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소설이라. 분노의 포도도 다 읽지 않았고, 노인과 바다는 다 읽었으나 지루했고, 위대한 게츠비는 한영대역본으로 읽었는데 그렇고 그런 내용이다. 이 정도로는 미국 소설들을 제대로 읽지 않은 것이지만, 포크너까지 더해서 총평을 하자면, 시시하다. 조정래와 박경리를 중심으로 한 한국 작품들이 워낙 대단하기 때문에 수준이 한껏 높아진 내가 읽는 외국 작품들은, 매우 지루할 수밖에 없다.
노벨상 수상 작가인 윌리엄 포크너.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데, 도서관에 갔더니 꽤 여러 권의 책이 번역되어 있다. 끔찍한 내용을 멋지게 서술하고, 다양한 관점에서 서술하는 독특한 형태를 개발한 사람이라고 한다. 1930년에 출간된 소설이니 미국 산업혁명기의 번영이 끝나고 대공황이 폭발하는 초입의 이야기다.
관점이 많다는 것은 읽기가 어렵다는 이야기였다. 할 수 없이 노트 위에다가 등장인물과 그들의 관계를 그려가면서 읽기로 했다. 그러다가 곧 그만두었다. 별 의미없다.
책을 읽고 모임 사람들과 토론을 하면서 생각이 다시 정리되었다.
포크너는 다른 생각을 하는 작가다.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이 소통과 민주주의의 방식이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그런 일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
통하는 사람들과 주로 대화하기 때문이다.
포크너의 이 소설을 통해 다른 생각을 느껴보자.
코라의 이야기에서 관심이 가는 내용이 처음 나온다.
"불쌍한 번드런 부인이 홀로 죽음을 맞지 않도록 도와주기 위해서였고, 미지의 세계와 맞닥뜨리는 순간에 용기를 줄 수 있기를 바라서였다. 내가 잘했다고 공치사하는 것은 아니고, 난 내 자신에게도 그렇게 해줄 사람이 곁에 있기를 바란다." (29쪽)
죽음이란 과연 두려운 것일까?
이승이 그리워서, 죽었다가 다시 돌아 온 사람은 현재 예수님 한 분 뿐이시고, 예수님도 불과 며칠 동안 머무르시다가 하늘나라로 다시 돌아가신 것을 보면, 저승이 이승보다 좋은 것은 확실하다. 불교나 힌두교에서는 모든 생명이 끝없이 윤회한다고 했으나 증거는 없다.
윤회는 물질의 측면에서 보면 맞다. 유기체는 죽으면 분해가 되어 생명체의 양분으로 흡수되어 새로운 생명을 만드는데 이용된다. 지구상의 물질은 우주로 튕겨나가지 않는 한 끊임없이 순환하고 있다. 그러나 정신이나 영혼이 윤회를 통해 이승으로 왔다는 증거는 없다. 정신과 영혼은, 책과 이야기로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결론은, 영혼은 저승으로 가서 좀 더 멋있고 아름다운 육체를 받아서 즐겁고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으리라는 추정. 그렇기에 죽음은 기쁜 일이기도 하다. 늙어서 추레하고 병약한 몸으로 천년을 사느니, 새로운 세상에서 젊고 아름다운 몸으로 다시 살고 싶다. 아킬레우스가 자신의 짧은 생애를 괴로워한 것은, 젊고 강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죽음이, 남아있는 가족과 친구들을 슬프게 한다. 남아있는 사람들의 슬픈 모습만 보다보니 죽음이 고통스러운 것이라는 착각이 들 수 있다. 그러나, 저승으로 가는 영혼은, 기쁨에 들떠 남겨진 자들의 슬픔을 무시한다. 코라의 말대로 우리는 "저승이라고 하는 미지의 세계와 맞닥뜨릴 수 있는 용기"만 가지면 된다.
사실 용기도 필요없다. 죽음이라는 어찌할 수 없는 과정이 미지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할 것이다. 사랑했던 가족들의 작별 인사를 받으며.
최은순이나 윤석열도 불과 2, 30년, 김건희도 길어야 40년 정도 살 것이다. 충분히 누리고 살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 확실하다. 그런데도 거짓으로 포장하며 욕심을 멈추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불로장생한다고 스스로 믿는 도사들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고서는 '공공선에 기여한 것도 없으면서' 무엇을 저렇게 하려고 하는가.
40년만에 레이스 달린 잠옷을 입고 침대에 누운 어머니의 말이 목을 매이게 한다. 가련하면서도 강하고, 어리석으면서도 고귀하다. 우리 모두의 부모님이고, 부패와 야만의 시대인 일제시대와 독재시대를 살아오신 어르신들의 모습이다. 우리 중의 누군가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가슴이 찌릿하다.
"이젠 피곤하구나" (37쪽)
무기력과 의존을 표현하는 이 부정한 단어들의 나열은 정말로 다르다. 이런 것이 윌리엄 포크너 소설의 특징일까.
"자신은 능력이 없어서 시도조차 할 수 없기를 마치 바라는 것같다." (40쪽)
270쪽의 짧은 소설을 천천히 읽어가면서도 도저히 재미를 느낄 수 없었던 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다. 빨리 읽어버렸어야 했는데, 너무 천천히 읽었나 하는 후회가 들기도 한다. 하나마나한 이야기들의 연속이다.
"우리가 살아 있는 이유는, 오랫동안 죽어 있을 준비를 하기 위해서" (195쪽)
정말 황당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나 또는 대부분의 우리와 완전히 다른 생각이다.
너무 달라서 생각할 것들을 만들어 주는 문장이기는 하다.
우리가 살아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1. 건강하기 때문이다. 정신과 육체 모두. 생명은, 건강을 잃으면 생명을 잃고 흙으로 돌아간다.
2.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
나는 홀로 존귀하다.
삶과 역사가 모두 괴로우나,
나는 마땅히 고통을 극복하고 달콤한 삶으로 나아갈 것이다.
생명 자연과 더불어.
나는,
자연과 생명을 즐기기 위해서 살아있다.
삶은 고달프다.
고통스럽지만 달콤하다.
내가,
고통스런 삶을 거부하는 순간, 생명을 잃고 흙으로 돌아간다.
내가 살아있는 이유는,
고달픈 삶을 즐기기 위해서다.
3.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생명과 자연을 유지 보존해야 한다. 위로부터 받은 것을 후손들과 생명과 자연에게 좀더 좋은 상태로 물려줘야 한다.
오랫 동안 죽기 위해서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 것일까?
1. 건강을 지키고, 해야 할 일을 찾는다
2. 사랑과 우정 나누기 : 자연과 생명을 즐겨라
3. 유언장과 덜어내기
"죄악이란 우리가 벗어던져야 하는 옷과 같다"죄악이란 무엇일까?
1. 폭력은 죄악이다 =>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고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2. 거짓이 죄악이다 =>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고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3. 약자를 위로하고 보살피지 않는 것이 죄악이다 => 더불어 잘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