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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농사 이야기

density is destiny 들깨를 베다_211013 trece de octubre el miércoles_тринадцать Октябрь среда

9시 반에 들깨를 베러 새 낫을 들고 밭으로 갔다. 계속되는 비로 혹시 썩지나 않았을까 걱정은 되지만 그냥 베기로 했다. 털어보기 전에는 알 수 없으니. 언제 비가 왔냐는 듯 들깨 줄기는 바스락 바스락 소리를 낸다. 어제 오후 5시까지 내리던 비는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잘 자란 들깨 줄기는 굵기가 엄지손가락 굵기 보다 굵어서 낫을 힘차게 휘둘러야 했다. 다칠까 무섭다. 들깨를 충분히 휘어서 낫을 대면 굵은 줄기도 낫을 휘두르지 않고 벨 수 있다. 다칠게 무서워지면 그렇게 베고, 베는 일이 귀찮아서 아무 생각이 없어지면 낫을 휘두른다. 인간이여.

 

들깨를 안전하게 베어서 하루 정도 잘 말려야 한다.

 

첫 번째 고비는 불과 세 개의 들깨 줄기를 베었을 때 왔다. 자꾸 걸린다. 내가 잡아서 벤 줄기를 땅바닥에 얌전하게 세워 놓아야 들깨를 땅에 쏟지 않고 잘 말릴 수가 있다. 불행하게도 내가 벤 줄기가 아직 베지 않은 줄기에 걸려서 들깨가 자꾸만 땅으로 쏟아진다. 헛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일을 멈췄다. 방법이 없다. 다시 줄기를 벤다. 걸린다. 땅에 떨어지는 들깨 소리가 천둥이 치는 것처럼 가슴을 친다. 일을 멈춘다.

 

일을 멈추고 들깨 밭을 둘러보았다. 약 200평. 사실 얼마 안된다. 그런데, 지금 나는 열포기도 베지 못했다. 하아. density is destiny.

 

들깨를 안전하게 베어 말리는 것도 일의 목표지만 오늘 중으로 들깨를 베는 것도 일의 목표다. 200평의 들깨가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그 압력으로 들깨를 안전하게 베어야 한다는 생각이 점점 희미해진다. 들깨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점점 더 희미해지기 시작한다. 월말 김어준의 라캉을 들었다. 잘 들린다.

 

들깨를 베었다. 일을 끝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최대한 안전하게. 땅에 떨어지는 들깨는 땅의 것이니 신경쓰지 말고. 멀리서 어머니가 낫질을 하고 계신다. 낫을 휘두르는 모습이 너무 불안하다. 그냥 가셔도 되는데. 일을 끝내야 하니 어머니에 대한 걱정도 점점 희미해진다.

 

한 시간이 넘고, 두 시간이 넘자 땅에 떨어지는 들깨도, 어머니의 위험한 낫질도, 일을 끝내야 한다는 목표도 모두 사라지고, 피곤한 내 몸을 안전하게 지켜야 한다는 생각만 남는다. 월말 김어준의 과학이야기가 피곤한 내 영혼을 위로한다. 시아노 박테리아 cyanobacteria. 물을 분해하는 광합성 과정에 성공한 유일한 박테리아. 35억년 전 화석이 가장 오래된 것이며, 물이 있는 곳이며 어디에서든 살 수 있다. 바닷물, 눈 속 또는 80도의 뜨거운 온천 물속에서도. 태양빛을 받아 물을 이용해서 녹말을 만들어 스스로 성장하고 분열하며, 산소를 내 뱉는다. 지구에 산소를 공급한다. 산소는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를 태어나게 하고, 숨 쉴 수 있게 한다. 위대한 Cyanobacteria.

 

들깨 베는 일은 끝났다. 들깨가 마르면 들깨를 털어야 한다. 그럴려면 부직포와 비닐을 걷고 이랑을 제거해 평평한 땅을 만들어야 한다. 월말 김어준의 음악이야기를 듣는다. 인종차별주의자이자 난봉꾼, 남의 돈을 빌려 남의 돈을 갚는 방탕한 자본주의자, 자신의 음악을 인정하고 보호해 준 친구 리스트의 딸과 결혼하는 배은망덕한 자. 바그너.

 

1시 반까지 네 시간을 꼬박 일하고 점심을 먹고 오징어 게임을 봤다. 1, 2화. 기생충처럼 매우 불편하다. 뒷 편이 궁금하고. 막장 인생들이 최소한 500명은 될텐데, 그 중 한 명이라도 구제할 수 있을까. 내 힘으로?

 

함백산 만항재의 편백나무 야생화 숲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