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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농사 이야기

허리가 끊어지는 아픔도 견디며 산다_130927, 금

늦게까지 저렴한 비행기표를 구하려다 실패하고

잠이 깊이 들지 않아 뒤척거렸는데,

새벽에는 바닥에서 한기까지 올라와 무거운 몸으로 늦게 일어났다.

미역국에 밥 한 술 말아서 먹고 커피 한 잔을 마시니 정신이 돌아온다.


찰벼논으로 가서 마지막 피사리를 한다. 정말 마지막이다.

하늘은 아름답고 바람은 시원하다.

볏잎에 맺힌 이슬들이 차갑게 몸을 건드리는데도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불과 세 시간 만에 모든 작업이 끝났고,

지난 봄과 여름 동안 작은 몸으로 물을 뿜어 올리느라 애썼던

펌프까지 철수해 버렸더니 정말로 일이 끝난 기분이다.


김매기를 하는 동안에는 논에서 썩는 냄새가 나서 논에 들어가기가 싫었다.

김매기가 끝나고 벼를 포함해서 풀들까지 결실을 맺으니

온갖 향기로운 냄새가 나서 논에 들어가기도 좋다.

오랜 농부들이 흙에서 구수한 냄새가 난다고 했던 것은

아마도 가을 추수기에 느긋하게 벼들을 바라보며 맡았던 냄새가 아닐까 싶다.


정농께서는 논을 완전히 말리려면 논의 펌프를 돌려야 한다고 하시며

호스를 정리하느라 한 시간을 씨름하신다.

굳이 안 해도 되지만 내년 농사를 위해서 가을 갈이를 꼭 하고 싶어하시고,

그럴려면 논이 바싹 말라 있어야 한다.

안그러면 트랙터가 빠져서 논을 갈 수가 없다.


정말로 힘든 논일은 끝난 모양이다.

힘들지만 즐거운 추수만 남았다.


집으로 돌아와 여유있게 풀밭을 둘러 보는데,

철망 사이에서 늙은 오이가 허리가 졸린채 자라고 있다.


인생이 쉽다고 말하지 마라.

나는 허리가 끊어지는 아픔도 이기며 살고 있다.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 것 같다.



오후 작업은 고추밭 정리 작업.

고추대를 뽑아 이랑에 걸쳐 놓고 그 위에 신나게 자란 풀들을 뽑아 말려서

날 좋은 날에 불태우시겠단다.


고추나무를 매었던 줄을 걷어내고 철근 지주목도 드러낸 다음

이 넓은 밭의 풀을 언제 다 매나 걱정이 앞섰다.



기적이 일어났다.

놀랍게도 풀들은 손이 스치기만 해도 쑥쑥 뽑혀 올라온다.

지난 봄과 여름 동안 그렇게도 튼튼하게 뿌리를 내려서

호미질이 여러 번 들어가지 않고서는 뽑히지도 않던 풀들이었다.

기온이 떨어지자 몸을 움츠리며 힘을 쓰지 못한다.


신 났다.

쑥쑥 진도가 나간다.

이런 정도는 되어야 일할 맛이 나지.


풀들은 이미 씨앗을 사방에 흩뿌려 놓고 자신의 영역을 구축해 놓았을 것이다.

내년이면 후손들이 훨씬 번성하게 될테니

여읜 몸이 아무렇게나 뽑혀나가도 개의치 않는 모양이다.


내년에는 이랑에는 비닐 멀칭을 하고

고랑에는 부직포를 덮어야겠다.

왕겨로 덮어 놓았더니 첫 풀은 잘 넘어갔지만,

한 여름 왕성하게 커 나오는 풀들의 인해 전술은 이겨낼 수가 없었다.

왕겨 농법은 안된다.


항아리에 비친 코스모스의 그림자도 상쾌하고,

꽃 한 송이 제대로 보여주지 않은 목련나무의 이파리도 싱그럽다.


좋은 벗들과 술 한 잔 하고,

멀리 가족들에게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온다.

뭉개는 것 말고는 딱히 하는 일이 없는데도 처자식은 언제나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