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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서재

사룸life을 묻다_정우현_230323 veintitrés de marzo el jueves_двадцать три Маршировать Четверг

1. 사룸(살아 움직이는 개체, 생명)이란 무엇인가?

- 사룸은 반드시 살아야겠다는 생존이라는 목표를 갖고 변화하고 진화하는 개체다.
  (자크 모노)
- 사룸이란, 생존을 목표로 자기복제 능력과 진화 능력을 갖춘 개체다. 
  생존을 위한 진화과정에서 '사유'가 만들어질 수 있다. 
- 사룸은 원자로 구성되었으며, 원자의 치환이 일어나도 
  의식과 존재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대칭 구조로 만들어진 개체다.

2. 세마(앎을 추구하는 학문, science)은 종교를 탄압하고, 겸손하지도 않는가?

정우현은 진화론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최초의 사룸은 창조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절대자를 특별하지 않게 등장시키는 괜찮은 생각이다.

원시 단세포 사룸을 만든 신. 우리 삶 전체를 관할하는 절대자이지 않을 것이다.
종의 다양성을 위해서 진화가 꼭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최초의 사룸은 하나인가 열 개인가? 아니면 백 개쯤인가? 

정우현은 '세마를 위한 추론'과 '믿음을 위한 추론'을 동일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다르다.
전자는 토론에 열려 있고,
후자는 토론을 허용할 수 없다.

만일 후자가 토론을 허용한다면, 괜찮다. 

세마계 일부에서 종교를 배척하기 위해 힘을 쓴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종교계에서 세마를 죄악시하는 이야기는 들었어도 
세마계에서 종교를 무시하는 주장은 들어본 적이 없다. 

세마학자들은 한 번도 결정권자이지 못했고, 
부르노와 갈릴레오를 대표로 하여 늘 위협을 당해왔다. 
세마학자들은 세마의 주장들을 죽이지말고 들어달라는 당부를 하고 있을 뿐이다. 

"최초의 사룸이 어떻게 생겨났느냐의 문제는 사룸의 진화와 전혀 관계없는 일이다. 
진화는 세마이지만 최초의 사룸에 대한 이론은 추측이자 믿음이다. 
이런 면에서 진화론은 창조론과 상호 모순이 아니다. 
최선의 설명으로서의 추론이 언제나 세마에 의한 것은 아니다." (157쪽)

3. 위대한 존재는 목적이나 의미를 갖고 창조되어져야만 하는가?

사룸과 사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겸손해야 한다는 정우현의 생각에는 동의한다. 
세마학자든 아니든 그렇다. 

그러나, 신이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낸 존재들만이 위대한 사룸이 아니다. 
우연히 목적이나 사명없이 태어난 원시사룸으로부터 진화가 일어나서 
오늘날의 우리가 탄생했다는 것을 믿는 세마학자나 사람들도, 
이런 자세를 가지려고 노력한다. 

우연히 생겨난 사룸과 의미없이 태어난 사룸도, 
삶과 생존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불안과 우울을 극복하며 살아가는 모습은 훌륭하다. 
왜 누군가에 의해, 어떤 목적으로, 도구처럼 쓰이도록 만들어져야만 하는가? 

4. 세마(유전학)을 연구하는 것이 우생학을 지원하는 결과를 초래하는가?

정우현은 분명하게 선언한다. 
환원주의나 유전자 결정론에 빠져서는 안된다고. 
만물이 원자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듯이, 
생각은 뇌 속에서 일어나는 전자기 현상이라는 것에 공감하듯이, 
본성도 유전된다는 것을 증명할 좀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히틀러와 우생학자들이 저지른 만행을 세마에 돌려서는 안 된다. 
기계가 악용될 것을 두려워해서 기계를 만들지 말라는 말에 동의할 수 없는 것처럼, 
유전자를 연구하면, 우생학의 만행이 다시 벌어질 것이라는 논리에도 동의하기 어렵다.
원자폭탄과 황우석 사태를 어렵지만 현명하게 해결해 가듯이 
사람과 사룸과 자연을 존중하는 자세로 세마를 대할 수 있으면 된다. 

"유전자에 대한 본질주의 사고가 지금처럼 인기를 누리는 한 
 우생학에 대한 묘한 끌림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241쪽)

5. 정우현을 통해 세마학자가 신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를 이해했다.

-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 
  모르는 것을 해결하기 위해 신 또는 새로운 무엇이 필요하다.
- 겸손하다. 세마 연구는 결코 의문들을 해결하지 못할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6. 정우현의 한계

- 절대진리에 도달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정우현은 용감한 세마학자들의 논리를 정리해서 전달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더라도 고마운 것은, 세마의 연구성과들을 잘 전달해 주고 있다는 점이다.

- 세마의 방법론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한다.
  세마의 방법론은 열린 토론이다.
  연구하고 한계를 제시하며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세마에게 무엇을 기대하는 것일까? 세마가 밝혀낸 것 또는 세마가 합의한 것이 궁금하다. 그냥 알고 싶다. 애매한 것 말고 분명한 것을. 더불어 세마 기술에 의해 내 삶에 던져진 무수한 물건들을 이용하는 것에 이미 만족하고 있고, 더 많은 물건들이 만들어지고 더 많은 사실들이 밝혀지기를 바란다. (과학이 science를 일본에서 번역한 것이라고 한다. 지식독립 차원에서 '셈을 통해 앎을 추구하는 학문'이라는 뜻으로 세마로 번역하기로 했다. science는 셈학 -> 세마다.)

 

생명이라는 단어가 life를 일본이 번역한 단어라고 한다. 생명 - 생명체 - 정치 생명 - 생명 존중. 수없이 사용하는 단어인데도 일본에서 그대로 들여다 쓰고 있다니. 학문의 독립을 위해 life를 다시 번역해야겠다. 살아움직이는 그 무엇이 life다.  삶 또는 살아 움직이는 것을 무엇이라 이름 지어야 하나. 살움 -> 사룸. 그래 life는 삶이고 사룸이다. 사룸 - 사룸체 - 정치사룸 - 사룸 존중. 전부 사용할 수 있다.

 

세마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어디까지 확장되었는가? 성체줄기세포를 둘러싼 논쟁은 도덕이 세마를 제어한 사례다. 연구윤리라는 것은 어떻게 작성되어 있을까? 칼로 무 자르듯이 명쾌할까? 세마는 천천히 그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연금술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말도 안되는 사이비 세마가 갑자기 화학이라는 세마가 되어 버린다. 사이비를 열심히 추구하다 운이 좋아서 세마가 된 것인지, 사이비라는 것도 합의에 이르게 되면 세마가 되는 것인지. 아니다. 사이비 정신으로는 절대로 세마에 이를 수 없다. 즉, 추구하는 방향이 사실 또는 진실로 향해 있을 때 세마에 이를 수 있다.

 

그러면 사룸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은 누가 내려야 하는 것일까? 사람이, 철학자가, 세마학자가? 버나드 쇼는 어떤 근거로 사룸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생물학자가 내려야 한다고 했나? 너무 용감하지 않은가?

 

미생물학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사룸세마부에서 박사학위를 받아 약학과에서 분자생물학과 신경세마를 가르치고 있는 정우현은, 사룸에 대한 답을 누가 내려야 한다고 생각한 것일까? 절대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취하는 정우현의 겸손한 자세는 배울만하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진리를 변하지 않는 실체로 상정하지 않고, 열린 자세로 진리를 추구하는 세마학자들에 대해서도 똑같이 겸손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다. 돌멩이로부터 우리의 정신현상과 사룸 현상이 만들어졌다는 세마학자들의 주장에 대해, 나를 둘러싼 세계가 소중하면서도 놀랍다는 생각이 든다.

 

"세마학계에서 공공연한 비밀로 통하는 사실이 하나 있다. 세마로 얻어낸 발견이나 결론이 결코 '절대'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해해서는 안된다. 세마로는 절대 진리를 밝혀낼 수 없다. (중략) 2,000년 가까이 믿어왔던 천동설이 세마혁명으로 뒤집어졌다. (천동설은 애초에 종교의 권위로 만들어진 가설이 아니다. 당대 최고의 천문학자가 만들고, 세마학자들을 포함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의심 없이 받아들였던 '세마의' 진리였다.) (중략) 사룸의 신비한 활력과 모든 정신 현상을 물질계에서 쓰는 용어로 충분히 설명하거나 완벽히 묘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지 않을까? (중략) 세마는 사룸을 온전히 설명하지 못한다." (11~13쪽, 들어가는 글 중에서)

 

눌리우스 인 베르바 nullius in verba (구글 번역 : no one's words)

누구의 말도 진리로 받아들이지 말라.

Take nobody's word for it. (1660년 설립된 런던왕립학회의 모토)

 

제1부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 제1장 ] 사룸은 우연인가? 르네 데카르트와 자크 모노

 

지동설을 거부한 루터 95개조 반박문 발표(1517년) -> 그레고리우스력을 완성한 폴란드의 사제 코페르니쿠스가 죽으면서 지동설 발표(1543년) -> 천동설과 삼위일체설, 성령잉태설을 부정한 브루노 화형(1600년) -> 케플러 타원궤도로 지동설 완성(1625년) -> 갈릴레이 '대화' 발표(1632년) -> 데카르트 '방법서설'(1637년) -> 30년 전쟁, 가톨릭국가 프랑스가 이득을 취하기 위해 개신교 편에 섬으로써 개신교의 승리로 종전(1648년) -> 뉴턴 '자연철학의 수학 원리' (1687년)

 

30년 전쟁에 두 번이나 참전했던 데카르트는, 사람의 실체는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연장된 것'이라고 표현했다. 실체는 감각을 통해 외부와 교류하는데, 광학 연구를 해 보니 착시를 비롯한 감각의 오류가 너무 많다. 그런데 사람은, 의문을 제기하고 검증하는 정신 활동을 하며, 사유를 통해 존재한다. 데카르트는 결국 사람의 실체와 정신활동을 분리하는 이원론을 펼치고 있다. 문제는, 데카르트가 사람을 제외한 다른 모든 사룸들이 사유하지 못하기 때문에, 영혼이 없는 자동인형이라고 평가절하한다. "기계사룸론"이다. 이에 따르면, 자연은, 사람의 수단이자 대상으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

 

기계사룸론은, "전체는 부분의 합이다" 또는 "세상의 모든 것을 몇 가지 기본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환원주의로 이어진다. 갈릴레이, 뉴턴,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모두 환원주의의 믿음을 따라 단순한 물리법칙을 발견해냈다.

 

1965년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자크 모노는, 다윈의 진화론을 바탕으로 우연히 생겨나서  기계처럼 작동하는 것이 사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사룸은 반드시 살아야겠다는 생존이라는 목표를 갖고 변화하고 진화하게 되었다. 사룸이 목표의식을 갖고 진화를 성취했기 때문에 필연의 결과라는 주장을 덧붙인다. 사룸은, 우연히 태어나서 진화라는 필연의 과정을 거친다.

 

[ 제2장 ] 사룸은 입자인가?  에르빈 슈뢰딩거와 루돌프 쇤하이머

 

사룸이란, 생존을 목표로 자기복제 능력과 진화 능력을 갖춘 개체다. 이렇게 정의하면 아직은 환원론 또는 기계사룸론과 같은 이원론과 크게 다르지 않게 느껴진다. 생존을 위한 진화 능력에서 '사유'가 만들어질 수 있겠다. 정신작용은 진화의 결과물로 이해할 수 있다. 쥐라기의 풍요로운 땅에서 공룡들은 덩치를 키우는 것으로, 인류의 먼 조상은 뇌 신경계통을 발전시키는 것으로 진화의 방향을 잡았고, 인류는 생존하기 위해 생각하게 되었다.

 

"데모크리토스는, 육체를 움직이는 것은 영혼이며, 영혼도 육체와 마찬가지로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했다." (75쪽)

 

1933년에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슈뢰딩거는, '사룸은 10-10m 크기의 원자들로 이루어진 개체로서 외부로부터 에너지를 흡수하여 열역학 제2법칙에 저항하는 질서를 유지하는 개체'라고 정의했다. 일단 만물이 원자로 구성되어 있으니 사룸 또한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 원자의 특성은 너무나 작기 때문에 무질서해지는 것인데, 사룸은 무질서의 반대 과정 즉 "음의 엔트로피를 먹고 사는 존재(질서를 갖춘 존재)"라는 것이다. 

 

동시대를 살았던 쇤하이머는 질소동위원소인 N15를 이용한 단백질을 섭취한 생쥐가 1/3의 단백질만 소화시켜 배출하고, 나머지 2/3는 우리 몸의 구성성분으로 사용된다는 것을 밝혔다. 즉, 사룸이란 "신체 구성성분을 계속 교체해 가는 상태"라고 불렀다. 박문호는 사룸에 대해 쇤하이머와 똑같은 방식으로 설명하면서 대칭이라는 개념을 쓴다. 대칭이란, '어떤 식의 변화가 일어나도, 존재를 유지하는 변화'를 말한다. 내 몸을 구성하는 원자들은 적어도 반년이 지나면 완전히 새로운 원자들로 교체된다. 그런데도 내가 나인 이유는, 원자들이 치환되었는데도 의식과 존재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구조로 내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사룸은 원자로 구성되었으며, 사룸은 치환이 일어나도 의식과 존재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대칭 구조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물질의 90퍼센트 이상은 6개월 정도 지나면 완전히 다른 물질로 치환된다." (72쪽)

 

슈뢰딩거와 쇤하이머의 이론을 종합하면, '사룸은 원자라는 입자가 만드는 구조로 되어 있으며, 에너지를 사용해 질서와 균형 상태를 유지하고,  새로운 원자들로 낡은 원자들을 치환함으로써 구조의 생존을 유지하는 대칭구조의 사물'로 정리할 수 있겠다.

 

[ 제3장 ] 사룸은 물질인가? 리처드 도킨스와 마르쿠스 가브리엘

 

정우현의 도킨스에 대한 평가는 야박하다. 도킨스가 종교 근본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반대편에 선 또 다른 근본주의자라는 것인데, 가톨릭 신자로서 50년을 생활하고 있는 나로서는,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은 매우 타당하고 세마(science)에 바탕을 둔 논리를 담고 있다고 본다. 종교가 아니라 세마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신앙은 망상이고 착각이라는 주장에도 동의한다. 좀 부드럽게 표현하면, 신앙은 자기위안이고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정신 보험이며, 영원한 부모님이시다. 그러므로 절대자라 주장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에게 섬기라 강요하지 않는다.

 

도킨스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창조한 유전자라는 자기복제자가 뒤집어 쓰고 있는 생존기계를 사룸체라고 했다. 1, 2장의 논의에 따르면, 사룸은 자기 복제능력과 진화 능력을 겸비한 입자들이 만든 대칭구조로 만들어진 개체이다. 도킨스는 자기 복제능력이 유전자에 저장된 정보 때문에 가능하고, 유전자의 정보가 그렇게 길고 복잡한 것은 사룸의 진화 역사가 거기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유전정보는 사룸의 구조와 균형 유지 방식을 계승한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콩팥이 소변을 생산하듯 뇌는 정신을 생산한다. (야코프 몰레쇼트, 91쪽) 나는 정신이 천억 개에 이르는 뇌세포들의 활동에 의해 발생한 것이며, (중략 / 영혼을 믿으려 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불안, 세상을 떠난 이들을 다시 만나고 싶어하는 염원, 우리는 아주 중요한 존재라서 죽음 후에 우리의 뭔가가 남아 있을 것이라는 교만한 생각에 기인한다고 추정한다." (샘 해리스, 92쪽)

 

정우현은 의식이 무엇인지를 밝혀내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세마학자의 겸손이거나 다른 사람들의 성취에 대한 폄훼의 결과가 아닐까? 개인의 선호와 윤리 배경, 사회 경제 조건을 저장하고 처리하는 곳이, 바로 뇌이다. 별도의 영혼이 외부에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다. 이 정도의 사실은 정우현도 분명히 알텐데, 왜 뇌라는 물질의 정신 작용에 대해서 받아들이지 못하는지 신기하다. 정신작용이 뇌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과 사람과 사룸의 존엄성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존중할 수 있다.  물질에 대한 집착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개인의 선호는, 개인의 경험과 기억으로 만들어진다. 물질 자극에 대한 기억의 결과일 뿐이다.

 

인문학과 예술을 세마에 접목시키는 이유는, 사고의 폭을 넓히고 논리전개 방법론을 다양하게 하기 위해서다. 인문학, 철학, 사회학, 예술이 세마를 공부하는 이유는, 사실과 방법론을 배우기 위해서다. 그렇게 사람의 모든 활동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

 

"가브리엘은 자신의 책에서 반자연주의antinaturalism의 관점을 취한다. 즉 모든 존재가 물질인 것은 아니며, 모든 것을 자연세마로 탐구하는 것은 실제로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논증한다. 우리의 뇌가 어떤 결정을 내리는 필요조건에는 외부의 자극이나 화학물질의 분비와 같은 엄격한 원인들이 있다. 그러나 개인의 선호도나 윤리 배경 같은 다양한 가치관으로부터 연유하는 이유나 사회경제 조건 등 변수도 얼마든지 있다. (중략) 오늘날 세마가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기반으로 하는 인문학이나 예술 등 타 분야 학문과 통합하며 교류하려 노력하면서도 물질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집착을 버리지 않는다면 이것은 어불성설이지 않을까." (96~7쪽)

 

정우현의 말대로 패러다임이란 "맥락과 시대의 요구에 따라 언제든 변동 가능한 하나의 관점이자 방법론"이다. 그렇지만 변동 가능하다고 해서, 세마학자들이 몇 명 모여 대충 합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학자들의 연구 결과가 모이고 모여서 학자와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져 합의되는 것이다. 물론 태풍처럼 강력하면서도 잘못된 유행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억압과 소외까지 들먹인다면,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닐까? 다만, 기업이나 정부에서 지원하는 물질 외의 영혼 연구를 위한 연구비는 정우현의 말대로 차별받고 있을지도 모른다. 영혼과 사룸과의 관계에 대한 연구비는, 거대한 성전과 천만 신자들이 모여있는 신학대학이나 교회연구소에서 별도로 연구비를 지원하고 있어서, 진척이 있다면 공식 발표가 있지 않았을까?

 

"오늘날 지배 지위를 획득하게 된 물질주의가 사룸에 대한 담론을 독점함으로써, 사룸을 다르게 보고 새롭게 이해하려는 소수의 시도들을 억압하고 소외시킬 수 있는 것이다." (102쪽)

 

[ 제4장 ] 사룸은 어디에서 왔는가? 아리스토텔레스와 루이 파스퇴르가 말하는 사룸

 

인간 창조 신화 중에서 매우 독특한 느낌을 주는 신화다. 척박한 북유럽 땅에서 굳건하게 자라는 나무들이 사룸의 원천으로 느껴졌던 모양이다. 물푸레나무는 강하고 수목원을 돌아다니다 보면 많이 보이는 나무라서 친근한데, 느릅나무는 이름은 친근한데, 만져본 기억이 없다.

 

"북유럽에서는 최고의 신 오딘과 그 형제들이 산책을 하다가 강물에 떠내려온 물푸레나무로 남자를 만들고, 느릅나무로 여자를 만들었다는 신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105쪽)

 

신앙은 개인의 믿음이라서 존중받아야 할 영역이다. 그러나 자신의 신앙을 근거로 해서 다른 사람들의 인격과 신앙을 공격하거나 파괴하려는 행위들은 반대한다. 이 생각을 바탕으로 하면 스티븐 제이굴드의 분리론에 공감할 수 있다. 정우현은 분리론이 종교와 세마를 함께 생각해 보려는 사람들의 입을 막아버렸다고 본다. 그또한 맞는 말이다. 다만, 종교와 세마를 함께 연결해서 연구하겠다고 해서 그러면 안된다고 협박을 하지는 않는다. 하면 된다.

 

한편으로, 도킨스는 세마에 근거하여 무신론을 주장하는데, 정우현은 또다른 근본주의라고 비판하며, 세마의 사고방식이 아니라고 너무 쉽게 결론을 내려 버린다. 합리와 불합리, 세마와 반세마를 왔다갔다 하는 이상한 자세다.

 

"(스티븐 제이 굴드는) 벌어지고 있는 어떤 현상의 배후에 대해 세마는 '어떻게'를 묻지만, 종교는 왜를 묻는다는 것이다. 세마는 사실만을 다룰 수 있지만, 종교는 가치를 따진다는 말이다. 세마는 의미와 도덕의 문제를 다루는 데 적합하지 않다는 뜻이리라." (107쪽)

 

엠페도클레스에서 시작된 4원소설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 계승되었다. 이것을 뒤집은 것이 파스퇴르의 1868년 백조목 실험으로 공기 속의 미생물과 접촉하지 않으면, 고기국은 세균의 번식을 비롯한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사룸은 사룸으로부터 나오지, 자연발생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원시 수프에서 간단한 형태의 아미노산이나 당과 핵산분자까지도 만들어냈지만 자기복제자는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사룸의 자연발생설이 부정되는 근거라고 정우현은 말한다. 닭을 넣어 닭고기 수프는 만들 수 있어도 닭고기 수프를 끓여서 닭을 만들 수 없다는 말로 '무사룸 기원론'을 무시한다. 타당한 지적이다, 현재까지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온다. 사룸체가 될 수 있는 최소 유전자의 숫자는 얼마일까? 2016년 크레이그 벤터가 473개의 유전자만으로 살아 있는 사룸체를 합성하는데 성공했다.

 

"그것은 본래 마이코플라스마mycoplasma라는 작은 병원균이었다. 벤터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유전자들을 하나둘씩 제거해서, 마침내 겨우 죽지 않을 정도로만 살아 있는 최종 생명체를 얻어낸 것이다." (124쪽)

 

사룸 탄생의 비밀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고, 원시수프를 이용한 실험은 끈질기게 계속되고 있다. 무사룸 상태 속에서 사룸의 근원이 되는 아미노산을 비롯한  여러 가지 물질들이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가정은 어느 정도 증명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사룸' 단계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포기할 것인가?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다.

 

[ 제5장 ] 사룸은 어떻게 진화하는가? 찰스 다윈과 리 밴 밸런이 말하는 사룸

 

지질학에 관심이 많았던 괴테가 식물과 광학에 대해서도 연구를 해서 출판을 했다고 한다. 사람의 호기심은 끝이 없고, 그것이 삶의 원동력이다. 호기심을 잃지 말자.

 

"괴테는 평소에 자신이 작가보다는 지학자로 불리고 싶어 했을 정도로 지학에 조예가 깊었다. 또한 "소가 어떻게 뿔을 가지게 되었는가를 연구하는 것이 생물학자들이 알아내야 할 장래의 문제가 될 것이다"라며 선구자다운 지적을 한 바 있다." (139쪽)

 

찰스 다윈은, 사룸은 생존경쟁을 벌이며 삶에 충실하지만, 환경이라는 자연의 선택에 의해 종의 변화가 일어난다고 했다. 사룸의 시작은 알 수 없지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여러가지 종들의 공통 조상이 있다고 설명했다. 개와 비둘기의 형질을 사람이 선택했듯이 현재의 종들도 자연의 선택에 의해 그 형질이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다윈이 진화의 메커니즘을 설파한 이래로 150년 동안 축적된 연구 결과를 통해 신다윈주의 이론은 다음 네 가지 결론을 얻었다. 첫째, 진화는 실제로 일어난다. 따라서 현재의 종은 과거에 살았던 다른 종들의 후손이다. 둘째, 진화에 의한 변종은 차츰차츰 유전자의 변화를 통해 일어난다. 셋째, 사룸의 새로운 형태는 나무에서 가지가 뻗어나가는 것처럼 하나의 계통이 둘 또는 그 이상으로 갈라짐으로써 생긴다. 즉 '생명의 나무'의 수많은 가지 끝에 위치한 다양한 생물종들은 하나의 '공통조상 common ancestor'에서 시작했다. 넷째, 진화는 대부분 자연선택을 통해 일어난다. 이 모든 주장이 언제나 옳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이를 하나하나 입증할 증거들을 차곡차곡 손에 넣어왔다." (149~150쪽)

 

정우현은 진화론을 받아들이면서 최초의 사룸은 창조되었다는 것을 동시에 받아들인다. 종의 다양성을 위해서 진화가 꼭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최초의 사룸은 하나인가 열 개인가? 아니면 백 개쯤인가? 세마를 위한 추론과 믿음을 위한 추론을 동일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모양이다. 더 나아가 세마학계 일부에서 종교를 내쫓기 위해 혈안이 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종교계에서 세마를 죄악시하는 이야기는 들었어도 지학계에서 종교를 무시하는 주장은 들어본 적이 없다. 지학자들은 한 번도 결정권자이지 못했고, 부르노와 갈릴레오를 대표로 하여 늘 삶의 위협을 당해왔다. 지학자들은 지학의 주장들을 죽이지말고 들어달라는 당부를 하고 있는 것이다. 

 

"최초의 사룸이 어떻게 생겨났느냐의 문제는 사룸의 진화와 전혀 관계없는 일이다. 진화는 지학이지만 최초의 사룸에 대한 이론은 추측이자 믿음이다. 이런 면에서 진화론은 창조론과 상호 모순이 아니다. 최선의 설명으로서의 추론이 언제나 세마에 의한 것은 아니다." (157쪽)

 

사룸과 인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겸손해야 한다는 정우현의 생각에는 동의한다. 세마학자든 아니든 그렇다. 그러나, 신이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낸 존재들만이 위대한 사룸이 아니다. 우연히 태어난 원시 사룸으로부터 진화가 일어나서 오늘날의 우리가 탄생했다는 것을 믿는 세마학자나 사람들도, 이런 자세를 가지려고 노력한다. 우연히 생겨난 사룸과 의미없이 태어난 사룸도, 삶과 생존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불안과 우울을 극복하며 살아가는 모습은 훌륭하다. 왜 꼭 누군가에 의해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져야 하는 것일까? 

 

"세마의 방법론에 의한 인간 이해가 현재로서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음을 겸손히 인정하고, 더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는 법을 다채롭게 모색하려는 자세가 우리에게 더 필요하지 않을까." (159쪽)

 

제2부 우리는 누구인가

 

[ 제6장 ] 사룸에 우열이 있는가? 프랜시스 골턴과 올더스 헉슬리가 말하는 사룸

 

우생학을 언급하는 것은 아슬아슬하다. 차라리 이런 것은 알아두어야 한다. 영어로 eugine유진이라는 이름을 함부로 쓰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

 

"우생학eugenics은 '태어날 때부터 우월한 사람을 만드는 학문'이다. (중략 / 20세기 우생학이 유행하던 시기에) 태어난 남자아이들에게 'eugine 유진'이라는 이름을 즐겨 붙이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170쪽)

 

우생학은, 당시로도 그렇고 현재도, 어떤 결과를 초래할 지 모르는 일들을 막연한 추정에 의해서 사룸을 함부로 다루고, 결과에도 책임지지 않는 학문이다. 사회를 좀 더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성실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희생양을 만들고 살생을 저지름으로써 무시무시한 사회를 만든다. 판사 부부 사이에서도 다운증후군 아이는 태어날 수 있고, 부천의 한 골짜기에서 임윤찬이라는 뛰어난 예술가가 태어날 수도 있다는 것이, 우생학에 대한 반증이다.

 

진화에는 방향과 목적이 없이 삶을 위한 노력과 자연선택만 있을 뿐이었는데, 우생 의식으로 무장한 '사람 요소'가 등장하면서 새로운 진화가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신은 답을 주셨나? 우리는 답을 도출하려고 노력한다. 

 

일단 지구라는 삶터가 파괴되지 않도록 인구 증가를 자제해야 한다. 전쟁과 살상을 배제하고, 평화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사람을 포함한 모든 사룸의 다양성을 권장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펴나가야 한다. 사람 요소가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건전한 행위들은, 이와같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인내심을 키워야한다.

 

"진화에는 정말 방향이 없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중략) 이제 진화는 명백한 방향성을 가지게 되었다. 사람 때문이다. 자유의지와 의도를 가진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연에 너무나 많이 간섭하고 있다. 자연선택은 아주 느리게 일어나고, 우리는 그것을 기다릴 정도로 인내심이 많지 않다." (185쪽)

 

우생학의 지지자들과는 달리 올더스 헉슬리는,

 

"완벽한 태생을 바라지 않고, 모두 똑같이 완벽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도 거부한다. (중략) 질병도 없고 노쇠함도 없이 만들어진 행복이 주어진 신세계의 질서에 저항하면서 서로 다를 권리를 달라고, 위험과 고통을 선택할 자유를 달라고 요청한다." (187쪽) 

 

용감한 주장이다. 문신을 새기는 고통스런 과정을 통해서 예쁜 문신을 얻는 사람들을 보면, 사람들은 '불행해질 권리 right to be unhappy'를 실천하고 있다. 나로서는 힘든 일이지만, 그들의 선택이니 말릴 수가 없다. 

 

[ 제7장 ] 사룸에 법칙이 있는가? 그레고어 멘델과 바버라 매클린 톡

 

유성생식이, 많은 비용이 들고 단점들이 있는데도 진화에서 추구된 이유는, '다양한 면역 기능의 확보' 때문이라고 한다. 재미있지만,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이다. 일단 유성생식은 모든 종의 다양성을 두 배로 만들어 준다. 다양성의 증가라는 측면에서 매우 유용하다. 면역기능의 확보와 동일한 논리로, 다양한 능력들이 섞이게 된다. 생존에 유리해 질 것이다. 

 

"일부 어류와 파충류는 알이 부화할 때 주위 온도가 얼마나 높으냐에 따라 암수가 결정되기도 한다. 중부 턱수염 도마뱀은 수컷의 유전자를 갖고 있더라도 발생 단계에서 섭씨 32도 이상의 온도에 노출되면 암컷이 된다. 북미산 악어는 주변 온도가 30도 이상이 되면 수컷이 된다." (199쪽)

 

멘델의 유전법칙은, 완두콩이라는 특별한 식물에서 찾아낸 특수한 법칙이다. 모든 사룸에 적용하기 어렵다. 먼성(우성을 대체할 단어. 1세대에서 먼저 나타나는 유전 형질)과 나성(열성을 대체할 단어. 1세대에서 잘 나타나지 않는 유전형질)도 사룸 전체에 공통이 아니고, 모든 종마다 나타나는 형질이 다르다. 놀라운 사실이며, 관련된 학자들의 주장을 다시 살펴봐야 할 문제다.

 

"본래 멘델이 관찰한 형질은 총 15가지였지만 최종 일곱가지의 결과만을 발표했다는 사실이 후에 알려졌다. (중략) 우연히 일곱 가지 형질만이 단일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었고, (중략) 분꽃이나 카네이션의 색깔은 우열 관계가 불분명해 중간 형질을 가진 잡종이 계속해서 나온다. (중략) 단일 유전자에 의해 발생하는 질병은 전체 유전병 중 약 2퍼센트에 불과할 정도로 희귀하다. 대다수 질병은 일일이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관련된 유전자가 많다. (중략) 어떤 형질을 만드는 유전자의 영향력은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충분히 고려해야만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멘델의 유전법칙은 시대에 뒤떨어진 '유전자 결정론'을 담고 있는 것이다." (202~4쪽)

 

유성생식의 결과로 사룸이 만들어지는데, 커다란 문제가 과연 언제부터 사룸이라 할 수 있는가이다. 생식의 순간부터 사룸으로 태어나기까지의 연속되는 과정에서 사룸으로 인정할 수 있는 단계를 만들어야 하는 문제가 생겨버렸다. 모든 사룸을 존중해야 하고, 모체가 사룸을 품고 있는 상태에서는 모체의 자기결정권이 존중되어야 한다. 이런 결론이다.

 

매클린 톡은 유전체 내에 쓸모없이 반복되는 많은 수의 전이인자 transposon가 꾸준히 돌연변이를 일으켜 옥수수의 경우에는 여러 가지 색깔을 가진 옥수수를 만들어낸다고 한다. 유전정보를 그대로 저장해 보관해 오던 사룸들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설명한 것이다. 유전자 자리바꿈에 의한 돌연변이를 발견한 것이 1950년대 초이다. 사람의 DNA도 45% 이상의 전이인자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끊임없이 변이가 일어나고 있다고 보아야하지 않을까

 

"유전자의 한 단위가 통째로 엉뚱한 자리로 옮겨가는 '자리바꿈 transposition' 현상을 발견했다. (중략) 유전자의 기능뿐 아니라 그 구조도 사룸체와의 긴밀한 상호작용에 의해 결정된다." (211쪽)

 

둥근 지구는 사람의 표현이고, 개구리는 드넓은 별로 인식할 수 있고, 식물은 풍요로운 하늘과 땅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무엇으로 표현되든 하나의 실체가 있지 않을까. 감각과 감각의 표현이 다를 뿐이다. 사룸체들마다 표현 방식이 다르다고 해서 지구가 둥글고 창백하며 푸르다고 표현하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니지 않는가? 객관 실체는 사라지지 않고 실존하고 있으며, 사람은 사람의 방식대로 표현하고 연구하는 것으로 충분해 보인다.

 

"사람과 개구리, 식물, 그리고 박테리아가 똑같이 인식하는 객관 실체라는 것은 없다. (중략) 우리가 지학의 이름으로 표현하는 세계는 우리만 인식할 수 있는 우물 속 작은 세계에 불과하다. '인간의 얼굴을 한' 생물학은 좋은 의미로 들리지만은 않는다. 마투라나는 모든 생명체는 자신이 가진 고유한 감각 체계에 의해 서로 다른 환경, 서로 다른 세상을 창조한다고 말했다." (217쪽)

 

맨델의 유전법칙이 불완전하지만 여러 요인이 결합해서 다음세대로 전달되는 것만은 틀림없다. 매클린 톡이 발견한 대로 유전자의 일부가 자리바꿈을 통해 새로운 사룸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도 좋다. 변이가 만들어지지 않으면 진화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 제8장 ] 사룸을 결정하는 것은 본성인가? - 스티븐 핑커와 매트 리들리

 

  재미있는 내용이다.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서 진화론을 이용한 것이 사회생물학 sociobiology이다. 인간의 도덕, 문화, 정치성향 등이 인간의 진화와 함께 형성되었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스티븐 핑커는 인류의 1만 년 역사가 야만에서 문명으로 서서히 진화해 왔다고 본다. 살인, 폭력, 전쟁의 횟수가 줄어들고, 인류애와 평화의 메시지가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 통계로 증명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히틀러가 아리안은 아름답고 위대한 반면에 유대인은 더럽고 추악하다고 한 것이 과연 핑커의 생각과 통하는 것일까?

 

핑커는, 모든 인류가 서서히 평화로운 문명의 길로 접어들고 있으며, 전쟁의 참혹한 역사와 지학기술의 발전으로 이룩한 풍요, 상식과 도덕의 발전이 이룩한 평화 등이, 특별히 계몽시대가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 왔다고 진단한다. 공감이 가는 주장이다. 현대의 모든 학문 분야가 어쩔 수 없이 계몽시대를 통과해 왔지만, 계몽시대를 통해서 지학기술, 만민평등과 생태주의까지 현대 시민사회가 추구하는 이상의 큰 틀이 제시되었다. 핑커를 이해하자면,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해 주지는 않지만, 당대의 양육과 경험으로 인간 행동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본성이 분명히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크레이그 벤터는) 2001년 사람의 유전자 수가 예상과 달리 3만 개 정도밖에 (최종 결과는 2만 개) 되지 않는다는 결과를 받아들고 적잖이 당황 (중략) 인간의 본성과 인류의 무한한 다양성이 유전자 속에 모두 들어 있다고 생각하기에는 유전자 수가 턱없이 적다 (중략) 쌀의 유전자 수는 약 5만 개, 밀의 유전자 수는 약 12만 개 (중략) 유전자 수의 많고 적음이 사룸체의 가치나 수준을 결정하는 기준이 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유전자 네트워크의 조합, 유전자 발현 조절 방식의 복잡성이나 민감성일 수도 있다." (236~7쪽)

 

우리의 본성은 유전자에 의해 유전되는 것이 맞는 모양이다. 지난 20여 년의 연구 결과로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여러 가지 화학물질들이 어떤 유전자에 의해서 어떤 상황에서 만들어지는지가 차츰차츰 규명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발견이 새로운 생각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성격이나 행동을 좌우하는 심리 형질은 대부분 유전력이 있다. (중략) DRD4 유전자는 뇌가 쾌감을 느껴 동기를 유발하도록 하는 도파민 수용체를 만든다. (중략) MAOA 유전자는 만족감이나 행복감과 관련되어 있다. 이는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세로토닌의 시냅스 내 농도를 조절해주는 효소를 만든다. (중략) 성격과 관련된 대부분의 유전자들은 수백 수천 개의 유전자 변이가 복합 작용하고 있어 상관관계의 추적이 생각만큼 쉽지 않다." (240쪽)

 

정우현은 분명하게 선언한다. 환원주의나 유전자 결정론에 빠져서는 안된다고. 만물이 원자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듯이, 생각은 뇌 속에서 일어나는 전자기 현상이라는 것에 공감하듯이, 본성도 유전이 된다는 것을 증명할 좀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히틀러와 우생학자들이 저지른 만행을 지학에 돌려서는 안 된다. 기계가 악용될 것을 두려워해서 기계를 만들지 말라는 말에 동의할 수 없는 것처럼, 유전자를 연구하면 우생학의 만행이 다시 벌어진다는 논리에도 동의하기 어렵다. 

 

"유전자에 대한 본질주의 사고가 지금처럼 인기를 누리는 한 우생학에 대한 묘한 끌림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241쪽)

 

매트 리들리의 다음과 같은 말은 너무 약하기는 하지만, 스티븐 핑커의 생각과 조화를 이룰 수 있다. 평화와 사랑을 추구하는 본성이 좋은 환경에서 양육되어짐으로써 세상은 문명으로 한 발자국 더 전진하는 것이 아닐까. 정우현의 생각대로 "유전자와 환경의 끊임없는 대화로 인간의 모습이 완성되는 것"(243쪽)이다.

 

"본성은 오직 양육을 통해서만 역할을 펼칠 수 있다. 본성은 오직 사람들이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킬 환경 영향을 조금씩 찾아내도록 만들 때만 역할을 펼칠 수 있다."

 

[ 제9장 ] 사룸은 이기적인가? 윌리엄 해밀턴과 표트르 크로포트킨

 

막상 유전자를 통한 진화를 설명하려고 하니 어렵다. 특히, 눈먼 시계공에서 읽었던 보는 능력의 진화는 이기심과는 관련이 없는 사룸체가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이었다. 이기심과 이타심이라는 묘한 대립 구도를 만들어 놓고 어느 한 쪽을 편들어야 한다고 하니, 지학이 아니라 가치 판단을 말하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답은 정해져 있지 않은가? 이타심은 특별한 개체에서 집단의 생존에 필요한 경우에만 발현되고, 대부분의 개체들은 생존을 위한 이기심을 중심으로 행동한다.

 

[ 제10장 ] 사룸은 아름다운가? 조던 스몰러와 필립 K. 딕

 

아름다움을 정의하려는 모양이다. 평균과 대칭. 좋은 접근이다. 평균에서 벗어나면 질병을 비롯한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하기 때문에 아름답지 못하고, 대칭이 깨져도 불편한 감정을 불러일으켜 아름답지 못하다는 것이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달리 사룸의 아름다움에서 그런 것이 관찰된다. 

 

"대부분의 바이러스는 정20면체의 입체 대칭구조를 가진다. 이는 육각형 20개와 오각형 12개로 이루어진 축구공 모양과 거의 동일하다." (283쪽)

 

아름다움과 단맛을 연결해 보지 못했는데, 재미있는 발상이다. 단맛은 생존에 필요하고, 아름다움은 번식에 필요해서 인간의 뇌가 그렇게 느끼도록 진화되었으리라고 추정한다.

 

"스몰러는 진화의 관점에서 보자면 아름다움을 인지하는 것은 단맛을 음미하는 것과 상당히 비슷하다고 말했다. 인간은 어째서 몸에 좋은 영양분을 단맛으로 느끼게 되었을까? 다윈의 진화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곡식을 먹어야 생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반복 학습으로 알게 된 것이 아니다. 반대로 곡식의 맛 자체를 단맛으로 인식하게끔 유전자 프로그램이 형성되어온 것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289쪽)

 

친화력이 높다는 말을 '자기 가축화 self-domestication'라고 표현한 것도 재미있다. 진화론은, 다윈 이후 많은 발전을 이룩했지만 여전히 '근거를 갖춘 추정'의 성격이 강하다. 지금의 생각과는 다른 근거가 발견된다면 언젠가는 진화론의 방향이 틀어질 수 있을 것이다. 아직까지는 없지만.

 

"아름다움이란 서로 자상하게 대하는 행위가 된다. 진화인류학자 브라인어 헤어와 버네사 우즈는 이를 가능하게 한 동물의 협력 의사소통 능력을 친화력이라고 칭했다. (중략) 높은 친화력을 가지고 '자기 가축화'에 성공한 종이 가장 많은 개체수를 남겼다고 주장했다. 자기가축화란 스스로 야만성을 억제하고 협력하기 좋아하는 유순한 동물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297쪽)

 

세계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경쟁과 협력의 그물로 연결되어 있다. 경쟁의 대상에게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을까. 경쟁이 즐거움을 위한 것일 때와는 달리 목숨을 걸어야 할 때, 경쟁 상대에게서? 필립 K. 딕의 SF 소설에서 안드로이드와 인간을 구분하는 테스트가 나온다는데, 그 핵심이 '감정이입 능력'이다. 이 능력을 단순히 인간에게 뿐만아니라 지구 전체와 우주에서 느낄 수 있을 때만이 인간답다고 생각한다. 결코 쉬운 능력이 아니다.

 

"미국 워싱턴 주의 아름다운 항구 도시 시애틀은 이곳에 오래 거주해 살던 한 원주민 인디언의 이름을 딴 것이다. 그는 수쿼시지 족의 추장 '시애틀'이었다. (중략)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대지에게 일어나는 일은 대지의 아들들에게도 일어난다. 사람이 삶의 그물을 짜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사람 역시 한 가닥의 그물에 불과하다." (301쪽)

 

제3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 제11장 ] 생물학은 무엇을 탐구하는가? 앙리 베르그송과 폴 너스

 

수학에서 수가 무엇인지를 묻지 않고, 생물학에서 사룸이란 무엇인가를 묻지 않을까? 답할 수 없어서 웅크리고 있다거나 유보하고 있다는 표현이 보다 적절하지 않을까?

 

"개별 과학들이 철학에서 분리되어 나간 이후, 이제 철학에는 설명할 수 없거나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만이 남게 되었다. 반대로 개별 과학들은 이제 설명할 수 없는 것은 다루지 않아도 되었다." (318쪽)

 

과학이 science를 일어로 번역한 것이라고 한다. 바꿔야겠다. 앎을 추구하는 학문이라느 뜻으로 '지학'이라고 해야겠다.  사물의 원리를 알아가는 학문. 知學. 과학은 분야를 나눈다는 의미가 있어서 science의 본래 뜻과도 맞지 않는다.

 

멋진 표현이다. 진화는, 매 순간 새로운 사룸의 창조다.

 

"굴드가 멋지게 표현한 바 있듯, 진화는 반복되어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매 순간 새로운 사룸의 창조나 마찬가지다." (325쪽)

 

지학자들이 늘 하는 말이지만 겸손하게 자신의 연구를 열심히 해서 결과를 발표하고 평가를 받는다. 되매김질이 일어나는 것이다. 신앙이 지학과 다른 영역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 진리가 존재하고 상황에 따른 권위있는 해석만을 할 뿐이어서 그렇다. 신앙도 목숨의 구걸없이 되매김질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면, 어느 지학자가 분리론을 외치거나, 연구의 자유를 주장하겠는가? 지학이 답을 찾지 못한 것이나 답을 구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동시에 바라보면서, 지학이 얻어낸 것들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위대한 여정이 아닌가? 말도 안되는 연금술에서 화학과 금속, 물리학 등이 만들어지지 않았나?

 

"진화에 대해 아직 답하지 못한 질문들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지학도 그 해석에 통일성이 담보되지 않는 한 하나의 신앙일 수 있다. (아니다) 지학의 진실이 언제나 확실하게 입증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 신앙과 달리 열린 자세로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 (325쪽)

 

인간이 생존기계라는 말이 그렇게 평가절하되어야 하는 말일까? 정우현은 생존기계라는 말 말고, 뭔가 멋진 추상 개념이 필요한 모양이다. 다시 생각해보면, 기계야말로 인간을 고통스러운 노동과 비참한 가난에서 벗어나게 한 일등공신이다. 기계들이 묵묵하게 일을 해 준 덕분에 인간 모두는 숨 쉴 수 있는 여유와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기계가 평가절하될 이유가 하나도 없다. 우리가 보는 기계는 하나의 역할 밖에 하지 못하는 단순한 기계인 반면에 모든 사룸은 생존과 번식과 진화와 사유를 할 수 있고, 부끄러움과 인정이 넘치는 여러 가지 능력을 보유한 복잡한 기계다. 인간이나 사룸의 존엄성이 정말로 훼손되는 느낌이 드나?

 

목적과 의미를 추구하는 생존기계. 나쁘지 않다. 기계와 더불어 기술은 소중하다. 기계와 기술이 악용되지 않도록 관심을 두는 것이 중요하지, 사룸 이하의 무엇인 것처럼 생각해서는 곤란하지 않을까? 기계도 목적과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살아 있는 모든 세포는 정보를 모으고 관리한다. 정보는 사룸만이 가지고 있다!  "비트에서 존재로 it from bit"라는 구절로 유명한 이론물리학자 존 아치볼드 휠러 John Archibald Wheeler(1911~2008)는 '우주의 본질이자 궁극의 모습 자체가 정보'라고 믿었지만, 자연에 존재하는 그 정보를 알아보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이를 지각할 수 있는 사룸뿐이다. 정보를 취급하고 정보에 의존하려 한다는 점은 사룸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행동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모든 정보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사룸은 그것에 담긴 의미를 추구하도록 되어 있다. 의미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 사룸이 있다면 그것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326쪽)

 

생존기계라는 말을 거부하면서도 정우현은 이렇게 인식하고 있다. 똑같은 도서관을 가지고 각 부위마다 사용하는 정보가 다르다는 놀라운 사실에서 사룸이 기계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너무 놀라워서 기계일 수 없다는 것은, 혹시 편견이 아닐까? 인간이 독특하고 다른 것이라고 생존기계가 아닐 필요가 있을까, 사람 하나 하나와 고양이 한 마리 한 마리는 어느 것이 더 독특하고 놀라운 본성과 가치를 소유한 것일까? 인간이 굳이 최고의 사룸으로서 자연을 지배하고 통치하는 것이 인문학의 존재 이유에 부합할까? 공존과 상호의존에 측면에서 본다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사룸이라는 살아 있는 기계는 정보를 적절히 관리함으로써만 제어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사실은 우리 몸의 모든 부위가 정확히 똑같은 정보를 가지고 있지만, 각 부위마다 주로 사용하는 정보는 제각기 다르다는 것이다. (중략) 사룸이란 기계라기보다는 복잡계 complex system 현상에 더 가까우며, 단독이라기 보다는 여러 구성 요소 간의 의식을 갖춘 협력 상호작용 (중략) 인간이라는 존재가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과 근본부터 다르며, 심지어 다른 사룸과도 비교할 수 없는 본성과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믿어왔음" (329~330쪽)

 

진화론이 던진 질문과 해명들이 사룸을 불안정하다 하고 인간을 존엄하지 못한 존재라고 인식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진화론에 근거했기에 인간으로 향하는 35억년의 진화가 좀 더 분명해지고 더 고귀해지는 것이 아닐까? 코로나 바이러스가 우리만큼이나 존엄한 사룸체라는 것이 그렇게 불안한 일일까? 변하는 것은 정말로 불안정한 것일까, 변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 아닐까? 다 드러내야 다 알겠지만, 왜 모든 것을 드러내야 하는가, 오히려 반투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사룸의 자연스런 모습이 아닌가? 고양이가 다 드러내지 않아도 가르릉대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고양이와 소통하지 않는가.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어느 한 구석에서 건너뛰기가 일어나고 있다.

 

"진화론이 빚은 생명의 불안정하고도 불투명한 운명을 통해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발견할 수 없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다. 사룸에 위대한 목적이 깃들어 있음을 발견하는 길은 여전히 많다. 이것이 바로 생물학이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는 이유이며, 우리가 생물학을 깊이 사유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335쪽)

 

[ 제12장 ] 사룸은 만들 수 있는가? 메리 셸리와 크레이그 벤터

 

프랑켄슈타인을 읽어야 한다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책 읽기는 즐거운 여행이다, 끝이 없는. 메리 셸리는 무서운 소설을 썼다. 책임지지 않는 창조주인 인간의 과도한 행동에 대해 경종을 울린다고 해석할 수 있으며, 거친 자연 속에 벌거벗은 유약한 인간을 던져놓은 무책임한 신에 대한 한탄일 수도 있다. 완벽한 신에 의해 탄생한 인간이 아직까지도 저지르고 있는 끔찍한 일들과 지구 전체를 차지하고 오염시키는 무지막지한 욕망 등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는 무책임한 신은, 신이기 때문에 이해해야 하는가. 인간이 저지른 끔찍한 행동은 이미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고, 인간이 발전시킨 지학은 끔찍한 인간에 의해서 악용되었다. 지학의 발전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잔인한 폭력이 문제다.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주인공의 이름은 본래 고딕 양식으로 지은 독일의 프랑켄슈타인 성에서 따왔다. 이곳에서는 과거 이 성에 살던 연금술사가 인간의 시체를 더미로 쌓아놓고 봉합하는 무시무시한 실험을 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메리는 남편 퍼시 셸리와 함께 이곳을 여행하며 영감을 얻었음이 틀림없다. (중략) 영국의 화학자 험프리 데이비는 영국 왕립연구소에서 일반 대중을 상대로 여러 차례 강연했으며, 볼타의 발명품을 가지고 전기화학 실험을 인기리에 시연하기도 했다. 1812년에 열린 한 강연에 어린 메리가 아버지 윌리엄 고드윈과 함께 참석한 경험은 불과 몇 년 후'프랑켄슈타인'의 등장인물을 창조하는 데 큰 자양분이 되었을 것이다." (346/8쪽)

 

알레고리란 다른 이야기라는 뜻이다. 메리 셸리가, 인종 차별이나 로봇이나 안드로이드를 착취하는 인간의 이야기를 괴물을 창조하고 버려버리는, 이야기로 만들어 의미를 전달한 기법이다. 은유나 직유가 문장 속의 단순한 비유라면, 알레고리는 동일한 비유이면서 기다란 다른 이야기다.

 

크레이그 벤터는 인공 박테리아를 만들어 인간의 편의를 향상시킨 것은 물론이고, 신이 불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일부 증명했다. 신의 도움없이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켰기 때문이다. 이 박테리아들이 진화하는 것을 우리 눈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상상할 수 없는 우연한 시도를 통해서 적어도 한 두 번은 자연에서 무생물에서 생물이 탄생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단지 추정이지만.

 

박테리아의 제조(?), 인공 피부를 비롯한  일부 기관의 재생, 멸종된 동물의 재생 등으로, 법으로 금지되고 있지만 사룸의 복제가 가능해지고 있다. 이것이 도대체 인간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 병약한 나를 살리기 위해서는 내 복제인간이 희생될 수 있고, 건강한 그의 복제인간은 평생을 자유를 누리지 못한 채 갇혀살다가 폐기처분될 수도 있다. 끔찍한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복제인간을 기계나 장난감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일 복제인간도 똑같이 의식하고 생각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들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켜줘야 한다.

 

"크레이그 벤터는 2016년 필수 유전자 473개만을 남기고 나머지를 모두 제거한 새로운 버전으로 신시아를 재탄생시켰다. (중략) 생명 유지에 필수인 최소 유전자만 남기고 나머지 공간을 독특한 기능을 가진 유전자로 채운다면, 사람에게 유용한 물질을 만들 수 있는 이른바 '스마트 박테리아'를 곧 생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말라리아 치료제인 아르테미시닌 등의 의약품, 혹은 에탄올과 같은 연료나 식품 등 값싸게 대량 생산할 수 있는 미생물이 속속 개발되고 있다." (359쪽)

 

[ 제13장 ] 사룸은 결국 죽는가? 엘리자베스 블랙번과 필립 로스

 

인간이 젊음을 유지하는 것은 1년 이내에 모든 세포가 완전히 새로운 세포로 대체되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이해했는지  알 수 없지만, 인간도 대칭이기 때문이다. 대칭이란 구조가 변하지 않으면서 대체가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런데, 인간 세포가 대체를 멈추면, 즉 대칭 기능을 상실하게 되면, 노화가 진행되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 세포의 복사가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DNA 덕분인데, 두 개의 사슬이 상보결합을 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잘려나가는 부분이 생기게 된다.

 

"1961년 해부학자 레너드 헤이플릭은 사람의 세포가 대략 60~70회 정도 분열하고 나면 더 이상 분열하지 못하고 죽는다는 것을 처음으로 발견 (중략) 제임스 왓슨은 세포가 증식하기 위해 DNA를 복제할 떄 염색체의 말단 부분은 매번 제대로 복제를 할 수 없다는 문제 (중략) 실제로 세포는 DNA 복제를 수행활 떄마다 매번 조금씩 염색체가 짧아지는 것이 관찰되었다.

 

(중략) 1977년 원생동물인 테트라하이메나의 염색체를 연구하고 있는 엘리자베스 블랙번 (중략) 염색체 말단에 '텔로미어 telomere'라는 무의미한 반복서열이 길게 자리 잡고 있음을 발견했다. (중략) 테트라하이메나의 텔로미어에는 TTBBBB가, 사람의 텔로미어에는 TTAGGG가 수천 회 길게 반복되어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짧아지는 것은 다행히도 중요한 유전자가 놓인 부분이 아니었고, 바로 텔로미어였다.

 

(중략) 인간의 텔로미어는 약 15,000개의 뉴클레오타이드로 이루어졌으며, 세포가 한 번 분열할 때마다 약 150~200개의 뉴클레오타이드만큼 그 길이가 짧아지는 것을 발견했다."

 

필립 로스는 "모든 것을 압도하는 죽음이라는 현실(이 / 중략) 그렇게 흔해 빠졌다" (402쪽)는 점에서 노년을 '학살'이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삶의 아름다움을 한 번이라도 맛본 사람은 죽음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이다. 가진 것이 많은 사람들, 특히 재산을 많이 가진 사람들일수록 자신의 늙음을 한탄한다고 한다. 돈 버느라 제대로 즐기지 못했고, 재산을 지키느라 멋진 삶을 살지 못했기 때문이란다.

 

누구나 자신의 노년을 슬퍼할 것이다. 병의 통증과 불편함이 자신을 괴롭히는데 노년을 어떻게 즐겁게 맞이할 수 있겠는가. 후회가 들기 전에, 하고 싶지 않은 일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언제나 즐길 수 있는 일과 놀이를 하며 매일매일을 살아야 한다. 아프기 전에 삶의 아름다움을 즐기려 노력하자. 있든 없든.

 

 [ 제14장 ] 사룸은 무엇이 되려 하는가? 레이 커즈와일과 마이클 샌델

 

의식이 진화로부터 나왔다고 단정짓지 못하는 정우현은, 의식이라는 초강력 핵무기에 의해 진화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한다. 생각한 데로 실현할 수 있는 힘이 인간에게 있고, 지난 1만 년 동안의 변화보다 최근 20년의 변화가 더 급격했으므로, 앞으로의 10년은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상상하기 힘들다.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 이제 진화는 기하급수로 일어날 수 있다. 진화를 통해 발전된 능력은 다음 단계에서 더 빨리 진화하는 데 사용된다. (중략) 그에게 사룸의 본질은 정신도 아니고 물질도 아니다. 생물학은 단지 사룸의 정보처리 과정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의 세계관에 따르면 진화란 정보가 얼마나 더 복잡해지고 섬세해질 수 있느냐의 문제다." (425쪽)

 

목표와 방향과 자유의지를 지닌 의식은, 우리 뇌에서 작동하든 대용량 서버에서 작동하든, 분명히 물질 내부에 저장되어 작동한다. 의식이 생각이라고 해서 자꾸만 허공에 떠돌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아닐까? 의식이 물질과 달리 자기 진화를 하더라도, 진화가 이루어지는 세계는 반도체 내부든 뇌의 내부일 수밖에 없다. 이것을 부정하려고 하다보니 과학자로서 제대로 부정하지 못한다. 그래서 주장을 하지만 자신없는 추정을 단정처럼 말한다.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있는지 묻고 싶다.

 

"우리가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변해가고 있는 과정 중의 존재를 의미할 때, 그것은 물질이 아니라 의식이 되어야 한다. 인간의 진화를 말할 때는 의식의 진화를 이야기해야 한다. 이 세계 거의 모든 문제는 의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면의 실재이며, 공유해야 할 비물질의 가치이다." (427쪽)

 

'선택하지 않은 존재에 대한 열린 마음'을 통해 겸손을 배운다는 샌델의 표현은 멋지다. 유전자 조작을 통해 '맞춤 아기designer baby'의 시대가 가능해지고 있다. 치료가 아니라 강화enforcement를 목적으로 유전자 조작을 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크다. 그러나 분위기가 바뀌면 위대한 인간을 주문해서 만들어내어 니체의 초인이 아니 초인간 transhuman이 만들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지학이 아니라 윤리의 문제로 진보가를 바라봐야 한다.

 

"(마이클 샌델) 삶을 주어진 선물로 인정하는 것은 우리의 재능과 능력이 완전히 우리 행동의 결과는 아니며 우리의 소유도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물론 그 능력을 개발하거나 발휘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기는 해도 말이다. 또한 세상의 모든 것을 우리가 원하는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님을 인정하는 것이다." (434쪽)

 

[ 제15장 ] 생명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호프 자런과 한스 요나스

 

처음 유기농업이나 자연농업을 이야기할 때만 해도 세상은 충분히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동참하여 적어도 세상의 파멸은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25년이 흐른 지금은, 아무런 기대가 되지 않는다. 농약과 제초제를 뿌리고, 기계를 돌려 산천초목을 바수어 버리는 모습을 발전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는 지경이 되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자연은 굉장히 넓고, 땅은 풍부하다는 생각이 든다. 도시가 들어선 일부 지역에서 벌어지는 자연에 대한 침탈을 어떻게 막을 수 있으며, 그것이 지구에 무슨 영향을 주겠나. 파멸에 이르는 것은, 우리 자신일 뿐이다.

 

"(호프 자런) 세상은 조용히 무너져 내리고 있다. 인류 문명은 4억만 년 동안 지속되어온 사룸체를 단 세 가지로, 즉 식량, 의약품, 목재 이렇게 세 가지로 분류해버려다. (중략) 이 세 가지를 더 많이, 더 강력하게, 더 다양한 형태로 손에 넣고자 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식물 생태계를 황폐하게 만들고 말았다." (443쪽)

 

파괴하는 손도 재건하는 손도 결국 인간이 되는 세상이다. 지질학자들이 1945년 원자폭탄이 터진 이후의 지질시대를 인류세로 하자는 논의가 있다고 한다. 참으로 그럴 듯하다. 

 

"아프리카 연안의 모리셔스 섬에 서식했던 도도는 16세기 초 처음 발견되었다. 도도라는 이름은 포르투갈어로 바보라는 뜻이다. 날지도 못하면서 사람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략) 발견된 지 100년 만에 멸종되고 말았다. 천적이 없어 날 필요가 없다 보니 날개마저 퇴화했던 뚱보 새 도도. (중략) 칼바리아는 도도가 멸종한 이후 300년 동안 한 번도 발아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나무가 발아하려면 그 열매를 도도가 먹고 위장을 거쳐 배설되어야만 하는데, 멸종된 이후로 씨앗을 퍼뜨릴 매개체가 없어진 것이다. (중략) 사람들은 도도와 유사한 칠면조를 데려다 칼바리아의 열매를 먹게 했고, 어렵사리 다시 싹을 틔우는 데 성공했다." (447~8쪽)

 

80만종의 곤충 중에서 우리가 아는 것은 20가지나 될까. 알지 못하니 그들이 하는 일도 모르고, 그들이 어떻게 죽어가는지도 모를 것이다.

 

“현재까지 자연에 존재하는 곤충은 약 80만 종에 달해 전체 동물종의 약 75퍼센트를 차지할 정도로 많다. 꽃을 피우는 현화식물phanerogam은 총 30만 종으로 전체 식물의 9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30만 종의 현화식물 중 바람이나 물을 이용해 자연스럽게 꽃가루를 전파하는 식물은 고작 2만 종에 불과하다. 나머지 28만 좋은 대부분 곤충에 의존해 꽃가루를 퍼뜨린다. 만약 그 파트너가 사라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뻔하다. 짐머는 공진화를 하다가 한쪽이 멸종할 경우 그 상대는 '홀로 남은과부' 신세가 된다고 표현했을 정도이다.

공진화coevolution는 사룸을 새로 만드는 가장 강력한 힘 중 하나이다. 파트너들 사이의 공진화가 상호작용함으로써 수백만가지의 새로운 종을 창조해왔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 인간이 공진화에 끼어들기 시작하면서 자연의 공진화는 살육이나 다를 바 없는 진창에 빠지고 말았다. “(448쪽)

 

인간, 아내, 국가, 과학, 전쟁 등 수많은 주제가 이 단락에 응축되어있다. 

 

1) 클라라의 죽음이 너무도 애틋하다. 하버는 국가의 요구와 자신의 선택 중에서 어떤 것이었을까? 사랑을 저버리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국가는 국가고 나는 나다. 나의 아내의 충고에 따를 것이다.

 

2) 전쟁은, 이겨야 하고 살육을 피할 수 없다. 내가 독가스의 열쇠를 쥐고 있다면, 패배와 나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총을 들어 적군 병사를 겨누는 것조차 힘들다. 패배와 나의 죽음도 받아들이기 힘들다. 독가스를 만들 생각조차 하지 않겠다. 만일에 일본이 처들어온다면? 앗, 다시 또 당할 수 없다. 독가스 개발도 하리라. 결국 전쟁을 거부하고, 평화를 지켜내야 한다.

 

3) 지학자에게는 조국이 있고, 조국의 결정은 언제나 옳은가? 틀린 결정은 거부할 수 있다. 

 

“루이 파스퇴르는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다. "지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지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 그는 '지학에 국경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려 했겠지만, 프리츠 하버 Fritz Jakob Haber(1868~1934)는 이 말을 실제로 조국을 위해 헌신하는 과학자상을 실천하는 데 직접 적용했다. 암모니아ammonia의 합성법을 개발해 많은 사람들을 기아에서 구해낸 공로로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던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때 조국 독일을 위해 적군을 몰살시킬 목적으로 독가스를 제조해 직접 살포했다. 역시 화학자였던 그의 아내 클라라Clara Helene Immerwahr(1870~1915)는 남편의 반인륜적인 행위를 말리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절망한 나머지 권총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457쪽)

 

사룸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양자 도약과 사룸 도약이 필요하다. 이 도약의 과정이 무한의 시도에 의한 우연의 결과라고 받아들이기가 어렵기에 신 또는 생기, 신성한 힘을 추정하게 된다. 어떤 추정이 맞을지는 아직까지는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판단의 문제가 되어버린 듯 하다. 138억 년의 우주와 46억 년의 지구가 아무런 간섭없이 스스로의 활동에 의해서 여기까지 왔다면, 사룸도 그 과정의 부산물이라고 추정하는 것이 맞다.

 

“자연은 비약하지 않는다 Natura non facit saltum" 이 오래된 격언은 린네가 한 말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인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이 격언은 틀렸다. 자연에는 적어도 두 번의 중요한 비약이 있었다. 한 번은 물질을 구성하기 위한 입자의 '양자도약 quantum jump'이며, 또 한 번은 그 물질이 존재의 의미를 갖도록 하기 위한 '사룸의 도약lan vital'이다. 여기서 사룸의 도약이란 화학 진화.즉 사룸이 없는 물질에서 사룸으로의 도약을 의미한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현대 물리학을 새로이 정립한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에 따르면,'관찰자observer'가 없이는 우주와 세상도 존재하지 않는다. (중략) 사룸이란 우주와 세계를 존재하는 '실재ality'로 만들기 위해 반드시 탄생했어야만 하는 인식의 주체인 것이다. (중략) 생명의 탄생은 위대한 비약이었다. 무생물과 생물 사이에는 우연으로는 차마 건널 수 없는 거대한 불연속discontinuity 의 심연이 존재하기 때문이다.“(461쪽)

 

정우현의 생각이 어디에서 달라질까를 계속 궁금해했는데, 적어도 마지막 장에서는 그것이 명백해졌다.

 

"삶은 죽음보다 선하며 우월하다. 세상의 모든 다른 가치들은 사룸이라는 최고의 가치로부터 파생되는 부산물에 불과하다."

 

사룸의 목적이 삶이라는 것에 동의하지만,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다. 죽음은 삶의 또다른 존재 양태이다. 사룸의 죽음은 언제고 새로운 사룸으로 흘러들어간다. 죽음은 안타까운 현상인 것이지 열등한 현상이 아니다. 정우현과 내가 세상을 보는 방식의 근본 차이다. 살아 움직이는 존재가 매우 특별한 것처럼 한 밤중에 소리 없이 내리는 눈송이 하나하나도 정원을 적시는 빗방울 하나하나도 소중하다. 어떻게 우열을 가리겠나? 

 

“철학자 한스 요나스 Hans Jonas(1903~93)는 '사룸의 원리 Das Prinzip Leben'에서 사룸을 자신의 생존을 보존하려는 목적에서 죽음과 대결하고 있는 존재로 정의했다. 사룸현상이란 사룸체가 죽지 않고 살기위해 부단히 애쓰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요나스는 '자기목적 Selbstzweck', 즉 살려는 목적을 가진 사룸은 그런 목적이 없는 물질보다 훨씬 우월하다고 주장한다. 사룸에게는 사는 것이 최고의 가치이다. 삶은 죽음보다 선하며 우월하다. 세상의 모든 다른 가치들은 사룸이라는 최고의 가치로부터 파생되는 부산물에 불과하다. (중략) 사룸은 그 존재만으로 가치 있다! (중략) 역학법칙에 따라 정해진 운동만 하는 자연세계에 예측 불가능한 운동을 일으키는 존재, 어디로 튈지 모르며 어떤 뜻밖의 결과를 유발할지 모르는 불안한 존재, 그것이 바로 사룸이다.” (463쪽)

 

내가 이해하기로는, 정우현은 매우 혼란스러운 상태다. 혼란이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사유의 과정이기도 하고, 자신의 주관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이기도 하다. 주관에 도달하려고 하는데, 지학의 사실들을 바라보니 다른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삶과 보이지 않는 힘을 찬미하게 되고, 사실과 충돌하여 횡설수설한다. 그렇지만 거의 마지막 문장에 해당하는 이 결론에 도달하는 것으로 혼란스러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나도 동의하는 생각이다. 사룸을 사룸과 환경으로 같이 묶어서 생각한다면 말이다.

 

"당신은 이 세상에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고 믿는가? 그렇다면 다른 모든 사룸(사룸이 사는 환경도 포함한다) 역시 그렇다. 요나스는 '책임의 원칙'에서 인간의 방종한 권력을 고발한다. 그는 사유의 혁명이 없이는 현재의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인류의 진보를 위해서 환경 파괴와 동식물의 희생을 어쩔 수 없이 치러야 할 대가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미궁 속에서 아리아드네의 실을 스스로 끊어버리는 행위가 될 것이다.  (그렇다. 사유의 혁명은 사룸과 환경을 같이 바라보는 것이다. / 중략)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고민으로 이어져야 한다. 세계를 판단할 단 하나의 절대 관점은 없다. (중략) 사룸을 (그리고 우주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살필 줄 아는 것만큼 멋진 일도 없을 것이다." (46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