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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서재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the better angels of our nature_스티븐 핑커_210112 el doce de enero el miércoles_двенадцать январь среда

사람의 본성에 대해서 궁금한가?  별로 궁금하지 않다. 본성이 어떠하든, 평화롭고 자유로우며 자연을 사랑하고 부지런히 노동하도록 잘 가르치면 되지 않겠는가.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왜 사람의 본성에 이렇게 두꺼운 책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까?

 

"사람이란 얼마나 괴물 같은 존재인가! 이 얼마나 진기하고, 괴물 같고, 혼란스럽고, 모순되고, 뛰어난 존재인가! 모든 것의 심판자이면서도 하찮은 지렁이와 같고, 진리를 간직한 자이면서도 불확실함과 오류의 시궁창과 같고, 우주의 영광이면서도 우주의 쓰레기와 같다." (블레즈 파스칼, 속표지에서)

 

[ 서론 ]

 

무엇이 야만의 시대를 끝내고 있는가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는 스티븐 핑커의 주장에 공감한다. 이미 수년 전부터 '아직 야만에서 벗어나지 못한 일'과 '야만에서 벗어난 일'에 대해 생각해 왔다. 2011년에 발간된 이 책의 영향으로 우리 사회에 폭력이 줄고 있다는 이야기들이 내게도 영향을 주었으리라.

 

"무언가가 그 잔인함을 감소시켰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 우리는 그것을 인과의 문제로 다뤄도 좋을 것이다. '왜 세상에는 전쟁이 있을까?'라고 묻는 대신, '왜 세상에는 평화가 있을까?" 라고 물어도 좋을 것이다. 우리가 잘못한 일에만 집착하는 대신, 잘한 일을 생각해 봐도 좋을 것이다. 우리가 실제로 무언가를 잘해왔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면 좋지 않겠는가" (22쪽)

 

[ 1장 ]  낯선 나라

 

과거는 낯선 나라다. 인류 최초의 서사시인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읽으면서 그 끔찍한 살육의 장면에 놀랐다. 어떤 교훈도 없었다. 아킬레우스는 계속 분노하고 슬퍼했다. 끔찍한 부분이 많아서 영웅들의 서사시가 아니라 '살륙의 현장을 전하며 전쟁하지 말라는 깨우침을 전하는 시'로 생각했었다. 스티븐 핑커는 한 걸음 더 뒤로 물러나, 자신의 행위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잔인한 시대였음을 지적한다. 야만의 시대였다는 것에 동의한다.

 

"사람들은 전쟁의 환난을, 사람이 풀어야 할 사람의 과제로 인식하는 대신, 성마른 신들이라는 환상을 꾸며내어, 자신들의 비극을 신들의 질투와 어리석음 탓으로 돌렸다." (38쪽)

 

구약은 따로 읽지 않아서 그냥 전쟁의 기록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핑커는 조금도 망설임이 없다. 원문을 그대로 전달하고, 분명하게 정리한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처참하게 탄압하고 죽이는 이유가 뭘까에 대해 항상 의문이 들었는데, 그들이 믿는 경전이 이런 내용이었으니 무슨 거리낌이 있을까. 참으로 잔인하고 악랄하다.

 

"성경에 묘사된 세상은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혼비백산할 만큼 야만스럽다. 사람들은 친족을 노예로 부리고, 겁탈하고, 죽였다. 군사 지도자들은 아이를 포함해 민간인을 함부로 죽였다. 여자들은 성노리개처럼 거래되거나 강탈되었다. 야훼는 사소한 불복종을 구실로, 혹은 아무런 이유가 없는데도 수십만 명을 고문하고 학살했다." (45쪽)

 

뒤를 이은 서술 역시 공감이 가는 부분이다. 짜집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지만 성서학자들이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현대 성서학자들은 성경이 위키 wiki와 같은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성경은 서로 다른 문체, 방언, 인명을 썼던 여러 작가들의 기록을 500여 년에 걸쳐 수집해 편집한 것이고 그 편집마저 엉망이라 모순, 중복, 쓸데없는 일화 등이 고스란히 남았다고. (중략) 편집이 최종 마무리된 것은 그들이 다시 유다로 돌아온 직후인 기원전 5세기였다.

 

(중략) 구약의 역사 기록은 픽션이지만 기원전 500년경 근동 문명의 삶과 가치를 보여주는 자료임에는 분명하다. (중략) 당시에는 관습과 권위에 대해 무조건 복종해야 했고, 사람의 목숨 따위는 중요한 가치가 아니었다. (중략 / 그러나) 말할 필요도 없는 노릇이지만, 오늘날 유대교와 기독교 신자의 대다수는 뼛속까지 점잖은 사람들이다.

 

(중략) 근래 수천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은 히브리 성경을 달리 해석하거나, 우화로 간주하거나, 폭력을 약화시킨 다른 텍스트로 교체했다(유대인은 탈무드로, 기독교인은 신약 성서로), 혹은 그저 무시했다. 바로 그 점이 핵심이다. (중략) 신자들은 말로는 성경을 도덕률의 상징으로 인정하지만, 실생활에서는 현대의 다른 원칙들로부터 도덕률을 얻는다." (46~48쪽)

 

 

다행이다. 확실히 인간은 야만을 극복해 가고 있는 모양이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를 깨워.

 

"베넷 헤이즐턴과 나는 인터넷 사용자 265명에게 역사적 기간을 둘씩 짝지어 다섯 쌍을 제공하고, 둘 중 어느 쪽에서 폭력적 사망률이 더 높았을 것 같은지 물어보았다.

 

1. 선사 시대 수렵채집군 사회와 최초의 국가

2. 현대의 수렵 채집군 사회와     현대의 서구사회

3. 14세기 영국의 살인율과         20세기 영국의 살인율

4. 1950년대의 전쟁과                 2000년대의 전쟁

5. 1970년대 미국의 살인율과    2000년대 미국의 살인율

 

모든 쌍에 대해서 응답자들은 후자가 1.1배에서 4.6배 정도 더 폭력적일 것이라고 답했다. 이 책에서 살펴보겠지만, 사실은 모든 쌍에 대해서 전자의 문화들이 1.6배에서 30배 이상 더 폭력을 행사했다." (1182쪽)

 

지금으로부터 70년 전에 살았던 사람의 이야기다. 많은 사람들이 핵폭탄의 공포를 서서히 이해하면서 사라졌지만 말이다. 핵발전소는 핵폭탄과 다르다는 주장은 여전히 우리나라에서 유효하다. 감속재나 차가운 물로 제어되지 않으면 핵폭탄과 핵발전소는 똑같은 성능으로 사룸life와 문명을 파괴한다는 것을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정말 많다. 안전한 핵발전소는 존재할 수 있을까? 충분한 돈이 투자된다면 우리는 정말로 깨끗하고 더 안전한 핵발전소를 가질 수 있을까? 

 

"세상은 핵폭탄에 매력을 느꼈다! 일례로 섹시한 비키니 수영복은 핵폭탄 실험 때문에 사라진 미크로네시아의 환초에서 이름을 땄다. 디자이너는 그 수영복에 대한 구경꾼들의 반응이 핵폭발 구경꾼들과 비슷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중략) 1950년대에는 버섯구름을 로고로 쓰는 제품도 많았다. '핵 불덩이 눈깔사탕'이라느니, '핵 시장'이라느니(MIT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작은 식품점이었다.), '핵 카페'라느니."(70쪽)

 

[ 2장 ] 평화를 만드는 과정

 

다윈의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론을 도입해서 '폭력이 약해지는 과정'을 검토해 보자는 것이 이 장의 첫번째 주제다.

 

제일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생존경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룸체들은, 오늘 이 시간 생존하기 위해, 치열한 투쟁을 하는 것이 아니다. 사룸체들은 각자가 생겨난 방식대로 자연 속에서, 사룸체 자신을 포함한 자연 속에서 살아간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 자연환경에 제일 적합한 사룸체들만이 살아남게 된다. 누가 누구를 죽이고 살아남는게 아니다. 수천만년에 걸쳐 자연선택이 이루어진 것일 뿐이다. 생존경쟁이 아니라 자연선택이다.

 

두번째는 유전자와 게임이론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생존기계를 뒤집어 쓴 유전자의 폭력성이 자연선택에 의해 제거되고 있다. 특히, 사룸체들은 비슷한 힘으로 반격을 가하기 때문에 폭력의 행사에 신중할 수밖에 없다. 폭력은, 유전자를 보호하고 있는 생존기계, 즉 사룸체에 이익을 가져다 주는 상황에서만, 사용된다. '비용보다 편익이 클 때에만 폭력을 사용'하는 유전자를 가진 생존기계들이 생존하게 된다. 그럴 듯하다.

 

"도킨스의 신중한 문장 속에는 자연이 왜 거대한 유혈 아수라장이 되지 않는가에 대한 설명도 담겨 있다. 우선, 동물은 가까운 친척을 덜 해친다. 친척을 해치게끔 하는 유전자는 친척의 몸에 든 자신의 유전자 복사본도 해치는 셈이라 자연선택에 의해 제거될 것이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점은, 도킨스가 지적했듯이 생물은 반격하는 성향이 있다는 점에서 바위나 강물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중략) 폭력의 진화는 언제나 전략에 따른다. 자연은 기대편익이 기대비용을 넘어서는 상황에서만 폭력을 쓰는 사룸체를 선택한다. 지능을 가진 종은 특히 이런 분별에 능하다. 큰 뇌 덕분에 진화기간 전체에 대한 평균값이 아니라 특정 상황에 국한한 기대편익과 비용에 민감하기 때문이다." (86쪽)

 

사고력을 갖춘 종이, 같은 종의 다른 개체에 대해 폭력을 행사하는 원인은 홉스의 분석에 따른다. "경쟁 competition, 불신 diffidence, 영광 glory." (87쪽) 이익을 취하기 위해 경쟁하고, 다른 개체가 경쟁을 하려 하기 때문에 불신하고, 불신의 증거를 빨리 찾기 위해 자신의 명예에 흠집을 내는 개체에 대해 폭력을 가한다는 게 홉스의 이론이다.  홉스는 고맙게도 한 발 더 나아가, 불신에 바탕을 둔 경쟁이라는 무정부상태를 해결하기 위해 리바이어던 leviathan을 제시한다. 

 

"리바이어던은 개인들의 의지를 구현하는 동시에 폭력의 사용을 독점하는 군주 혹은 정부를 말한다. 리바이어던은 공격자를 처벌함으로써 개인들의 공격 동기를 제거한다. (중략) 리바이어던은 공평무사한 제삼자라서, 자신은 눈처럼 순수하지만 상대는 음흉하다고 생각하는 배타주의 chauvinism 편향에서 벗어나 있다." (89~90쪽) "

 

chauvinism : disapproving 

1an attitude that the members of your own sex are always better than those of the opposite sexmale chauvinism [=a belief that men are superior to women]

2: the belief that your country, race, etc., is better than any otherAmerican chauvinism

 

프리온 질환이 무서운 것은 아직 치료할 수단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프리온 질환은, 체내에서 구조가 이상하게 변형된 프리온 단백질 (PrPSc)이 뇌 내에 축적되면서 스펀지 형태의 공포가 형성되어 중추신경계에 이상을 일으키는 진행성 퇴행성 뇌 질환이다. 소에게서 나타나는 광우병과 양에게서 나타나는 스크래피 프리온병이 있고, 인간에게도 전염되어 인간 광우병이 발병하기도 했다.

 

프리온병의 또다른 형태가 파푸아뉴기니에서 번성했던 구루병이다. 광우병에서처럼 스펀지같은 뇌가 프리온 단백질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환자는 울다가 웃다가 '몸을 떨면서(구루)' 무기력해지다가 결국 사망한다. 이 병의 원인은 식인풍습으로 오염된 뇌를 먹음으로써 전염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부드러운 뇌를 주로 먹었던 여성과 아이들이 이 병에 걸렸다고 한다. 식인풍습이 사라지면서 이 병의 발병이 억제되었지만, 50년이 지나도 가끔씩 나타나는 것을 보면, 프리온이 차세대의 대응 불가능한 대유행병 pandemic이 될 수도 있다고 한다.

 

모든 인류의 "게놈에는 프리온 병에 대한 방어 기제로 보이는 유전자들이 존재"(108쪽)하고 있으며, 현재 우리나라를 포함한 여러나라에서 THERPA라는 프로그램으로 관련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즉, 식인 풍습은 매우 광범위하고 흔하게 이루어진 문화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새로운 전쟁이 일어났다. 힘의 차이 때문에 금방 끝나리라고 예상하지만 사람의 일이라 알 수 없다. 한 때는 같은 나라였던 나라들이 전쟁으로 치닫는 것을 보면, 평화는 주어진 조건이 좋다고 해서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무수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알려주는 사례다.

 

우리가 흔히 평화로웠을 것이라 여겨지는 비국가 사회에서도 무수히 많은 전쟁과 희생이 있었다는 것을 논증하면서 핑커는, 홉스가 정리한 전쟁의 이유 세가지를 든다. 이득(약탈을 위한 전쟁), 안전(선제공격으로 적을 제압), 신뢰성 있는 억제력(반드시 복수한다는 평판을 얻기 위한 전쟁). 전쟁을 억제하기 위한 전쟁이라는 억제력이 과연 작동하는지는 믿기 어렵지만 사실이 그렇단다. 전쟁을 통해 상대방을 완전히 말살하지 않는 한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대부분의 조사에서 전쟁의 동기로 제일 자주 거론되는 것은 역시 복수다. 복수는 공격의 장기적 기대 비용을 높임으로써 잠재적 적에게 잔혹한 억제력을 발휘한다. '일리아드'에서 아킬레우스는 전 세계 문화에서 한결같이 발견되는 인간 심리의 일면인 복수를 묘사하며, 그것은 '흐르는 꿀보다 더 감미롭게 남자의 가슴에서 연기처럼 솟아난다'고 말했다. " (109쪽)

다.

 

짐작하던 일이 사실로 증명될 때가 있다. 끔찍하고 싫지만 받아들여야 대책을 세울 수가 있다.

 

"최초의 리바이어던은 폭력의 문제를 하나 풀었으나 또 다른 문제를 만들어 냈던 셈이다. 덕분에 사람들은  살인과 전쟁의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줄었지만, 대신 독재자, 성직자, 도둑 정치가kleptocrat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여기에서 우리는 평화화라는 단어에 숨은 음흉한 뜻을 깨우친다. 그것은 단순히 평화를 가져오기만 하는 과정이 아니었다. 시민을 억압하는 정부가 사회를 통제하는 과정이었다. 인류가 이 새로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몇 천 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심지어 세계 여러지역에서는 아직도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126쪽)

 

[ 3장 ] 문명화 과정

 

"문명이 본능의 억압에 기초한다는 것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129쪽)

 

멋진 말이다. 문명이 내 더러운 본능들을 억압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문명에 대한 환상 때문이다. 야만의 단계에서 벗어나 문명의 단계로 접어들고 싶다. 사람을 비롯한 모든 생명들을 귀하게 여기고 공존하는 삶을 원한다. 2022년 3월, 현재의 한국에는 문명화 과정의 주도권을 쥔 사람들이 반문명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사회계약론에 기초한 현대국가에는 5개의 '위임된 권력'이 있다. 입법, 행정, 사법, 언론, 수사권이다. 4개의 권력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겠지만 수사권을 분리하는데는 동의할 사람들이 별로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수사 권력은 '행정과 사법'의 양다리를 걸친 '결정-집행 권력'을 가지고 있어서 어느 쪽으로부터도 쉽게 견제받지 않는 구조다. 지금은 검찰만이 문제가 되고 있지만, 이 검찰 권력에 경찰력이 더해지고, 공수처가 더해지고, 법원과 의회와 언론의 권력이 더해지고 나면 군부 이상의 힘을 갖게 되어, 의회와 행정부는 물론이고 주권자인 국민들로부터도 견제가 불가능한 조직이 되고 만다.

 

문제는 과연 힘이 더해지느냐 그렇지 않느냐다. 힘을 모으려면 구심점이 있어야 하고, 원심력을 배제할 수 있는 능력이 존재해야 한다.

 

먼저 구심점. 현대 사회에서 구심점은 돈이다. 재벌이 떼돈을 번다고 하지만 소유주 일가를 둘러싼 특정 그룹을 제외하고는 열심히 일해서 버는 돈이다. 공돈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수사권을 둘러싸고 거래되는 돈들은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으면서 손쉽게 벌어진다. 자본과 수사권, 금융과 수사권, 금융과 재벌과 수사권, 사법권과 수사권 등등. 손쉽고 은밀하게 떼돈을 벌고, 그것을 소리 소문없이 나눈다. 대장동 사건을 보면 알 수 있다. 대선이라는 특수 국면에서 이재명이라는 '21세기 공동체주의 정치가'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대장동 사건은 수사권을 매개로 은밀한 떼돈벌기와 돈잔치로 묻히고 말았을 것이다. 대장동 이외에도 구심점으로 작용하는 돈과 관련한 확인할 수 없는 - 수사권을 그들이 쥔 이상 확인할 방법이 없다 - 이야기들이 부산과 서울에서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다.

 

두번째로, 원심력의 배제. 수사권이 중심이 되어도 돈의 배분을 둘러싸고 마찰이 생길 수 있다. 권력형 비리가 새어나오는 것도 '내부자 고발'이라는 용기있는 시민행동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이 마찰 때문이다. 돈의 분배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이 원심력으로 작용하여 구심력을 파괴하는데, 이때 원심력의 작용을 배제하는 시스템이 작동해야 한다. 언론권력과 입법권력이다. 내편이 아닌 세력들을, 입법으로 배제하고 수사권으로 배제할 때, 나팔수 역할과 땜질 역할이 필요하다.

 

언론권력이 떼를 지어 박근혜와 최순실을 몰아낼 때, 저들이 왜 저럴까 궁금했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자연스러운 권력이양이었다. '우리는 박근혜-최순실과 다르다.' 그들의 소망대로 최소한의 희생으로 수사권을 보호하면서 입법권력을 지켜냈다. 지켜낸 입법권력을 토대로 또다시 행정권력을 휘어잡으려 하고 있는데, 거의 성공단계에 와 있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문재인과 이재명이라는 '21세기형 공동체주의 정치가'들을 배제하고 그들의 세계를 다시 구축할 수 있다. 그들에게 5년 또는 10년의 세월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 정도 고난의 세월을 견뎌낼 수 있는 충분한 돈이 있다. 게다가 김기춘-홍준표-윤석열로 이어지는 강단(?)있는 수사권력의 등장은 군부독재 30년을 뛰어넘는 장기집권이 가능하리라는 꿈을 꾸게한다.

 

21세기의 한국은 '법에 의한 지배'와 '공권력에 의한 지배'라는 문명세계의 틀이 잘 보존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돈을 독점하려는 야만인들의 세상이고, 전체주의자들이 잠시 날카로운 발톱을 숨기고 있을 뿐이다. 문명화의 과정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고 잡고 있을 때, 진행된다.

 

 에티켓 교육에 대한 자료들을 주로 참조하여, 야만을 극복하고 문명으로 가는 과정을 설명해 낸 독일계 유태인 엘리아스는, 유태인이라서 독일에서 탄압받다가 탈출했고, 독일인이라서 영국에서 투옥되었으며, 일자리를 얻기 위해 미국의 야간대학을 전전해야 했다. 그런데도 자신이 선택한 과제를 손에서 놓지 않았고, 1939년에 독일에서 쓴 책 '문명화 과정'이 죽기 10년 전인 1970년대에야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녀는 도대체 얼마나 위대한 정신을 가졌었을까.

 

“(문명으로 가는 과정을 살펴보며) 엘리아스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애초에 어떤 외부의 유발 기제가 변화를 개시했는지를 짚어 보았다. 그는 정확히 두 가지를 제안했다. 첫째는 유럽이 봉건 영지와 봉토로 조각조각 나뉘었던 수백 년의 무정부 상태를 끝내고 진정한 리바이어던으로 통합된 일이었다. 중앙 집권 군주들은 힘을 길렀고, 다투는 기사들을 통제했고, 왕국 너머로까지촉수를 뻗었다. 군사 역사학자 퀸시 라이트에 따르면, 15세기 유럽에는독립 정치 단위가 5000개 있었다(주로 남작령이나 공국), 17세기 초 30년전쟁 시기에는 그것이 500개로 줄었고, 19세기 초 나폴레옹 시대에는 200개가 되었고, 1953년에는 30개 미만이 되었다. (중략) 둘째는 온화한 상업 gentle commerce이다. (중략) 포지티브섬 게임은 폭력의 동기도 바꾼다. 당신이 다른 사람과 호의나 잉여를 교환한다면, 그가 죽는 것보다는 살아있는 편이 당신에게도 더 좋다. (중략) 자유시장은 사실 감정이입을 장려한다."  (151쪽)

 

온화한 상업과 시민 주도의 리바이어던이 우리를 야만에서 문명으로 이끈다. 홉스는 세익스피어-세르반테스-데카르트와 함께 17세기를 살아내면서, 군주 중심의 사회계약론을 펼친다. 리바이어던이 사회계약론에 의해 만들어지지만 일개 군주의 몸에 집중된다는 것은 문제다. 홉스는 명예혁명(1689년) 이전에 의회파에 의해 영국으로 쫓겨나지만 이내 변절한다. 군주가 꼭 중심일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전체주의와 독재는, 홉스가 바라던 문명세계의 리바이어던이 아니었다.

 

“문명세계로 가는 두 힘은 서로를 강화한다. 엘리아스는 이것을 한 과정의 두 부분으로 보았다. 국가 통제의 중앙집중화와 폭력의 독점, 장인 길드와 관료 제도의 성장, 물물교환에서 화폐로의 전환, 기술 발전, 상업 발달, 갈수록 더 넓은 지역의 개인들이 상호의존의 그물망을 이루는 것. 이 모두가 하나의 유기체를 이룬다. 그 속에서 잘 살고 싶은 사람은 감정 이입과 자기통제력이 제2의 천성이 될 때까지 계발해야 한다.”(158쪽)

 

[ 4장 ] 인도주의혁명

 

다.

 

[ 5장 ] 긴 평화

 

"(아놀드 토인비) 최근 서구 역사에서, 전쟁은 점점 더 센 강도로 잇따라 벌어졌다. 1939~1945년의 전쟁이 이 크레센도의 절정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분명해 보인다."

(중략) 루이스 프라이 리처드슨(1881~1953년)은 물리학자이자 기상학자이자 심리학자이자 응용수학자였다. 그가 명성을 주장할 만한 성과는 수치를 이용한 일기 예보 기법을 고안 (중략) 리처드슨의 미래 예측은 위대한 문명들에 대한 박람강기한 지식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한 세기 이상에 걸쳐 벌어진 폭력 충돌 수백 건의 데이터를 통계 분석한 데서 나왔다. 리처드슨은 토인비보다 더 신중했고 더 낙관했다.

"이번 세기에 발발한 두 세계 대전 때문에, 우리는 막연하게 세상이 더 전쟁을 좋아한다고 믿기 쉽다. 그러나 이 믿음의 논리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오랫동안 제3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지 않을 미래가 올지도 모른다" (342쪽)

 

[ 생일 문제 ]  한 반에 n명이 있고, 나와 생일이 같은 사람이 없을 확률을 계산해 보자.

 

1. 1년의 날자는 366일(2월의 29일을 계산에 넣기 위해)이라고 한다.

2. 내 생일 날자 하루를 빼면 나머지 학생들이 선택가능한 날자 즉, 나와 생일이 같지 않은 날자는 365일이다.

3. 첫번째 학생이 생일이 다를 확률 = 365/365

4. 두번째 학생까지 모두 생일이 다를 확률 = 365/365 x 364/365

5. 세번째 학생까지 모두 생일이 다를 확률 = 365/365 x 364/365 x 363/365

6. n번째 학생까지 모두 생일이 다를 확률 = 365 x 364 x 363 x ..... x (365-n)/365의 n제곱

 

정말로 끈기있는 산수가 세마 science다. 전자계산기가 있는데도 이 계산을 직접 해 본 것이 40년 만이다. 고등학생때 어떤 선생님이 우리 반 학생수가 70명이라면 똑같은 생일을 가진 학생이 있을 확률이 높다며, 직접 검증을 해 보이셨다. 그때도 놀랐고, 지금 핑커의 책을 읽으면서도 직접 계산을 해 보니 놀랍다. 그런데, 그냥 막연히 그럴 수도 있겠다고 알고 있었지, 이렇게 직접 계산을 해 보지는 않았다. 계산도 5명의 학생까지만 해 봤다. 23명까지는 해 봐야 진짜 세마학자다.

 

[ 별자리가 생기는 이유 ]

 

질서가 있든 없든 패턴은 나타나지 않을까? 아니란다. 물리학자 에드 퍼셀이 무작위로 점을 찍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짜서 굴드의 직관을 확인해 주었다고 한다. 이것은 좀 검증해 볼만한 프로그램이 아닐까? 어떻게 만들었을까? 무작위로 점을 찍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가 없다. 간격이 벌어진 것을 조금 축소하면 간격이 사라져버릴텐데 말이다. 거의 믿지만, 30%는 믿음이 가지 않는다. 별자리를 보면서 받아들일수 있는 모양은 국자, W자, 사각형 등 몇가지에 불과하다. 별자리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일까?

 

"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가 뉴질랜드 와이토모의 유명한 개똥벌레 동굴로 여행을 갔다가 발견했다. 동굴의 캄캄한 천장에 벌레들의 불빛이 콕콕 박혀 있기 때문에, 그곳은 마치 천문관처럼 보인다. 그러나 차이점이 하나 있는데, 별자리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굴드는 그 까닭을 이렇게 추리했다. 개똥벌레는 먹성이 좋기 때문에 잡아챌 수 있는 거리에 있는 것이라면 뭐든 먹어 치운다. 그래서 녀석들은 일정한 넓이의 천장에서 자리 잡을 때 서로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그 결과 별들보다 더 고르게 분포하게 된다. 별들은 적어도 우리가 보는 시점에서는 하늘에 무작위로 흩어져 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숫양, 황소, 쌍둥이 등등 다양한 형태를 그리는 것처럼 보이고, 패턴에 굶주린 두뇌들은 수천년 동안 그런 무늬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처럼 생각했다." (365쪽)

 

 

[ 푸아송 과정 ] 벼락맞을 확률이 가장 높은 날은 언제인가?


"월요일인 오늘, 당신의 집이 벼락을 맞았다. 그렇다면 당신의 집에 다음번 벼락이 떨어질 가능성이 가장 높은 날은 언제일까? 답은 화요일인 '내일'이다. (중략) 벼락맞을 확률을 3%로 가정하면,

화요일에 벼락이 떨어질 확률은 0.03,

수요일에 벼락이 떨어질 확률은 0.97x0.03 < 0.03 (0.97 : 화요일에 벼락이 떨어지지 않을 확률)

목요일에 벼락이 떨어질 확률은 0.97x0.97x0.03 < 0.03

금요일에 벼락이 떨어질 확률은 0.97x0.97x0.97x0.03 < 0.03이 된다.

 

(중략) 푸아송 과정에서는 사건들이 연속해서, 무작위로, 독립해서 발생한다. (중략) 푸아송 과정에서는 사건들의 간격이 지수함수를 따라 분포된다. 달리 말해, 긴 간격일수록 더 적게 발생한다. 이것은 무작위로 발생하는 사건들이 마치 무리지어 등장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건이 한 번 일어나고 나서, 바로 인접한 시간에 그 사건이 일어날 확률이 가장 높기 때문에 그렇다 / 무일)" (362~3쪽)

 

푸아송 과정을 세계대전에 적용해 보면, 1차대전이 끝나고 2차대전이 일어날 확률은 1920년에 가장 높았다. 그러다가 1939년에 2차대전이 유럽에서 터졌다. 그러면 3차대전은 1946년에 일어날 확률이 가장 높다. 80여년이 지난 지금은 1946년 보다 세계대전이 일어날 확률이 낮고, 해를 거듭할 수록 긴 평화가 유지될 확률이 높아진다. 수학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데, 우리는 다르게 생각한다. '3차대전이, 올해 일어나지 않았으니, 내년에는 일어날 확률이 더 높다.' 이것은 잘못된 인식이다. 오히려 전쟁이 한 번 시작되면, 1, 2년 내에 끝내지 못할 경우, 전쟁을 끝낼 가능성이 점점 더 낮아진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누구나 전쟁을 시작할 수는 있지만, 쉽게 끝내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전쟁이 길어질수록 끝날 확률도 점점 낮아진다는 말이지 않은가. 시리아 내전과 우크라이나 전쟁은 도대체 언제 끝낼 수 있다는 말인가? 

 

"전쟁의 시기에 대해서 리처드슨이 발견한 중요한 사실은 그 시작이 무작위라는 것이다. (중략) 그렇다면 전쟁이 시작되는 시점들 사이의 간격은 지수함수에 따라 분포할 것이다. 즉 짧은 간격은 많고 긴 간격은 적을 것이다. (중략) 리처드슨은 전쟁의 시작만이 아니라 그 종결도 무작위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중략) 전쟁은 1년 뒤에 끝날 확률이 가장 높다. " (366~8쪽)

 

전쟁으로 발생하는 사망자수와 그런 전쟁이 발생할 확률은 지수함수 그래프를 보이는데, 일일이 값을 넣어보지 않아서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겠지만, 의미는 참혹하다. 아무리 가능성이 낮더라도 핵전쟁과 같은 끔찍한 전쟁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누가 시작하는가? 누구든 시작할 수 있다. 푸틴이든 젤렌스키든 바이든이든, 김정은이든 윤석열이든 기시다든 바이든이든 시진핑이든. 전쟁을 노래부르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전쟁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전쟁을 시작할 수 있고, 열 명이 죽고 끝날 수도 있고, 1억명이 죽고 끝날 수도 있고, 10억명이 죽을 수도 있다. 누가 끝을 내는가? 누구도 끝낼 수 없다. 모두가 원해야 끝이 난다.

 

"전쟁 그래프와 같은 지수값을 지닌 밑함수 분포에서는 고정된 평균이 없다. (중략) 전쟁이 발발하면 우리가 예상하는 어떤 수준까지 사망자가 쌓인뒤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잦아들리라고 기대해서는 안된다. (중략) 밑함수 분포는 꼬리가 두껍기 때문에, 데이터의 규모가 로켓처럼 치솟더라도 곡선은 가파르게 떨어지지 않고 완만하게 감소한다. (중략) 세계가 사망자 1억명의 전쟁을 목격할 가능성은 지극히 낮고, 사망자 10억명의 전쟁을 목격할 가능성은 그보다 더 낮다. 하지만 핵무기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 우리의 겁에 질린 상상력과 멱함수의 수학이 동의하는 바, 그 가능성이 천문학의 통계값보다 낮지는 않다. (중략) 어떤 변수가 다른 변수에 대한 지수 함수일 경우, 그것은 멱함수 분포를 따른다. (중략) 전쟁이 왜 멱함수 분포를 따르는지는 정확하게 알수 없어도 (중략) 전쟁은 언제나 좀 더 길어질 수 있다. 손실은 언제나 좀 더 심해질 수 있다." (382~391쪽)

 

전쟁. 북한의 김정은이 핵무력을 거의 완성하고, 대륙간 탄도탄과 군사위성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막바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한가하게 평화를 이야기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전쟁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지만, 전쟁에 대비하지 않을 수도 없다. 그러니 핵무기도 핵우산도 확실히 준비해야 한다. 핵전쟁이 일어났는데, 패배하기까지 한다면 얼마나 더 끔찍하겠는가? 그러면, 전쟁준비를 해야 하는가? 전쟁이 난다고 가정을 하고, 어떻게 하면 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 우리가 민주정부 20년 동안 북한과의 평화정착을 위해 계속해서 노력해 왔는데도, 북한은 그들의 적을 겨냥한 핵무기 개발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의 적에 대항하기 위해서 핵무기를 개발하거나 핵우산을 확실하게 보장받아야 한다. 핵무기는 개발하지 못하게 하니, 핵우산을 보장받으려면 미국의 요구에 확실하게 부응해야 하는가? 미국과 IAEA는 정말로 핵우산을 확실하게 보장해줄까, 아니면 자신들을 핵공격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핵전쟁이 벌어지면 슬그머니 발을 뺄까? 정말로 알 수 없는 일이다. 결국 핵무기 개발 - 핵우산 강화 - 평화를 위한 대화 노력이 동시에 병행되어야 한다.

 

결국 평화를 이야기해야 한다.

 

351쪽에 나열된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 수를 들여다 본다. 모든 전쟁을 거부해야 할 이유를 제공하는 표다. 더욱 황당한 것은, 마오쩌둥과 스탈린의 살인이다. 이미 국내는 안정되어 있었으므로, 두 명의 독재자가 권력을 유지하겠다는 욕심을 버렸다면 희생되지 않았을 6,500만명의 사람들이 죽어갔다. 전체주의 독재체제가 전쟁만큼이나 끔찍한 살인을 불러온다. 피할 수 있을까? 민주주의의 확대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그런데, 전체주의에 맞서 싸우다가 내전으로 비화하여 비참한 구렁텅이에 빠진 시리아를 보면, 그또한 끔찍한 일이다. 시리아는 시민들의 나라가 될 수 있을까? 우리는 내전을 피할 수 있을까? 

 

 

종교의 차이든 정치사상의 차이든 이념이 전쟁을 지배하면, 시간은 길어지고 폭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극악무도해진다.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인정해주는 것은, 가치를 존중해주는 측면도 있지만, 나부터 살기위해 차선책을 선택한 결과다. 나도 그렇고, 그도 절대로 자신이 믿는 가치를 포기하지 않기 때문에, 비극을 초래하느니, 보기 싫더라도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을 선택한다.

 

"종교전쟁은 격렬했을 뿐아니라 도무지 끝을 몰랐다. (중략) 종교쟁점이 정치쟁점을 압도하자, 적국과의 타협은 이단이자 배신으로 보이게 되었다. 가톨릭과 개신교를 나누는 문제들은 더 이상 타협 가능하지 않았다. 그 결과 외교접촉이 줄었다." (411~2쪽)

 

생각의 방향을 바꿔야 행동이 바뀐다. 뇌가 발달을 거듭하면서, 뇌야말로 램프의 요정 지니가 되었다. 뇌는 생존을 위해서 끊임없이 생각한 것을 실현해낸다. 그러므로 생각의 방향을 평화로 바꿔가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왜? 내가 살기 위해서다.

 

"많은 역사학자는 18세기를 기나긴 유럽전쟁사에서 잠깐의 소강기로 본다. (중략) 많은 전쟁은 어쨌든 무승부로 끝났고, (중략) 주권국가들은 상업세력이 되었고, 제로섬 정복보다는 포지티브섬 무역을 선호했다. 인기작가들은 명예를 해체했고, 전쟁을 살인과 등치시켰고,  (중략) 철학자들은 정부를 재정의하여, 그것은 군주의 변덕을 집행하는 수단이 아니라 개인의 생명, 자유, 행복을 향상시키는 수단이라고 규정했다." (415~6쪽)

 

15세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유럽 정치사의 변화를, 왕조의 시대 -> 종교의 시대 -> 주권국가시대 -> 민족주의 국가시대 -> 민주주의 국가시대로 이야기했다.

 

"[ 루어드는 ] 1400~1559년까지 진행된 첫시대를 왕조의 시대라고 불렀다. 이 시기에는 '왕가' 혹은 혈연에 기반한 확장된 연합체들이 유럽의 패권을 겨뤘다. (중략) 1559년을 종교의 시대가 개막한 해로 정했다. (중략) 경쟁하는 종교연합체들이 도시와 국가의 지배권을 놓고서 최소한 25건의 국제전쟁과 26건의 내전을 벌였다. '하나의 왕, 하나의 법, 하나의 신앙' (중략 / 1648년 이후) 주권국가시대에 부상한 국가들은 여전히 왕조와 종교에 얽혀 있었지만, 실제로는 정부, 영토, 상업제국에 국가의 위신을 걸었다. (중략) 1789년을 민족국가의 시대가 시작된 해로 지목했다. (중략) 제1차 세계대전은 민족주의 갈망들이 최고조에 이른 사건이었다. (중략 / 1917년 이후) 미국이 전쟁에 뛰어듦으로써 전쟁의 구실이 독재에 대항하는 민주주의의 투쟁으로 바뀐 해였고, 러시아 혁명으로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가 탄생한 해였다." (409쪽)

 

[ 6장 ] 새로운 평화

 

집단살해의 궤적

 

범주에 따라 분류하여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사람이 발전해나가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 방식으로 '어떤 집단으로 분류한 존재들'을 집단으로 살해하는 방식이 바로 집단학살이다. 이익 - 두려움 - 저항의 억제(보복)라는 홉스의 틀로는 이해할 수 없다.

 

"사람이 저지르는 폭력중에서도 집단살해는 유별나다. (중략) 여자, 아이, 노인을 막론하고 죄없는 사람 수백만명을 학살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무리 우리가 같은 사람으로서 이해해 보려고 애써도 도무지 이해가 안된다. (중략) 분류에 따른 학살은 피해자의 행동이 아니라 존재를 표적으로 삼는다." (552쪽)

 

범주화의 문제. 진보와 보수 또는 좌우로 구분하고, 비슷하지만 분명히 다른 특징들을 갖고 있고, 그런 특징들이 그들의 본질이며, 게다가 그들은 윤리도덕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다. 감정이 격해지고, 위기의 순간이 닥치면, 그들은 나의 적이므로 배제하거나 사회로부터 격리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지난 30년 동안 평화롭게 정권교체가 수시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범주화의 문제가 격렬하게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증명이다. 해방이후 전쟁과 독재시대를 극복하며, 시민들 모두가 역사를 학습한 결과라 생각한다. 앞으로도 이런 범주화의 문제가 터지지 않도록 관리해야 한다. 다름을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다름을 의견차이로 받아들이도록 끊임없이 훈련하고 학습해야 한다. 쉽지않다. 

 

"범주화의 문제는 이것이 종종 통계를 넘어선다는 데 있다. (중략) 범주가 비슷한 성질일 뿐이라는 사실을 잊고서 마치 모든 사람에게 그 고정관념이 적용되는 것처럼 행동한다. (중략) 우리는 범주를 도덕의 잣대로 사용하는 moralinze 경향이 있다. (중략) 우리는 집단을 본질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essentialize 있다. (중략) 특정 민족이나 종교집단 구성원들은 어떤 본질을 공유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중략) 개인을 어떤 범주의 예시로 인식하는 습관은 갈등상황에서 아주 위험해진다. (중략) 사람의 마음에는 본질주의의 습관이 있어, 사람들을 범주로 나눠 무뚱그린다. 그리고 그 범주전체에 도덕감정을 적용한다." (557~64쪽)

 

끔찍한 야만의 기억이다. 살기위한 노력의 하나로, 적으로 범주화된 집단을 학살해야 한다는 뿌리깊은 의식이, 문화와 진화에 의해서 우리의 뇌에 심어져 있다면 말이다.

 

"비용이야 어찌되었든 복수하고 말겠다는 확고한 자기 선전의 충동은 어쩌면 진화에 의해, 아니면 문화규범에 의해, 그도 아니면 둘다에 의해, 억제의 신뢰성을 높이는 방편으로서 인간의 뇌에 심어진 특징일지도 모른다." (559쪽)

 

비록 유기농업과 친자연주의에 속아서(홀려서?) 귀농을 하고 농부가 되었지만, 유토피아를 다양성이 배제된 사회로 실현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인정한다. 친환경농업의 적용도 유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또한 인정한다. 내가 제초제를 쓰지않고, 농약을 최소로 사용한다고 해서, 모든 농부가 그러라는 것은 아니다. 물론 모든 농부가 그러면 좋겠지만, 그러다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중의 누군가가 굶어죽을 수도 있다. 그래서는 안된다. 자연이 좋아서, 자연을 즐긴다. 그뿐이다, 이데올로기도 도그마도 없어야 한다. 오히려 땅을 통해 이득을 얻어 생활의 안정을 찾는다.

 

"어째서 유토피아 이데올로기가 자주 집단살해로 이어질까? (중략) 첫째, 유한한 공리주의 계산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중략) 무한한 사람들이 와아happiness를 얻을 수 있다면 몇명을 희생하는 것이 허락될까? 수백만명쯤은 나쁘지 않은 거래로 보일수도 있다. (중략) 두번째 위험인자는 그것이 깔끔한 청사진을 따라야 한다는 점이다. (중략) 만일 당신이 꺠끗한 종이에 완벽한 사회를 설계한다면, 당연히 이런 눈엣가시들을 계획에서부터 지우지 않겠는가?" (565~6쪽)

 

대한민국은 전두환의 광주학살 이래로 43년동안 집단학살은 사라졌다. 그러나 여전히 두려움과 억제의 욕구가 천년왕국 이데올로기와 결합된 채 살아서 숨쉬고 있다. 제어되지 않으면, 드러난다.

 

"집단살해는 인간본성(본질주의, 도덕, 직관을 믿는 경제감각 등), 홉스식 안전의 딜레마(이득, 두려움, 억제), 천년왕국 이데올로기, 지도자에게 주어진 기회가 섞여 유독반응을 일으킴으로써 생겨나는 셈이다." (571쪽)

 

테러리즘의 궤적

 

조선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 안중근이 적장을 사살한 것을, 테러라고 주장하는 반민족 반인륜 세력이 있듯이, 테러는 어느 한 측면만을 강조해서는 안되는 행동이다. 안중근의 행위는 정당한 교전활동이었다. 테러는, 발생하지 않도록 위기관리를 해야 한다. 만일 발생했다면, 핑커가 분석하듯이 여러가지 측면에서 원인을 찾아 해결하기 위해 행동해야 한다. 테러분자를 하나 찾아내어 사회에서 격리시키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테러가 일으키는 공황과 테러가 일으키는 죽음의 불균형은 우연이 아니다. 테러 terror 공포라는 말 자체가 분명히 말해주듯이, 공황이야말로 테러의 핵심이다. (중략) 개인의 이익이 아니라 대의를 쫓아 (행동하고 /중략) 소통을 추구한다. 그들은 선전과 주목을 원하고, 공포를 통해 그것을 이룬다." (592쪽)

 

핑커는 잘못된 위험인식이 공공정책을 왜곡시키는 사례로 원자력발전을 예로 들고있다. 매우 불편하지만, 들어보고 검토해야 한다.

 

"1979년 스리마일아일랜드 원자력발전소 사고는 사망자가 한명도 없었고, 암발생율에도 아마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테지만, 어쨌거나 미국의 원자력발전 개발을 중단시켰다. 그러니 머지않은 미래에 예상되는 화석연료연소로 인한 지구온난화에 한몫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594쪽)

 

한동안 시끄러웠던 테러단체의 활동들이 거의 눈에 띄지 않고 있다. 테러단체들이 사라지고, 시민들이 테러에 대한 지지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테러의 시대에서 이제 평화로운 시대가 열린 것일까?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 대한 하마스 토벌작전을 계속하고 있다. 이 작전이 끝나고 나면,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하겠지만, 테러는 사라질 수 있을까?

 

"어느 사회에서나 젊은 남자들은 용기와 헌신을 증명해 보이려고 바보스러운 짓을 하기 마련이다. 집단이 되면 더 그렇다. 개인으로는 그짓을 바보스러운 짓이라고 생각하더라도, 집단의 다른 사람들이 그일을 멋지게 여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중략) 종교는 대의에의 헌신을 신성한 가치로 바꿔놓는다. (중략) 복수에의 갈망도 헌신을 부추긴다. (중략) 친구들의 눈앞에서 명예와 존경을 보장하는 짜릿한 대의와 행동의 유혹입니다." (612~3쪽)

 

천사들도 발 딛기 두려워하는 곳

 

민주공화국, 개방자본주의, 유토피아를 지향하는 이데올로기의 배제라는 조건 속에서, 사람들과 관계의 폭이 넓어지고 있다. 다름을 선악으로 해석하는 편견도 조금 엷어졌고, 차이를 인정하고 이야기를 들어보려는 노력도 조금 한다. 생각의 변화가 행동의 변화를 가져왔고, 생각과 행동의 변화과정을 거치면서 폭력과 분노, 공동체의 보존을 위한 자기희생이 줄어든다. 조금 엷어지고 조금 노력하는 것만으로, 세상의 평화를 이룰 수 없지만, 편견과 야만에서 벗어나 조금씩 쌓여가는 생각과 행동들이, 끔찍한 폭력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것이다.

 

"폭력감소는 특정문화에서 특정시점에 갖춰진 정치, 경제, 이데올로기의 조건들 때문이었다. 그 조건들이 역전되면, 폭력은 언제라도 다시 늘 수 있다." (619쪽)

 

무신론을 선언하고픈 수많은 종교인 시민들이, 세속주의의 경계를 넘지 못하는 각 종교의 근본주의자들의 위협을 피해, 종교인으로 행세할 수밖에 없다. 아직까지는 이런 야만의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조금 조심하며 살면 된다.

 

완전히 다른 주제이기는 하지만, 미국의 대외정책이 세계 민주주의를 거스르고 독재를 지원했기 때문에, 제3세계와 이슬람문화권에서 미국을 싫어하는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종교는 모호한 비유와 은유 allegory, 아무도 읽지않는 책 - 경전에 대한 애착 감정, 그밖의 여러 무해한 위선 - 과부와 고아들을 보살피라는 설교들에 기반하여 융성한다. 성경에 대한 미국인들의 헌신처럼, 샤리아에 대한 무슬림의 헌신은, 그들이 자기네 문화에서 최고라고 여기는 착한 태도들에 대한 유대감의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 (중략) 현실에서도 샤리아를 자유스럽고 새롭게 읽어낸 해석이, 근본주의의 해석에 우세하곤 한다. (중략) 많은 무슬림은 미국이 이슬람권에 민주주의가 전파되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중략) 누가 뭐래도 미국은 독재체제를 후원했고, (중략) 1953년에는 민주주의 방식으로 선출된 이란의 모사데트 정권 전복을 거들었으니까." (628쪽)

 

* 밑함수 power function : 영어를 이상한 한자어(일본식 한자어? 冪函數) 번역을 해놓은 것이 몹시 걸려서 밑함수로 번역한다. 지수함수와 달리 지수를 고정하고, 밑이 변하는 함수이니 밑함수라고 번역한다. 밑함수는 두툼한 꼬리모양으로 그래프가 그려지고, 일정한 한계를 넘어서면 어마어마한 숫자로 커지거나 작아지는 함수를 말한다. 별것도 아닌데, 설명이 너무 어렵다. y=x2의 그래프를 기본으로 생각해 보면 된다. x값이 0에서 3까지 그리 큰 변화가 일어나지 않지만, 그 이후로는 그래프가 급격히 상승해서 좌표밖으로 튕겨나가는 느낌이 난다. 반대로 작아질 때도 빠르게 작아진다.

 

제발,

 

"세계에 폭력의 할당량이 있다는 사고방식, 그래서 한곳의 휴전이 다른 곳의 새로운 전쟁으로 환생한다는 생각, 막간의 평화는 군사 긴장이 차올라서 분출구를 찾을 때까지 중간휴식일 뿐이라는 생각은, 사실에 비추어 틀렸다." (646쪽)

 

[ 7장 ] 권리혁명

 

놀이에서부터 또는 놀이까지, 폭력이 감소하기 시작했다.

 

"우리 아이들에게 남을 아프게해서 이기는 법을 가르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합니다. (중략) 피구의 운명은 폭력감소의 또다른 신호이다." (651쪽)

 

 

시민권, 그리고 린치와 인종 포그롬의 감소 * pogrom 조직에 의한 집단살해

 

dk

 

(to be continued like reading a new testa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