면서 행복하게 농사짓고 살아야겠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구하지 못해서 한울빛 도서관을 배회하다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오디세이아를 들고 왔다. 엄청난 분량의 이 책을 과연 끝까지 읽어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오디세우스는 유혹과 위기를 극복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어찌된 일인지 환영받지 못한다. 그 이유는 전쟁 때문이다. 오디세우스가 일으킨 전쟁은 아니었지만 왕으로서 그 전쟁에 참여했고, 수많은 시민들을 전쟁터로 끌고 가 죽음을 맞이하게 했기 때문이다. 정치지도자는 시민들을 전쟁으로부터 보호해야지 전쟁 속에서 희생시킨다면 지도자의 자격을 얻지 못한다. 야만의 시대에 오디세우스는 위대한 왕이었지만 근대의 여명기에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눈에는 살인자에 다름 아니다.
"사람 잡는 전쟁에서 팔다리 잃고 눈멀고 불구된 (중략) 동지들이여, 우리들의 왕이 돌아왔는데 그의 몸은 다치지 않아 말짱하고, 두 손, 두 발, 두 눈, 약삭빠른 두뇌가 모두 온전하다. (중략) 횃불을 높이 들어 살인자들을 불태우고 오늘 밤 궁전을 불 질러 그 재를 사방에 뿌려라." (15쪽)
고향 땅에 돌아온 배고픈 오디세우스에게 가난한 농부가 물과 보리빵을 내밀면서 하는 말도 걸작이다. 어려움 속에서도 이런 지혜와 웃음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어야 진정한 자유인이다.
"게는 비록 가난하더라도 그의 굴에서는 왕이라오. 빵과 물과 선량한 마음은 그 왕의 선물입니다, 낯선 이여." (42쪽)
대지에 순응하는 영혼으로 평화롭게 사는 것을 추구하는 노인과 맷돌로 갈아도 고아지지 않는 날카로운 이성으로 운명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오디세우스의 논쟁은 이렇게 평화롭게 마무리된다. 모든 논쟁이 이렇게 마무리 될 수 있으면 세상은 평화로울 것이다. 논쟁과 표결의 결과가 자신의 재산과 권력과 헛된 명예에 좌지우지된다는 것을 잘 아는 현대인들은 이런 타협점을 찾지 못한다.
"빵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이 이렇게 빈약해서 미안하고, 나는 측정을 자주 하되 척도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중략) 나는 교묘히 양면을 유지해서 이쪽 입으로는 <그렇다> 저쪽 입으로는 <아니다>라고 한다오. 하지만 쓸데없는 얘기를 무엇하러 하나요? 세상의 모든 길은 훌륭하고 축복받았으며, 그대의 길도 거룩하니, 나는 그대의 지친 무릎에 존경의 입맞춤을 합니다." (44쪽)
먼 옛날 생산력의 가치는 오로지 농업에만 있었던 시절에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면 살았을 것이다. 이제는 뒷방 늙은이처럼 이따금씩 중요성이 제기되는 농업에서 누가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오디세우스의 아버지인 라에르테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오, 대지여, 아내여, 겸손한 여인처럼 나는 그대를 경작하고 나는 그대의 성실한 왕, 말 없는 형제들은 내 황소였고, 나는 그대의 반딧불이, 밤이면 그대의 숲에서 돌아다니며 내 빛나는 몸으로 빗물이 촉촉한 그대의 흙을 기쁘게 했노라. 빵을 주는 여인이여, 나는 그대 위를 지나가며 씨를 뿌리고 그대는 말없이 그 씨를 배 속에 받았고, 천천히 참을성 있게 우리들은 엎드려 첫 비가 내리기를 기다렸다. (중략) 나는 지쳤도다! 대지여, 나를 데리고 가되, 레테의 샘이나 버림받은 모래밭에 던져 버리지는 말 것이며, 나의 늙은 육신이 다시 젊어져 손자를 얻게 하여라!" (46~7쪽)
'사는이야기 > 서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작대전이라_중국인이야기 1권 (0) | 2016.03.24 |
---|---|
내 영혼을 뒤흔든 것은 자유에 대한 열망이었다_오디세이아 2 (0) | 2016.03.04 |
별 거지같은 여행기도 다있네_발칙한 유럽산책_160218, 목_C456 (0) | 2016.02.18 |
네 얼굴을 주의 깊게 바라보는 사람은 너 뿐이다_미움받을 용기_160215, 월 (0) | 2016.02.15 |
포만감에 들뜬 탐욕스러운 시각과 떨리는 가슴이 만들어 내는 흥분_크로아티아 블루_151223 (0) | 2015.12.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