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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서재

꿰어보는 러시아와 중국_오강돈_230323

학교를 다닐 때처럼 매일 시간표를 짜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싶다. 왜 안되는 것일까? 학교 다닐 때 방학 생활을 생각해보면 답은 나온다. 외부의 강요에 의하지 않고서는 짜여진 시간표대로 살 수가 없다. 게으름 피우는 일이 1순위, 힘들지 않는 재미있는 일이 2순위, 힘들지만 재미있는 일이 3순위, 힘들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 4순위다. 보이지 않지만 강력한 신이 있어서 시간표를 짠 대로 나를 조종해 준다면 오히려 행복하지 않을까 하는 기분이 들 정도다.

 

1부 러시아와 중국, 제2세계의 갈등과 협력

 

1. 러시아가 차이나를 '키타이Китай'로 부르는 이유 : 거란이 중국대륙에 세운 '요'나라가 남긴 유산

 

china와 Китай로 불리우는 중국. 통일제국 진과 북방민족 최초의 제국 요를 세운 거란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거란은 몽골어로 '키단'이고 이것은 중국어로 치단이다. 유럽 일부 나라에서 중국을 부르는 이름 '키탄khitan'과 '캐세이cathay'도 이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중략) 중원의 관점에서 거란은 북방의 유목 소수민족(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런 거란이 북송을 무너뜨리고 요나라를 세운다).  요나라는 유목 민족이 중국에 정복 국가를 만든 최초의 역사다. (요나라의 5대 수도 중 하나인 남경은 지금의 베이징이다)" (17~8쪽)

 

2. 광활한 만주벌판과 연해주, 17세기 러시아와 청의 각축

 

조선 영조의 치세기에 표트르 1세(1689~1725)의 러시아는 유럽을 배우기 시작한다. 그의 몇 대 뒤를 이어 독일출신의 예카테리나 2세(1762~1796)가 정조의 치세기에 계몽주의 절대군주가 된다. 표트르가 즉위하는 해에 영국에서는 명예혁명이 성공하여 권리장전이 체택되고, 헤이룽장(아무르강) 위쪽의 평야지역을 차지하려던 러시아의 야욕은 청나라에 의해 좌절되고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평화를 정착시킨다. 그러나 200년이 지나자 2차 아편전쟁에서 패한 청나라는,  아무르강 북쪽 만이 아니라 우수리강 오른쪽의 연해주를 러시아에 내어줌으로써 태평양으로 나아가는 만주 통로를 잃어버리게 된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지금, 중국과 러시아는 시베리아 개발을 공동으로 추진하는 것은 물론이고 블라디보스톡 일대에서 군사훈련도 함께 하고 있다. 국제무대에서 영원한 적이나 친구는 없다.

 

중국 베이징에서 300km 떨어진 곳에 샨하이꽌山海关이 있다. 싱안링 산맥과 보하이만이 만나는 곳에 설치된 요새로 고대 중국의 무대로 진입하기 위한 관문이다. 동북과 만주가 시작되는 곳이고, 안중근 장군이 서거하신 뤼순 감옥이 있는 랴오뚱반도를 마주하고 있다. 

 

 

3. 간도로 건너간 사람들과 고려인, 조선족

 

백두산 천지는 3개의 강물의 근원이다. 동으로는 두만강, 서로는 압록강, 북으로는 쑹화강이다.

한국 록은 김태원(한국인), 중국 록은 최건(조선족), 러시아 록은 빅토르 최(고려인)가 이끌었다.

한민족의 디아스포라가 축복이 될 수 있는 것은, 지난 150여 년의 왜구와 봉건세력에 대한 지치지 않는 투쟁의 결과였다.

 

"해방 전까지 중국과 러시아 두 나라로 건너간 한반도 사람들은  대개 두 가지의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첫째는 독립운동을 위해서, 둘째는 고단한 생활고에 시달려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서이다.

러시아로 건너간 사람들은 사할린과 연해주에 살았다. 그러나 1937년 공산주의와 전체주의의 상징 스탈린은 유례가 드문 고려인 대이동을 명령했다. 주된 이유는 일본과의 전쟁이 예상되는 가운데 일본인과 구별이 어려운 고려인들이 첩자나 적군화할 수 있다는 염려였다. 또 변경 지방에 몰려 있는 고려인들의 숫자가 너무 커져서 독립을 요구하는 체제 불안 세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28~9쪽)

 

4. 소련과 중공을 함축하는 말

 

원조 : 소련은 사회주의의 원조다

원조 : 소련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원조했다

원조 : 중국과 소련은 북한을 원조했다.

 

5. 기나긴 국경선의 두 나라, 갈등과 협력

 

중국과 소련은, 중동과 인도-아프리카를 잇는 거대한 협력 지대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우크라이나를 이용한 대리전으로 만족할만한 성과를 거두고 있지만 중국은 아직 건드리지 못하고 있다. 한국을 통한 흠집내기를 하고 있지만 중국이 아니라 한국이 무너질 지경이다. 한국은, 중국-인도-아시아라는 거대시장을 바로 옆에 두고도 '안보 알거지 전략'을 취하고 있다.

 

중국과 소련도 바보같은 전철을 밟기는 했다. 덕분에 중국은, 소련을 대신해서 미국과 손잡고 G2로 올라섰으니, 장사는 역시 잘 한다. 러시아의 손을 잡고, 인도와 중동, 아프리카로 나아가는 중국의 기세가 대단해 보이면서도 작은 태풍에서 끝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자유와 민주주의 없이 생명력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우리의 앞날이 더 어두운 이유는, 기세도 없는 데다가 자유와 민주주의 마저 뭉개지고 있기 때문이다. 죽어 나가는 것은 가장 약한 30%일텐데, 알고 있기는 한 것일까?

 

"1953년 스탈린 사망 후 흐루쇼프 서기장은 중국에 대한 계속 지원을 약속했다. 한편으로 흐루쇼프는 스탈린 격하에 나섰다. 스탈린의 문제는 개인숭배와 철권통치라고 했다. 마오쩌둥은 소련의 이러한 움직임을 공산주의에 대한 심각한 수정주의라고 비판했다. 1950년대 말부터 중국-소련 관계는 긴장 상태로 치닫는다. 중국의 무기개발 관련 갈등도 있었다. 소련은 마오쩌둥의 중국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다. 중국에 가 있던 소련의 기술자들도 철수했다. 소련은 1962년 중국과 인도의 국경 충돌이 일어나자 인도의 편을 들고 인도를 지원했다. 심지어 중국과 소련 사이에 국경 분쟁으로 군사 충돌까지 있었다. (중략) 러시아와 중국이 공유해 왔던 이념, 정치, 군사의 역사와 미국 및 서방의 대척점에서 형성되는 동맹의 이익이다. (중략) 2010년대 이후 중국과 러시아의 관계는 견고했다. (중략) 권위주의와 전체주의다. 21세기의 황제와 차르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37~41쪽)

 

6. 고려인은 '몽둥이' 일본인은 '귀신같은 놈'

 

7. 러시아, 중국과 붙어 있는 한반도

 

앞으로 나라 이름은 러시아, 팡스, 도이치란드, 중궈라고 부른다. 한국에서 계속 왜구를 비롯한 사대주의 지식인이 양성되는 이유는, 문화와 지식의 종속이다. 하나씩 벗어나야 한다. 민주적은 민주의, 사회적은 사회의로 말한다. 적은 중국의 언어이다. 

 

"조선에서는 러시아를 ‘아라사’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중국어로 러시아는 아라사(俄罗斯)다. 중국에서 지금도 러시아는 아라사다.  (중략) 독일(独逸)은 일본식 한자 호칭이고, 중국에서는 덕국(德国, 더궈)이다. 불란서(佛兰西)는 일본식 한자 호칭이고 중국에서는 법(法国, 파궈)이다." (48쪽)

 

노태우 정부 이래 추진해 왔던 시베리아 가스관 연결 공사와 문재인 정부가 추진했던 남북철도연결 사업은 막막하게 되었다. 시베리아 가스관 사업은 중국 자본에 넘어갔고, 남북철도 연결은 커녕 전쟁이나 일어나지 않으면 다행인 상황이다. 충돌이 격해질수록 언제든 반전은 일어날 수 있지만,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책이 바뀌는 '허약한 신뢰'로는 장기 사업은 추진할 수가 없다. 살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한미안보조약이고, 먹고 살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시베리아 가스관과 남북 도로철도연결이라는 것에 대해 '대한국민들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일까?

 

"한국은 냉전 시기 소련 그리고 중공과 교역을 포함한 그 어떤교류도 대놓고 할 수가 없었다. 각각 철의 장막, 죽의 장막 건너편에 있던 두 나라와 한국은 1990년 한러수교, 1992년 한중수교를함으로써 비로소 상대방을 '시장과 소비자'로도 인식하게 되었다.더불어 동북아의 군사적 긴장과 그 완화를 담보로 '육로 연결 경제권 활성화'는 늘 정치 협상의 단골 주제가 되었다." (38~9쪽)

 

바다와 하늘 길은 열려 있으니, 이제 땅의 길을 뚫자.

 

"한반도와 러시아, 중궈가 만나는 세 모퉁이의 도시 혼춘에 가면 한국어, 러시아어, 중국어가 모두 통하고 세 가지 언어의 간판을 볼 수 있다." (50쪽)

 

8. 레닌, 마오쩌둥, 김일성, 호찌민의 시신에 방부제를 바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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