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이나 목사님, 신부님, 수녀님을 사람 이상으로 숭배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주변의 모르는 분들을 만날때 선생님이라고 높여 부르듯이 스님이나 신부님이라고 부른다.
종교를 업으로 살아가는 분들을 "신의 대리인"으로 무작정 존경하지 않는다.
그분들이 인간으로서 모범을 보여줄 때, 인간으로서 존경한다.
명진스님이 책을 새로 내셨다.
출판사는 평화의 길.
10년 전에 '스님은 사춘기'라는 책을 냈을 때와
질문이 똑같기 때문에 '아직도 사춘기'라 했다.
'나는 누구인가?'
'진리란 무엇인가?'
'어떤 게 잘 사는 것인가?'
여전히 사춘기에 머물러 계셔서인지
어른들이 해야 하는 봉은사 주지에서 쫓겨나고,
조계종 총무원으로부터 승적을 박탈당하셨다.
마음 편하게 살고는 있는데,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하니 책을 사달라고 하셔서
알라딘에서 책을 구입하고,
'명진 tv'도 구독한 다음에 광고를 열심히 봐 드리고 있다.
"지공선사의 시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울안의 닭, 배불러도 솥안에 삶아지고 (농계 유식 탕와근)
들판의 학, 배고파도 천지가 자유롭네 (야계 무량 천지관)." (12쪽)
명진 스님이 좋은 것은,
지공의 아름다운 선시를 읽으라고 그냥 놔두는 것이 아니라,
분명하게 결론을 내려 버리신다.
열린 상태로 두면 멋지기는 한데,
번뇌가 많은 중생들은,
선택하지 말아야 할 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명진 선생님은,
그래서는 안되고,
지공선사도 그러지 말라고 이 시를 쓴 것이라고,
단순명쾌하게 결론을 내려주신다.
"묶여있는 안락함보다는 두려움 속의 자유를 추구하십시오.
(중략) 고독한 늑대가 되십시오." (13쪽)
이것저것을 하며 놀다보니 어느덧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침대에 누워 다시 책을 보는데, 이 구절이 눈에 들어온다. 언제나 이런 구절들이 눈에 들어온다. 분명한 지식을 전하지 못하고 애매하게, 잘 모르는 이상한 말을 하려거든 차라리 모른다고 인정하는 말이 좋다.
비단길 같이 부드러운 손길에 묶여사는 것 또한 길들여진 것이다. 그렇게 길들여져 살고 싶은데, 그렇게 살지 말라 하시니 마음이 불편하다. 불편한 마음으로는 살지 못한다. 길들여진 삶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생명답게 살다가 죽으리라.
"절집에 들어와서 공부하다 보면 깨달음을 얻어야겠다, 도를 이루어야겠다는 욕망이 붙습니다. (중략) 나쁜 가치에 대해서는 누구나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종교처럼 좋은 가치에 갇히면 벗어나기 힘듭니다. 불교나 부처같은 좋은 가치가 더 무서운 굴레가 되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구하고 부처가 되길 바라는 것도 욕심입니다. (중략) 선업에 묶여있는 것은 명주실로 부드럽게 짠 밧줄로 나를 묶어놓은 것과 같고, 약업에 묶여 있는 것은 가시가 촘촘히 박힌 철조망으로 나를 묶어놓은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54쪽)
세상이 혼탁한 것은 현명하지 못한 뭇생명들이 분탕질을 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현명하게 살려고 노력은 했지만 현명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그런데, 명진 스님은 현명하다는 것을 뭉게버린다. 생명의 발랄한 즐거움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는 것이 아쉽지만 현명하게 살려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명쾌하게 말씀해 주신다. 맞지 않나? 수영을 하려면 근육을 키워야하고, 거친 파도에서 몸을 띄우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훈련해야 하지 않는가. 고통 속에서 스스로를 단련해야 한다. 돈으로 고통을 우회하고, 권력으로 경쟁을 우회하고, 잔머리로 깨달은 것처럼 행세한다면 진정한 삶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없다.
"큰 비가 내려서 팔당댐의 문을 열어놓았습니다. 그런데 흐르는 그 물살을 헤엄쳐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과연 그게 올라가질까요? 자꾸 떠내려가겠죠. 그래도 헤엄쳐 올라가려고 열심히 애를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들 그 사람을 미련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영리한' 사람이라면 둑방에 앉아 물이 좀 잦아지기를 기다렸다가 나중에 헤엄쳐 올라가려고 할 겁니다. (중략) 그런데 떠밀려가면서도 줄기차게 헤엄쳐 올라가던 '미련한' 사람한테는 수영에 필요한 근육들이 어깨와 팔에 생깁니다. 물살이 좀 잦아지니까 한 번만 물을 잡아줘도 죽죽 올라갑니다. (중략) 깨달음이니 견성이니 해탈이니 하는 것은 그렇게 되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고, 다만 내가 나를 모르기 때문에 나를 향해 끝없이 물어가는 사람. 바로 그 마음속에 수행의 본래 모습이 존재합니다." (74~76쪽)
(to be continued like reading the new testa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