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 한 주를 개심사 뒷산 걷기로 잘 마무리했다. 왜목마을 너른 백사장과 바다를 끝으로 24시간의 짧은 여행을 마쳤다. 비가 오고 날이 추워서 그랬던지 부천으로 가는 서해안 고속도로의 소통도 매우 원활했다.
알프스 모텔을 나선 시간은 17일(토) 오전 9시 반이다. 아침이라고는 커피 한 잔에 낙하산 과자 두 개, 스콘 몇 조각이 전부였다. 오뚜기 미역 라면이 있기는 했지만 먹고 싶지 않아서 그냥 길을 나섰다. 서산 목장의 시원한 초원과 넓은 저수지, 연둣빛 어린잎들의 환영을 받으며 기분 좋게 출발했다. 개심사 900미터 전에서 수십 대의 차량이 늘어서 있어서 잠시 정체했지만 잠을 잘 잔 덕분인지 피곤한 줄 모르고 어제 산 간월암 앞 새우튀김을 먹으며 기다렸다. 하루가 지났어도 여전히 고소하다. 덕분에 깨끗한 주차장에 그랜다이저를 안전하게 주차할 수 있었다.
개심사의 청벚꽃과 겹벚꽃 주변으로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어서 어서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대웅전에 가족들 모두의 건강을 비는 절을 올리고 전망대로 오르는 숲길로 접어들었다.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숲길이었다. 족두리꽃들이 숨을 듯 반겨주고, 큰별꽃과 애기나리, 현호색 천지의 숲길에는 인적조차 드물어 평화로웠다.
등산지팡이에 의지해 산을 오르니 힘든 줄도 모르겠고, 낙엽 두터운 흙을 뚫고 올라오는 온갖 새싹들 덕분에 발걸음을 자주 멈추고 쉬었다. 전망대에서 용현 자연휴양림까지 이어지는 능선길과 임도는 평탄해서 더 좋았다. 입구에서 개떡 두 장과 보리차 두 개를 사서 올라왔는데, 전망대 직전에 다 먹어 버렸다. 쑥개떡의 향이 고소했다.
정자에 둘러앉아 점심을 먹는 단체 등산객이 아쉬웠다. 코로나 환자가 줄지 않고 있는데도 무엇을 믿는지 점심을 먹으며 호호 하하. 부디 아름다운 산행이 비극으로 이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오후 1시 20분까지 계속해서 걸어 올라가다가 발길을 돌렸다. 개심사로 오는 차편은 없을 것이 틀림없고, 일락사까지 다녀오기에는 비상식량도 물도 부족했다. 내려가는 길은 일사천리다. 쉽게 올라왔지만 결코 짧은 길이 아니었다. 다시 한번 개심사로 들어갔다가 오전보다 더 많은 인파로 북적이는 것을 보고 바로 발길을 돌렸다.
개심사의 자연스런 나무를 이용한 기둥들은 멋스러웠다. 목수의 솜씨가 놀라웠다. 석탑도 좋았고 삼존불의 표정도 색다른 느낌이었다.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한 계단과 담장도 오래된 절의 느낌을 그대로 살려주고 있다. 그래도 개심사의 뒷산이 한 열 배쯤 좋았다. 지팡이를 짚고 올라가면서 조용히 듣는 산새 소리도 그만이었다. 청벚꽃은 신기하지만 굳이 볼 필요 없는, 지나가다 스치면 봐도 좋은 그런 나무다.
개심사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서는 인내심이 필요했다. 더 많은 차들이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새우튀김과 오징어 튀김은 여전히 고소했고, 배고픔이 사라졌고, 길도 뚫렸다. 서산 마애삼존불까지 20여 분이 걸렸다.
백제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4세기 근초고왕 무렵일 것이다. 200년이 지나서 이곳 가야산 일대에 수많은 절들이 만들어지고 마애불도 모셔졌다. 백제 불교의 전성기를 간직한 곳이라 절터도 많고, 남아있는 절들도 많았다. 멋진 곳에 자리 잡았다.
마애불을 지나고 어제 들렸던 유기방 가옥을 지나 왜목마을로 갔다. 그저 그런 순댓국으로 점심 겸 저녁을 먹었다. 잘 먹고 잘 자야 하는데, 그러지 않는 것이 우리들의 여행이다. 바람이 불고 추웠다. 그래도 왜목마을의 바닷가를 걷는 즐거움은 컸다. 매우 멋진 바위들이 널려 있다. 아이들을 생각해서 새우튀김과 오징어 튀김을 샀는데, 간월암 앞의 튀김만 못하다.
16일(금) 아침을 먹고 삼양동을 나서서 검단에 들렀다가 부천 집에서 집을 챙겨나와 유기방 가옥으로 갔다. 5천 원이나 받는 입장료에 비해 수선화는 거의 다 졌다. 돈이 아까웠다. 3월 말에 왔으면 정말 좋았겠다. 그랬다면 벚꽃과 수선화가 만개한 아름다운 동산을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90%의 수선화가 졌는데도 대체로 괜찮다. 수선화의 향은 매우 강하다. 바람없는 날에 걸었다면 참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바람이 너무 강해서 코에 대고 맡아보지 않으면 알 수 없었다. 내년 3월 말에 다시 올 것을 약속하고 천천히 걷기를 즐겼다.
간월암은 서해 바다로 한 발 살짝 건너간 매우 독특한 암자였는데, 공사 중이었다. 느낌은 알겠지만 볼 수는 없었다. 한 1년 후에나 와 보는 것이 좋겠다. 그래도 서해 바다의 멋진 노을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유기방 가옥에서 불과 30분 거리에 있어서 두 곳을 연결해서 여행하기에 좋았다.
마트에 가서 저녁거리를 준비해서 펜션을 찾았지만, 방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알프스 모텔로 들어갔다. 양말과 왕뚜껑 김치라면을 받았다. 참치 회에 소주 한 컵을 아껴가며 마셨다. 방을 옮겨 잠자리에 들었으나 잘 잘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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