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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아름다운 한반도 여행

10분이면 평생의 짐을 내려놓기에 충분하다_210526 el veintiseis de mayo el miércoles_

비가 많이 내릴 것이라는 일기예보를 믿고 4시간 일찍 오전 10시에 화순으로 출발했다. 평일 낮이라 여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강북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경기도를 빠져나오는데 90분이 걸렸다. 세상에나.

 

다섯 시간 만에 화순 산소에 도착했다. 잘 닦여진 임도를 거쳐 새로 예쁘게 떼를 입힌 산소를 만났다. 10분. 그 짧은 시간을 위해 얼마나 많은 세월을 그리워했을까. 아침부터 두 분은 설레셨다. 다행히 가파른 산길을 지팡이에 의지해 잘 올라가신다. 그리움의 눈물을 한참 쏟고 술을 올리고 절을 함으로써 거짓말처럼 가슴속의 응어리가 풀리시는 모양이다. 조상님들께 소박한 기쁨을 안겨드리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산소를 떠났다.

 

작은 마을은 기찻길을 품고 아늑하게 들어앉았다. 사람이 떠난 퇴락한 마을과는 달리 번듯한 집들이 들어서 있어서 한결 깔끔하다. 그 마을 깊숙이에 태양광 발전단지가 건설되어 있고, 오래전 할아버지께서 만들어 놓으신 땅 260평이 들어앉아있다. 결국 조상님들의 공간이 될 모양이다. 나는 반대다. 자연으로 돌아가시라.

 

 

저 멀리 누군가의 고향에 내 발자국 소리를 기다리는 아름다운 담장이 있다.

 

마지막 4, 5, 6대 조상들에게 술을 올리고 절을 했다. 아무런 응답이 없지만 어머님은 계속해서 자손들의 복을 비신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으니 후손을 잇게 해 달라. 하신 일이 있으시니 당당하게 요구하실 수 있다. 중천에서 아귀가 되어 고통스러운 날을 보내시지 않으셨을 테니 그 모든 것이 종손과 종부의 덕이다. 누가 알랴마는. 그래서 종부는 할아버지 할머니께 당당할 수 있다. 그러니 귀신 할아버지들께서 움직이셔야겠다.

 

산 노을이 고왔고, 개구리 울음소리가 가까웠다. 구비구비 무등산 골짜기를 건너 백아산으로 왔다. 졸음이 쏟아진다.

 

아무나 이런 그림을 만들지 못한다

 

지리산 자락에서 포근하게 잘 자고 일어났다. 산책을 하고 싶었는데 비가 계속 내린다. 공부를 하며 좀 더 쉬다가 보니 나가야 할 시간이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나주 송학리로 간다. 두 군데의 산을 오르내리며 성묘를 하고 났더니 점심시간이다. 하얀집으로 나주곰탕을 먹으러 갔다. 세 그릇을 시켜 넷이서 나눠 먹다가 혼이 났다. 남기더라도 네 그릇을 시켜야 했던 모양이다. 포장을 하고 싶었는데 분위기가 험악해져서 그러지를 못했다.

 

산이 구불구불 아름다운 곳이라 천리포로 가는 길이 좋았다. 계속 이런 길을 가고 싶다고 하셔서 30분을 더 달리고 났더니 김제 만경 호남평야가 나온다. 숲이 사라지니 밋밋하다. 다시 고속도로를 타고 서산으로 달렸다. 천리포 수목원에 도착해서 해 지는 광경을 오래도록 보았다. 숲길도 걸었다. 좋았다.

 

먹을 만한 곳이 없다. 식당의 음식들은 비싸고 맛도 없었다. 고기를 사다가 요리해 먹고 싶었지만 대패 삼겹살 말고는 없다. 생선구이를 포장해서 숙소로 가져 가지만 발걸음이 무겁다. 천리포를 들어갈 때는 반드시 맛있게 조리할 식재료를 사 들고 가야 한다. 게국지와 우럭젓국은 먹을 만한 음식이 아니다. 그나마 병어조림이 조금 낫다. 먹을 만한 식당이 없다는 것을 명심하자.

 

비릿한 생선구이에 소주를 마시며 두 분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버지는 일대기를 쓰고 싶어 하셨고, 어머니는 마음에 써서 고치고 계셨다. 11시가 넘어도 이야기는 그칠 줄 모른다. 아쉬운 마음으로 자리를 정리하고 잠자리에 든 시간이 11시 반이다. 어머니는 밤새 잠들지 못하셨다. 사랑과 울분에 겨워.

 

밤새 내렸는데 아침에도 여전히 비가 쏟아진다. 바닷가의 물은 집을 삼킬 듯이 몰려왔다가 차 한 잔 마시는 사이에 저만치 물러났다. 섬으로 향한 길이 열리고, 독살에 갇힌 물고기를 주워내는 어부의 손길에 여유가 묻어있다. 차가운 바닷물에 떨리는 몸은 보이지 않으니 평화롭게만 느껴진다.

 

남겨 둔 생선구이와 병어조림, 쇠고기 미역국에 햇반으로 아침을 먹었다. 27만원 하는 숙소지만 창문 너머 풍경 값이 20만 원이다.

 

짐을 옮기고 산책에 나선다. 네 대의 사진기도 한 대처럼 바쁘다. 촉촉히 내린 비로 손에 든 장비는 복잡하고 몸뚱이는 두툼하지만 상쾌하다. 비는 더 이상 내리지 않는다.

 

아름다움은 어느 하나의 선과 색이 아니라 어울림이다.

 

 

꽃공 알리움. 유향처럼 사랑하지 않기를.

 

천리포 수목원을 떠나자 주변의 모든 경관이 평가절하된다. 솜씨 없는 게장집일망정 나누어 먹을 게장을 사들고, 잠이 쏟아지는 속에서도 동탄까지 왔다.

 

시암의 음식은 우럭젓국 보다 백 배는 맛있다. 쏨땀, 얌운센, 게 커리, 항정살 구이. 팟타이를 먹지 못한 것이 매우 아쉬웠지만 빈 공간이 없었다. 눈도 배도 무거워진다. 동탄 호수를 산책하며 간신히 빈 자리를 얻었다. 모처럼만에 아들의 삶터를 찾은 부모님의 마음은 어떨까. 아무래도 잘못 생각한 모양이다. 번잡하여 앉을자리도 없을 시간대에 왔어야 했다.

 

이제 남은 90분. 막힐 듯 막히지 않는 돈마저 제대로 모르는 천박한 강남을 뺑뺑 돌아서, 가치 보다 비싼 명동과 삼청동, 북악스카이웨이를 거쳐 시민들이 사는 삼양동에 도착했다. 그리고 쓰러질 듯 침대에 누워 30분을 잤다. 만들어진 기운으로 부천에 무사히 도착했다. 지난 2주 동안 쉼 없이 움직였다. 푹 쉬자.

 

어울려 아름답다. 알아서 앓아서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