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는이야기/농사 이야기

비오기 전에 피사리 하러 가자_130924, 수

비가 온다고 하더니, 흐리기만 하여 일하기 딱 좋은 날씨다. 

서둘러 아침밥 챙겨먹고 논으로 나갔는데도 벌써 8시다.


단풍이 빨갛게 물든 독새풀은 경치로 보면 아름다우나

작업해야 할 대상이니 시뻘겋게 무섭다.

정농께서 작업을 하셨다는 흑미논도 여전히 피가 무성해 보인다.


거의 삼 주 만에 논으로 다시 들어간다.

물이 빠져 있어서 걸어다니기는 편안한데,

벼포기 위를 뒤덮은 피와 독새풀을 걷어내려니 일은 더디다.


자연은 곡선이라고 가우디는 말했다.

그가 모방한 자연의 곡선은 일정한 패턴으로 재창조 되어 아름답게 정돈되어 있다.

자연은 곡선일 뿐만아니라 자유분방하다.

패턴이 없다.

농부에게 패턴없는 곡선은 작업하기 힘든 환경이 된다.

풀 한 포기도 두 번 세 번 꼬여 있으니 뿌리를 찾아 잘라내기가 어렵다.

논둑에 심어 둔 콩은 이리저리 엉켜서 베어낸 풀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게 한다.


무념무상.

한 포기 한 포기 잘라내고 던지고, 뽑아내고 옮긴다.


며칠 혼자 일 하셨던 정농께서는 기운이 나시는 모양이다.

12시가 다 되어 비가 제법 내리기 시작해서 일을 끝냈는데,

반나절 만에 일을 많이 했다고 기뻐하신다.

시뻘겋게 물들어 있던 논도 제법 구수한 황토색으로 변해 있다.


비가 오기에 정농께 택호 현판 글씨를 부탁 드렸다.

벌에게 먹일 설탕을 녹이는 사이에 글씨가 완성되었다.

멋진 글씨다.



친구에게 빌려온 조각칼과 망치로 글자를 파기 시작했다.

정농께서 심혈을 기울여 쓰신 글씨를 망칠까 온몸이 긴장된다.

제일 쉬운 정자의 절반을 팠는데 한 시간이 흘러버린다.

해가 져서 모기가 달라든다는 핑계로 작업 중단.

역시 쉬운 일은 없다.


그나저나 이렇게 파는 것이 맞나.

친구에게 물어봐야겠다.

그냥 글씨만 쓰고 니스칠 해서 걸어놓아도 될텐데,

더 멋있게 한다고 글자를 판다고 했다가 일을 만들었다.


사서 고생이다.


택호는 "정수무일재"

바른 농법으로 건강과 지혜가 샘처럼 흐르는 부지런한 집.


너무 거창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