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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농사 이야기

최후의 용사들_120808, 수

정농의 자기확신에 힘입어 다 죽어가는 고추나무에

계속해서 식초액을 뿌리기로 했다.

내 눈에는 거의 죽어가고 있는 고추나무들이

정농의 눈에는 탄저병을 이겨내고 있다고 한다.

허참,,,,


3-0으로 패배했다는 축구대표팀의 안타까운 소식을 뒤로 하고

고추밭에서 30kg의 등짐을 낑낑 져대고 있는데,

아, 저 멀리 북쪽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북풍이 온몸을 서늘하게 한다.


이제 가을이 오는 모양이다.


운동 삼아 시작한 30kg 지고 걷기를 3시간 만에 끝내고 논으로 갔다.

정농께서는 흑미논 피뽑기를 끝내시고 찰벼논 500평에서 피를 뽑고 계셨다.

무일은 메벼논 800평의 논가에 들러붙어 낫질과 피뽑기를 했다.

새벽과는 햇살이 다르다.


한 시간쯤 했더니 체온이 오르며 심장이 뛴다.

템포를 늦춰야 한다. 

한 줌 뽑고 하늘 한 번 보고,

또 한 줌 뽑고 하늘 한 번 보고,,,


도저히 안되겠다. 

'아버지, 철수요'




더위 때문에 일은 안하고 피서만 하면서도 죽어가고 있는 오리 농부들을

논에서 철수하기로 했다.

큰 논의 오리들은 전멸했다.

찰벼 논의 오리들은 13마리가 살았다. 10%만 살아 남았다.

죽음의 농사 두 달을 이겨낸 최후의 용사들이

경운기에 실려 집으로 향한다.


200개의 오리알을 부화장에 보내서

4주만에 135마의 새끼 오리들을 받아 왔고,

다시 3주 동안을 보일러실과 비닐하우스에서 키워

133마리의 오리 농부들을 맞이했다.

큰 논에 80마리 작은 논에 50마리를 넣어 두었을 때만 해도

가슴이 벅찼다. 농사가 잘 될 것 같았다.


작은 논의 오리 농부들은 정농을 잘 따랐다.

일을 하면 같이 하고, 먹을 것을 주면 고맙게 먹었다.

잠자리를 보아 주면 군소리 없이 들어와서 잠을 잤다.

마지막 더위만 아니었다면 거의 살아돌아올 수 있었다.

가카를 잘못 뽑아 하늘이 내리신 형벌을 오리 농부들이 대신 받았다.


큰 논의 오리들은 무리가 너무 컸던지 두 세 패로 나뉘어 독자 생활을 했다.

그 중 제일 작은 그룹은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해서

여름이 여물기도 전에 훨훨 대자연 속으로 도망쳐 버렸다.

그들의 시체를 보지 못했으니,

잎싹처럼 제 새끼를 키워내는 기쁨을 내년 봄에는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자유주의의 세례를 받아서인지 큰 논에 있는 다른 놈들도

왠만큼 기분이 내키지 않으면 일하려고 하지 않았다.

카메라를 들고 이리저리 몰아대야 겨우 일하는 시늉을 하거나

사료를 이곳저곳에 뿌려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먹는 시간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어야 했다.

헐, 사료값이 50만원이 넘었다.


가뭄도 지긋지긋해서 감자가 포도알 만큼 밖에 성장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딱 한 번 2, 3일 장마비가 내린 날.

자유주의자인 것처럼 보였지만 무정부주의자 임에 틀림없었던 일군의 오리들이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목이 터져라 '구구구구'를 외쳐 대었으나 허사였다.


다음 날 논둑과 벼포기 사이에는 20여 마리 남짓 무정부주의자들이

하늘이 내린 총탄에 맞아 저체온증으로 죽어 버렸다.


그 뒤로는 다시 뜨거운 폭염과 가뭄을 피해 그늘로 물로 몰려 다니던 녀석들은

지난 주말을 마지막으로 전부 몰살당하고 말았다.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삼일만 더 버텼으면 노동으로부터 해방을 맞이하였을텐데,

진득하지 못하고 섣불리 무정부주의와 극단적인 자유주의를 부르짖더니

결국 세상에 그들의 씨앗도 남기지 못하고 떠나 버린 것이다.


매일같이 이어지는 그들의 안타까운 주검을 어쩌지 못하여

지난 한 달 간 속만 썩이던 정농께서 오늘 철수명령을 내리셨다.

북풍이 불어 오고 있으니 최후의 전사들은 그들의 후손을 남길 수 있을 것이다.


한 여름 동안 참 애 많이 썻다.

수고했다. 오리농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