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멀리서 바라보니 희끗한 잡티가 보여서 뭐 저런 산이 있었나 싶었다. 친구가 꼭 가보라고 해서 왔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는다.
광주 상무지구 숙소에서 아침을 먹었다. 8시. 사장님이 화가 나셨다. 버려지는 음식들 때문에. 하얀 쌀밥에 미역국으로 아침을 먹고, 샌드위치에 토마토와 스크램블 에그로 아침을 먹었다. 배가 부르다. 너무 많이 먹었나 보다.
진도 읍내까지는 90분이 걸린다. 비가 내렸다 그쳤다를 반복하다가 갑자기 해가 쨍하게 난다. 시장에 들러 포도와 오징어, 차례주를 사서 차에 싣고 산소로 갔다. 작은 아버지께서 두 차례나 벌초를 했는데도 온통 풀밭이다. 그래도 걸어 다닐만하다. 낫으로 간단하게 주변 정리를 한 다음에 차례로 술을 따라 놓고 절을 했다. 논을 팔았다고 손자들이 열심히 연구하고 있다고 커피 맛있게 드시라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구름이 짙게 드리워서 산소에 앉아서 노는 재미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 산하에'를 3절까지 불러드리고 묘소를 떠났다.
벌써 한 시가 넘었다. 달마고도까지는 약 55분이 걸린다. 가는 길에 숙소가 있으면 들어가려고 했는데, 달마고도의 중심인 미황사에서 5km 이상 떨어져 있다. 일단 달마고도를 먼저 걷기로 했다. 미황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달마고도 1코스를 왕복하기로. 약 1시간 예상. 예상일뿐.
15분 정도를 걸어가니 달마봉 정상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900m. 그리미가 정상까지 50분 정도 걸리니 달마봉에 다녀오는 것이 좋겠다고 한다. 모기가 엄청 달라붙는 가운데 모기 기피제를 온몸에 바르고 거친 산길을 오른다. 900m이니 금방 오를 것 같았는데, 당연히 착각이었다. 내려오는 등산객이 하는 말, 세 번 정도 숨 꼴딱 넘어가면 도착할 것이네. 900m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매우 가파르고 힘든 길이다. 게다가 그리미가 다칠 것을 염려하여 청바지로 옷을 갈아입으라고 한 것도 잘못이었다. 산을 오르는데 무슨 청바지를 입나.
40분을 올랐는데 산은 더 험악해진다. 그리미의 짧은 다리로는 도저히 산을 오를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어떻게 할까 하다가 정상 정복팀과 둘레길을 걷는 팀으로 나누기로 했다. 가족들은 모두 반대했지만 혼자라도 정상에 오르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아빠가 위험할 수도 있다며 천재가 따라나선다. 정상 정복을 한 다음에 산을 넘어서 2코스를 걸어 1코스로 돌아올테니 중간에서 만나기로 하고 각자의 길을 갔다. 가족은 함께 해야 하는데.
불과 10분 만에 정상에 도달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많은 험준한 고비들이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더 천천히 모두 함께 걸어 올라갔어야 했다. 그런데 그리미의 한숨 소리와 우주신의 1시간만 올라가고 돌아선다는 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나 자신도 사기가 떨어진다. 가족 모두가 정상을 정복하려는 생각이 무리한 욕심처럼 들렸다. 게다가 몸이 제일 약한 그리미는 청바지 차림이다.
해발 489m의 정상은 아름답고 뿌듯했지만 가족이 떨어져 있으니 마음이 쓸쓸하다. 이제 무사히 산을 내려가서 둘레길을 돌기만 하면 된다. 나와 천재는 정상에서 물을 한 모금씩 나눠 마셨지만 그리미와 우주신은 물이나 비상식량조차 없다. 내리막길과 둘레길은 먹을 것이 필요 없기는 할 것이다. 게다가 숲이 아주 깊다.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 달마봉으로 올라온 사람들은 다시 미황사로 내려가지 우리처럼 산을 넘어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길과 리본 표지에 의존해 끔찍한 경사의 산을 내려오는데, 천재가 혹시 다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된다. 등산화도 아닌 미끄럽고 얇은 운동화를 신고 왔기 때문이다. 지팡이는 귀찮아서 못쓰겠단다. 산을 내려가면 당장 두 아들을 위한 지팡이를 마련해야겠다. 등산화도.
조금 앞서서 길을 찾아간다. 시간은 4시. 해가 질려면 3시간은 더 있어야 하니 여유가 있다. 그런데도 마음 한 구석은 불안하다. 박달봉에서 길을 찾을 때도 네 번이나 지도를 다시 봐야 했다. 정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도를 찬찬히 다시 들여다보며 생각을 정돈해 보니 일단 도솔암 쪽으로 300m를 내려가면 북쪽 사면으로 내려가는 갈림길을 만나게 된다. 그래, 맞을 것이다.
바위가 설악산이나 황산처럼 아름다울수록 발 디딜 곳이 마땅치 않을 정도로 험하다. 우리 조상들은 짚신을 신고 이 길을 개척했을 테니 스마트폰과 등산화, 지팡이까지 갖춘 우리들이 안전하게 산을 내려가지 못할 이유가 없다. 아들에게 이 말을 하면서도 마음은 몹시 불안했다. 아들이 다치면 안 된다. 천천히 천천히.
나무로 만든 계단이 나왔다. 산은 더 험해졌다는 것이다. 눈을 들어 주변을 살펴보면 온통 낭떠러지다. 콩닥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그러나 쉼 없이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의 끝은 또 산길이다. 끝도 없이 내려간다.
그래 봤자 고작 20여 분이다. 올라올 때와는 달리 길이 편안해졌다. 아마도 가장 험한 길을 나무 계단으로 잘 정리해 놓았기 때문이리라. 드디어 문바우재 삼거리 도착. 살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달마봉에서 아들들은 영상통화로 장관을 함께 했다. 내려오는 길도 서로의 안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미라골 잔등에 도착해서 안내표지판을 보니 미황사까지는 4.5km가 남았다. 그리미와 우주신도 2코스에 접어들었다고 하니 20분 정도면 서로 만날 수 있으리라. 물과 간식도 없이 산길을 걷고 있을 두 사람을 생각하니 쉴 시간이 없다. 계속해서 걸었다.
달마고도는 아름다운 곳이 아니다. 머리속을 비우기에 좋은 곳이다. 아무 생각 없이 끝없이 발걸음을 옮겨 놓아야 한다. 잘 정리된 숲길이 고요하다. 달마산 능선의 멋진 부처 바위들은 아주 가끔 눈에 들어온다. 남쪽 사면과는 달리 북쪽 사면은 흐르는 물이 없어서인지 모기가 없다. 걷기에 상쾌하다. 남쪽 사면은 길도 진흙탕이고 물이 많아서 산모기들의 천국이다. 그리미와 우주신은 모기 기피제도 없이 우산으로 모기들을 물리쳐가며 어렵게 전진하고 있다.
계곡물이 흐르는 곳에서 쉬고 있던 그리미와 우주신을 만났다. 물과 간식을 서로 나누며 무사귀환을 기뻐했다. 이제 한 시간만 더 걸어가면 된다. 걸어오는 내내 그리미와 우주신은 나의 목표 지향의 태도, 가족들이 함께 해야 한다면서도 언제나 자신의 기쁨만을 추구하는 태도를 비판했다. 설정한 목표는 대개 어려움을 겪어야 도달할 수 있다. 포기한다고 해서 큰 문제는 없지만 꼭 포기해야만 하는 것일까. 포기하지 않고 위험을 감수하는 것은 과도한 목표지향의 성과주의일까.
미황사까지는 멀고도 멀었다. 3km 정도인데. 모기 기피제를 온몸에 발라가면서 열심히 걸었다. 가족이 함께 하니 확실히 아무런 두려움이 없다. 포장된 임도 구간이 나타나고 저무는 해가 온몸을 때린다. 그리미가 현기증이 난다며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주저 앉지도 못한다. 마실 물도 없다. 사탕 두 개를 씹으며 원기가 회복되기를 기다렸다. 그늘 속에서 몸의 열기가 식으니 다시 걸을 기운이 생긴다. 그리미의 발가락 하나에서 피가 흐른다.
아들들을 앞세워 보내고 우리는 천천히 걸었다. 숲길로 들어서니 바람은 불지 않아도 온도가 낮아졌다. 게다가 모기들도 기온이 떨어지자 거의 덤벼들지 않는다. 조금만 더 천천히.
6시가 넘어서 몸을 질질 끌고 미황사에 도착했다.
계단을 오르는 순간 장엄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거대한 달마능선을 병풍처럼 두르고 절 건물이 멋지게 들어앉아 있다. 신라때 인도인이 보내준 소와 불경, 부처님을 모신 곳이다. 소의 울음소리가 아름답고 황금색 옷을 입고 불경을 전한 인도인을 잊지 않기 위해 미황사 美黃寺 라고 이름 붙인 절이다.
멀리서 봤을 때 희끄무레한 잡티처럼 보였던 달마산의 능선은 미황사를 둘러싼 금강산이었다. 예불시간을 알리는 범종 소리가 은은하다. 한참을 달마능선을 바라보다가 대웅전 위로 올랐다. 남해 바다를 바라본다. 스님이 독경을 시작한다. 독경소리의 은은한 울림이 온몸의 통증을 어루만져 준다. 배고픔과 목마름도 잊고 한참을 앉아서 뿌연 바다를 내려다 보았다. 그리미와 함께.
달마능선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해남으로 들어왔다. 명송횟집에서 8만원의 전어코스 요리를 주문하고 술을 마셨다. 정말로 맛있는 전어회를 먹었다. 꼭 다시 와서 먹고 싶은 맛이다.
그리고 해남의 호텔 가족실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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