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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사는 이야기

우리집 침대차_050312

1998년 3월이니 외환위기의 찬바람이 불던 시절이다. 서서히 망해가고 있던 대우그룹의 중앙연구소인 고등기술연구원에서 일하던 무일은, 대우자동차를 살리기 위해 차를 사자마자 또 차를 사야 하는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다행이 외환위기 직전에 극적으로 모든 빚을 다 갚아버려 흑자 생활을 하던 무일에게는 아직 2년도 안된 새차 르망을 헐값에 팔고 다시 새 차를 살만한 능력은 되었다. 게다가 무이자 할부에 매월 기름값까지 보존해 준다고 했다. 대우자동차가 살아야 대우그룹이 살고, 대우그룹이 살아야 행복한 직장이었던 연구소가 살아날 수 있었다. 물론 대우에 근무하던 모든 사람들의 착각이었다.





어쨋든 역량있는 동료들은 벌써 몇 대째 차를 팔고 있었으나, 무일은 그런 능력이 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스스로 차를 사야 했다. 그래도 과장이라는 직위를 가진 중간 관리자였는데, 직원들에게 차를 팔거나 사라고 강요할 수는 없었지만, 차 한 대 사달라는 회사의 호소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기왕에 사는 것 싸고 효율 좋으며 멋진 차를 사고 싶어서 고르고 골라 누비라 스패건을 샀다. 굉장히 멋진 차였다. 그리고 불과 3년 만에 대우그룹은 해체되고 2000년 말에 연구원을 떠나야 했다. 위기에 처한 연구소에 홍보업무를 맡고 있던 무일이 할 일은 없었다. 그래도 스패건은 남아 있었다.




2005년 3월 현재 스패건이 우리 차가 된 지 어느덧 9년째로 접어들고 있다. 이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남들은 차 바꿀 때 되었다고 이 차 저 차 기웃거리는 모양인데, 우리들은 아직도 우리 차보다 좋은 차를 보지 못해 고민하지 않는다. 우리 차의 겉모양이 멋있는가? 아니다. 그리미가 운전면허 따자마자 출퇴근한다고 끌고 다니면서 서 너 번의 사고를 냈는데, 대충 스프레이로 칠해 놓아서 여기 저기 보기 싫게 찌그러져 있는 볼 품 없는 차다. 그러면 왜?



우리 차는 누비라 스패건이다. 처음에는 다른 차에 비해 비싸지 않으면서도 외관 디자인이 중후해서 선택하게 되었다. 그런데, 차를 산지 한 달도 안 되어서 후회를 했다. 뒷문이 앞문과 함께 열리고 닫혀야 하는데, 따로 따로 놀아서 이만 저만 불편하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잘 아는 정비소에 가서 수리를 받았는데도 여전히 따로 노는 것이 생산하면서 발생한 근본 문제였던 모양이다. 화가 났지만 그냥 끌고 다니기로 했다. 정비소에 갈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소음도 문제였다. 뒤 트렁크가 좌석과 한 공간으로 연결되어 있다 보니 뒷바퀴에서 올라오는 소음이 그대로 실내로 전해지기 때문이었다. 이것도 아주 심각한 상황은 아니어서 그냥 참기로 했다.




그런데, 몇 개월을 불만 속에서 끌고 다니다가 우리 아이들이 이 차를 너무 좋아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우리는 충북 보은에 계시는 부모님을 찾아뵙기 위해 적어도 두 주에 한 번은 먼 여행을 해야 한다. 그때 우리 아이들은 교통 체증으로 꽉 막힌 도로를 가다서다를 반복하는 차 안에서 피곤에 지쳐 뒷좌석에 앉아 끄덕 끄덕 졸고 있어야 했다. 매번 이런 일이 반복되니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뒷좌석을 앞으로 눕히고 트렁크 공간까지 연결된 긴 바닥에 야외 돗자리를 깔았다. 조금 불편하지만 길게 누울 수 있었던 아이들은 편안히 잠을 잘 수 있었다. 그 때부터 우리 차는 침대차가 되었다. 아이들은 아무리 먼 곳을 여행해도 신나게 놀다가 졸리면 침대차를 만들어 편안하게 누워 잘 수 있는 우리 차가 가장 좋은 차라고 자랑하게 되었다.




한 번은 사는 집에 홍수가 나서 집이 잠길 뻔한 적이 있었다. 당황한 마음에 차에다 간단한 이불과 먹을 것을 싸들고 인근 학교 운동장으로 피신을 했다. 초등학교 강당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들어갔더니 썰렁하기 그지없고 많은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있어서 웅성거리고 시끄러워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생각다 못해 아이들을 다시 차로 데리고 와서 침대차를 만들고 히터를 살짝 틀어서 몸을 따뜻하게 해 주었다. 그리미와 아이들은 조용하고 따뜻하다고 좋아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무서운 바깥 경치를 느긋하게 바라보며 그날 밤 우리는 야영 나온 어린이들처럼 즐거워했다.




사촌 조카들과 함께 여행을 가면 모두들 우리 차를 타려고 한다. 일단, 실내 공간이 넓어서 시원하고, 아이들 여럿이 빙 둘러앉아서 놀이를 하면서 갈 수 있어 지루한 이동시간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야 아이들의 시끄러운 소음에 머리가 아프지만, 아이들의 즐거워하는 소리는 행복함을 가져다준다.


비록 외관은 찌그러져 있지만, 차량 운행에 관계되는 부품들을 나는 부지런히 바꿔 갈고 있다. 우리 가족의 즐거운 “침대차”를 좀 더 오래 타고 다닐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요즘 나오는 대부분의 차들은 엔진이 튼튼해서 10년 이상을 탈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단종된 지 5년 이상이 지나면 관련 부품들이 나오지를 않아 수리가 불가능해져서 어쩔 수없이 차를 바꿔야 한다고 한다. 이것은 자동차 회사에서 반드시 시정해야 할 일이다. 애정을 갖고 있는 차를 부품 때문에 고철 덩어리로 버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동차 회사들이 눈앞의 이익만을 쫓아 소비자로 하여금 자꾸 새로운 차를 사게 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길게 보아야 한다.


우리 집 침대차를 좀 더 개량해서 뒷좌석을 눕히면 별도로 매트리스를 깔지 않아도 편안하게 누울 수 있도록 개선한 차량이 나온다면 더욱 좋겠다. 그러면 우리도 새차로 바꿀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