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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아름다운 한반도 여행

민주주의를 사랑하므로 민주의산에 오르다_210826~27

이제 아버지 산소를 가는 길은 한반도 여행길이 되었다.

 

오전 11시. 고속도로에는 차가 많다. 화물차들의 행렬은 대한민국 경제의 건강함을 증명한다. 무주에서 빠져나와 벌초를 할 수 있도록 낫과 호미를 사서 차에 싣고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는다. 산채비빔밥 정식. 만 원의 행복이었다. 나오는 길에 머루주와 머루 소주를 사들고 민주지산 휴양림으로. 

 

시험공부를 하느라 지난 한 달 동안 일과 공부만 하다가 오랜만에 산을 오른다. 산장의 관리자는 다섯 시면 해가 진단다. 다섯 시가 조금 넘어서 안전을 위해 등산을 멈추고 숙소로 발길을 돌렸다. 아니었다. 안전을 위한 협박이었다. 해는 7시가 넘어서야 떨어졌다. 

 

산은 마치 원시림처럼 울창하다. 깨끗한 계곡물은 마을 사람들의 식수원이다. 거대한 돌로 등산로를 깔아놓았다. 천 년이 지나도 손상되지 않을 바위길이다. 반달가슴곰이 나타날 수도 있으니 주의하라는 문구가 눈에 확 들어온다. 반달가슴곰을 살려야 하는데, 산의 주인은 반달가슴곰만은 아니다. 안전하게 산을 둘러볼 대책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사람 몇몇이 죽거나 다치고 나서야 안타깝다면서 대책을 마련하는 모습을 보일까 두렵다. 자연샹태의 반달곰들이 사라진 것은 자연선택의 결과일까 아닐까. 인간 문명에 밀려난 모든 자연들은 진화의 결과일까 아닐까. 

 

민주지산은 일제가 남긴 유산이다. 우리 고유의 말인 민두름산을 일본식 한자로 바꿔서 이렇게 되었다. 대한민국의  한자로 바꾸어야 한다. 민주지산 民主山. 꼭 한자로 하지 않아도 된다. '민주의산'도 좋다. 그래 민주의산이다. 대한민국에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산이 하나쯤 있어도 좋을 것이다. 

 

"불리는 '민주지산'이라는 이름은 일제시대에 처음 공식화되었는데, 일제가 없던 지명을 지어내지는 않았다. 원래 지역주민들은 이 산을 민두름산(밋밋한 산)이라고 불렀는데, 이를 한자로 음차 하면서 민두름을 민주지(岷周之)라고 하였던 것. 이는 이두식 표기이다. '두름'에 대응하여 두루 주(周)를 사용한 것. (중략) 1998년 4월 대한민국 육군 특전사 대원들이 이 곳에서 천리행군을 하던 도중 갑작스러운 악천후로 고립되어서 결국 저체온증과 탈진으로 6명이 사망한 참사가 벌어진 곳이기 때문이다. 이 참사가 제5공수특전여단 동사사고" - 나무 위키 중에서

 

민주의산과 관련된 또 하나의 인물은 빨치산 이현상이다. 그는 전북 무주의 부유한 지주 집안에서 태어나 서울 중앙고보에서 유학하던 도중 1926년 6. 10 만세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6개월의 옥살이를 한다. 이때부터 무려 27년 동안, 지리산에서 빨치산으로 죽음을 맞이한 1953년까지 무수한 감옥생활과 지하생활을 한다. 특히 1939년에 경성콤그룹을 결성한 뒤에 일제에 체포되었을 때는 죽음의 문턱에 있었다. 해방이후부터 1948년 남북정치협상회의에 참여하기 위해 이북에 머문 6개월을 포함한 3년여 동안의 생활이 그로서는 유일하게 공개된 활동을 할 수 있었던 시절이다. 그는 북한에 머물렀을 때 모스크바 유학을 꿈꾸었으나 김일성 정권은 그를 강동정치학교에 보내 유격대로 훈련시켜 남파한다. 민주의산에서 가장 큰 규모의 유격대를 이끌기도 하지만 거의 궤멸된다. 죽음 이후에 북에 남겨둔 그의 아들이 모스크바대학에서 유학을 하고 김일성 대학의 교수가 되었으니 자식을 통해 꿈은 이루었다. 남한에 남겨진 또 한 명의 아들은 비록 유복자로 태어났지만 교사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죽음 이후에 북한에서 제1호 혁명 열사가 되었다.

 

물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서 깊은 잠을 자지 못했다. 창문을 모두 닫고서야 겨우 잠에 빠져 들었다가 6시 40분에 일어나 커피와 빵으로 요기를 하고 산을 오른다. 입구에서 그리미와 말다툼이 나서 무려 30분을 실랑이를 하다가 잘못하면 모든 행복이 날아가겠다 싶어서 화해를 하고 다시 산을 오른다. 민주주의와 개혁이 힘들고 어려운 고비를 넘겨야 하는 것처럼 민주의산을 오르기 위해서는 힘들고 어려운 고비를 넘겨야 했다.

 

감정뿐만이 아니라 내리는 비도 우리를 지치게 했다. 끝없는 오르막과 내리는 비. 몇 번이나 발걸음을 돌리고 싶었다. 그리미에게는 말하지 못했지만, 시민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젊은이들의 원혼이 잠든 곳이라 더욱 마음이 무거웠다.

 

비가 쏟아지고 10분만 더 가보자고 했다. 오르막은 끝날 줄 모르고 아무런 표지판도 없다.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는 유일한 분에게 정상까지 얼마나 남았느냐고 물었더니 30분이란다. 아직도. 지금 내리는 비는 숲이 충분히 받아줄 수 있다. 조금만 더 올라가 보자.

 

돌계단과 나무계단을 오르고 산비탈을 다 오르자 삼거리가 나온다. 민주의산 300m. 어, 그러면 갈만하다. 아직 9시가 안 되었다. 정상이 가까워질수록 빗방울이 굵어진다. 200미터, 100미터. 정상이다. 뜨거운 포옹으로 화해를 제대로 한다. 폭우가 쏟아진다.

 

기뻐할 틈도 없이 다시 산을 내려왔다. 정상을 20분 정도 벗어나자 다시 비가 잦아든다. 정상 주변에 강한 비구름이 모여 있었던 모양이다. 용화의 발원지도 만났다. 간간이 제법 강한 비가 내렸지만 이미 온몸이 젖어 있어서 큰 어려움은 없었다.

 

바위로 포장된 길은 매우 미끄러워서 힘을 많이 쓰게 하고, 마침내 다리가 후들거린다. 보통은 내려오는 길이 훨씬 빨라야 하는데, 바위길이 미끄러워서 속도를 내지 못한다. 올라갈 때는 한 손에 우산을 쓰고 갈 수 있었지만 내려올 때는 지팡이 두 개를 모두 사용해야 해서 내리는 비를 그대로 맞아야 했다. 흠뻑 젖은 모자이지만 얼굴을 보호해주니 걸을만하다. 미끄러질 위기를 몇 번이나 넘기고 드디어 그랜다이저가 세워진 곳에 무사히 도착했다.

 

걸레와 손수건으로 몸을 대충 닦고 숙소로 이동한다. 개울물이 불어났으면 그랜다이저는 오도 가도 못할 상황이다. 그리미의 예상대로 계곡물은 그다지 불어있지 않았다. 

 

버섯찌개로 늦은 아침 겸 이른 점심을 먹고 11시에 숙소를 나설 수 있었다. 포기하지 않아서 참 행복했던 산행이었다.

전망대에서 바라 본 백두대간 능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