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장이 감돈다. 애정과 편견이 어우러져 만드는 불화로 인한 긴장.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버지 니꼴라이는, 자신이 어머니와 논쟁을 하며 얻은 벽의 경험에 의거해서, 자신을 낡은 세대로 인정하고 물러나려는 생각이 있다. 큰아버지 파벨은, 자신의 모순과 젊은 세대의 오만한 자세에 저항한다. 이 긴장은, 친구 바자로프가 논쟁을 중단하고 일어섬으로써 끝난다.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가지 않고 돌아서는 것, 일단 잘한 일이다. 언제나 마지막 순간에 누군가는 파국을 염려하여 돌아설 수 있을까. 가능할까. 세계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가족과 친구 사이에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가는 일은 없어야 하고, 그러려면 논쟁의 적당한 단계에서 열기를 식히고 서로 생각할 시간을 가져야 한다.
90쪽이 넘어가도록 소설은 계속해서 긴장을 끌어올리고 있다. 매우 피곤하지만, 가슴을 조이는 긴장을 끌어내는 글솜씨는 훌륭하다.
“그곳 학자들은 유능한 사람들입니다."
"그렇지, 그렇지요. 그럼 당신은 러시아 학자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겠군요?"
"아마 그럴 수도 있겠지요."
"아주 칭찬할 만한 겸손이로군요." 파벨 페트로비치는 몸을 쭉 펴고 머리를 뒤로 젖히면서 말했다. "방금 전 아르카디의 말을 듣자니 당신은 일체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죠? 당신은 권위를 믿지 않소?"
"왜 제가 권위를 인정해야 합니까? 그리고 뭘 믿어야 합니까? 사실을 말해주면 저는 동의할 뿐입니다. 이게 전부입니다." (43쪽)
90쪽에서 절정에 이르는 긴장된 토론장을 정리하면서 사모바르самовар가 등장한다.
"오늘날 사모바르самовар는 러시아를 상징하는 하나의 상징물이 되었다. 러시아인의 ‘넉넉한 마음’ 을 대변할 뿐 아니라 화려함을 좋아하는 민족성과 기질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모바르는 러시아 민속공예품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상 러시아 고유의 것이라기보다는 복잡한 역사적·문화적 교류와 영향에서 비롯되었다. 사모바르는 찻주전자의 기능과 더불어 장식예술로서의 가치를 보여주었다. (중국으로부터) 차의 전파와 더불어 다기(茶器) 수입이 성행했던 서유럽의 환경과 비교해 보면, 사모바르는 타문화를 재해석하여 고유의 것으로 재창출시킨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사모바르는 러시아의 문화상징이 됨과 동시에 실용성을 갖춘 응용예술로까지 확장되었다. 즉, 사모바르는 찻주전자로써 기능성을 충분히 가진 채 집안을 장식하는 예술품으로서 ‘러시아적’ 특성을 갖게 된 것이다. 사모바르는 이제 러시아를 대표하는 상징물로서 많은 외국인에게 러시아 고유의 문화로받아들여지고 있다. 러시아의 생활양식과 맞물린 문화적 요소로 자연스럽게 인식되는 가운데, 세계 그 어디에서도 고유의 이름인 ‘사모바르’로 불리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끓이는 기계’라는 뜻처럼 그 어떤 영향에 의한 것이 아닌 자생적으로 생겨난 것이란 의미를 획득하기에 이르렀다."
(이은경, 차(茶)문화의 접점과 문화적 상징으로서의 사모바르, 초록 중에서)
파벨과 바자로프의 결투는, 페네치카와 바자로프의 키스 때문이었다. 그 입맞춤은, 평소부터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고, 어느 날 아침 바자로프가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에 끌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부끄럽고, 혐오스럽고, 화가 났지만, 자신이 순간 바람둥이가 된 것으로 정리했다. 이성이 아닌 감정에 의한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입맞춤이 끝난 후 그녀는 그를 "나쁜 사람"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결투가 끝난 다음 날 그가 떠날 때, 그녀는 슬펐다. 자신을 똑같은 인간으로 생각하며 동등하게 대화를 나누어 준 바자로프를 친구로서 이해했기 때문이다. 바자로프의 급작스러운 입맞춤을, 그녀는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그의 짧은 사랑은 그녀에게는 기쁨이지 않았을까. 그래서 바자로프가 떠날 때, 그녀의 표정이 슬펐던 것이다. 그의 입맞춤이 치욕이었다면, 그가 떠날 때 그녀는 냉정하게 돌아섰어야 했다.
페네치카에 대한 바자로프의 마지막 언급은 이렇다. "아마 저렇게(슬프게) 시들어버리겠지! (중략) 아니, 어쩌면 어떻게 빠져나올지도 모르지!" 바자로프의 사후 그녀는 니꼴라이와 정식으로 결혼을 해서 진정한 행복을 얻었다. 바자로프의 추정이 반은 틀렸지만(빠져 나오지 않았으니까), 반은 맞았다(진정한 행복을 찾았으므로).
니힐리스트-원칙과 미래가 없는 자들은 죽음조차 허무하다. 이것으로 끝인가? 몇 가지 생각해 볼 내용이 있다.
1) 니힐리스트는 왜 허무에 이르게 되었나?
지식을 통해서 이상에 도달하였으나 인간에 대한 이해 부족과 불신으로 허무에 이르게 되었다. 지식을 통해서 모든 인간과 생명이 오래오래 생존을 유지하면서 행복해 질 수 있는 이상세계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인간 개개인은 각자의 방식으로 생존하고, 니힐리스트들이 생각하는 이상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단계와 희생과 시간과 지식이 필요하다. 어쩌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니, 인간은 각 세대마다 주어진 과제와 최대의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면 된다. 그러나, 니힐리스트들은 많은 시간과 지식을 기다리기에는 너무 성급했고, 인간이 완전한 행복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상세계는 이상세계일뿐 현실에서 실현될 수 없으니, 모든 것이 허무하다. 게다가 종교에서 믿는 죽음 이후의 세계도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존재의 기쁨을 누릴 수 없게 되었다.
2) 니힐리스트는 어떻게 삶을 이끌어가나?
현재의 삶에 급급하지 않으니, 하고 싶은 일에만 집중하면서 치열하게 살아간다. 웃기는 일이지만, 인간이 누려야 할 제대로 된 삶을 누릴 수가 없으니 인생은 허무하다. 어차피 그런 인생이라면, 차라리 하고 싶은 일에만 집중할 자유를 얻게 된다.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지식을 축적해 나가고, 사랑하는 부모님의 곁에서 일생을 함께 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필요하다면 사랑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연히 불행하게도 니힐리스트 바자로프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3) 니힐리스트는 사랑을 거부하는가?
거부했으나 거부할 수 없었다. 인간에 대한 불완전한 이해를 바탕으로 사랑도 의미 없다고 생각했지만,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이성만이 아니었다. 5욕7정이 마구 솟아나는데 어찌하겠는가. 포유류가 새끼를 키워내는 방식에 의해 태어날 때부터 갖게 되는 부모자식에 대한 사랑에서 시작하여, 생명을 위협하는 생존을 위한 과도한 욕심을 보면 분노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생명은 약동하는 기운 때문에 새로운 생명과 연결될 수밖에 없고, 타자에 대한 사랑을 거부할 수 없었다.
4) 니힐리스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가?
두려워하지 않았다. 다만,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떠나는 우연한 죽음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있었다.
5) 니힐리스트로부터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지식에 대한 사랑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의 태도는 본받아야 한다. 모든 것을 알 수 없지만 많은 것을 알 수 있고, 그 지식들을 이용해서 더욱 많은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다. 행복한 기억과 시간들이 연결되는 것이 생명다운 삶이다. 생명의 죽음은 또다른 생명으로의 옮기는 것에 불과하다. 죽음은 새생명의 시작이니 행복한 삶처럼 즐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바자로프 이외의 다른 모든 건강한 사람들의 삶은 결국 시대가 부여한 행복에 이르렀다. 니힐리스트도 충분히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으나, 그의 죽음은 그저 우연에 불과한 일이었다. 슬프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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