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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원이야기

힘들었지만 뿌듯했던 첫 가원의 날_210227 el veintisiete de febrero el sábado_двадцать Семь Суббота

2021년 2월 26일과 27일은 우리 집 최초의 가원의 날이다. 그동안 무일농원에 모여서 많은 일들을 함께 했지만 이런 의도를 가지고 모임을 갖지는 못했다. 그래서 기억해야 할 날이 되었다.

 

원래 계획은 개학전 마지막 휴일이라 생각해서 2박 3일 동안 걷기 여행을 다녀와서 일죽에서 합류하여 가원의 날 행사를 가지려고 했다. 그런데, 장모님이 치아 수술을 받으시게 되어 수술 전에 방문해야 했기에 걷기 여행 계획은 취소하고 처갓집을 방문하여 식사하고 북한산을 걷는 것으로 대체하였다.

 

저녁 8시가 넘어 처갓집을 출발하여 10시경에 농원에 도착했다. 어머니는 오늘이 가원의 날인 것을 모르신다. 개학하기 전에 온 가족이 들르는 것으로만 알고 계신다. 가원의 날을 계획한 이유 중의 하나가 이제 고령이신 어머니께 당신이 키우셨던 자손들의 얼굴을 되도록 많이 보여드리는 것이다. 3주에 한 번 가원의 날을 가져도 1년에 어머니와 함께 하는 날은 열흘 남짓일 것이다. 365일 중에 고작 열흘이다. 더 자주 모이고 싶지만 다들 각자의 삶의 길을 걸어야 하기에 시간을 더 뺏을 수는 없다.

 

가족 경제를 책임지느라 힘든 노동을 계속하고 있는 그리미는 시골의 삶이 꿈이었다. 예쁜 작업실에서 그림도 그리고 노래도 부르고 자연과 교감하며 사는 것이 그리미의 행복이다. 그래서 귀농학교를 다녔고, 땅을 임대해서 주말마다 농사를 짓게 되었다. 그러면서 하루도 쉬는 날이 없게 되어 건강이 나빠졌다. 지난 10여 년을 농원에 자주 오게 하지 않은 것은 혹시 일하고 놀며 즐기다가 쉬지를 못해 건강을 상하게 할까 싶어서였다. 그러다가 다시 생각을 정리해 보니, 우리가 이 농원을 떠날 것도 아니고 평생을 이곳에서 살아야 하는데, 이곳에서의 삶을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일농원의 환경과 익숙해지고, 사람들과 익숙해지고, 노동과 익숙해지는 것이 좋은 일이다. 그리하여 가원의 날에 동참한 것이다. 다만 힘든 노동에는 참여하지 말고, 꽃과 나물과 식사 준비와 익히기에 충실하자.

 

천재나 우주신은 대학원에 들어갔으니 지식인의 길로 접어들었다. 땅을 떠난 지식인은 삶에서 유리된 것이다. 삶과의 연결을 계속 유지해야 인간과 자연에 대한 사랑이 유지될 수 있는데, 학문의 세계나 도시 생활에만 빠져 있으면 아무래도 각박해질 위험이 있다. 그래서 가원에서 자연과 교감하는 노동을 하면서 삶과의 연결을 유지해야 한다. 농사일도 하고, 자연과 더불어 놀다 보면 기분 전환도 될 것이다. 더불어 내 농사일도 돕는다. 이번 첫 가원의 날에 천재는 농원에 정수기 설치하는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필터는 농원으로 잘 보냈는데, 파우셋(정수기 수전)을 부천으로 보내는 바람에 일을 완벽하게 끝내지는 못했지만 95%를 마무리했다. 매우 뿌듯한 일이다. 우주신은 해먹을 설치할 계획이 있었다고는 하는데, 까맣게 잊었고, 집안일을 돕는 것으로 첫 가원의 날을 덜 즐겁게 보낸 듯하다.

 

나로 말하자면 계획이 많았다. 집 외벽을 도색하고, 바다 구경도 가고, 아들들 졸업 사진도 찍고, 흙도 정리하고, 비닐도 걷고, 캠핑도 하고, 퇴비 생산용 화장실도 짓고 야외 샤워실도 확대하고, 정원도 가꾸고, 돌탑도 쌓고 등등 끝도 없다. 혼자서는 이 일들 중 어떤 일도 즐겁지가 않다. 견뎌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가족들과 함께 하니 완전히 다른 느낌이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자는 제안만이 잘 지켜지지 않았다.  나머지는 전부 다 좋았다. 천재가 졸업 가운을 빌려서 할머니, 외갓집 식구들과 기념사진을 찍은 것에서 출발했다. 교정은 아니지만 실내에서 찍으니 날도 춥지 않고 힘이 안 들어서 좋았다. 다음부터는 굳이 졸업식장에 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온 가족이 춥거나 더운 날에 교정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돌아다닐 이유가 없다.

 

함께 아침을 먹고, 쥐똥나무 가지치기를 하고, 냉이를 캐고, 나무를 정리하고, 타버린 돼지 등갈비 찜에 점심을 먹고 딸기로 입가심을 했다. 맥주 한 병으로 반주도 했다. 막걸리가 있어야 했다는 반성이 있었으니 다음 가원의 날에는 막걸리를 준비해야겠다. 오랜만의 중노동으로 다들 점심을 먹고 쓰러져 쉬었다. 약간 정신이 돌아와서 집 바깥벽 색칠 작업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가지고 30여 분을 의논했다. 의견 일치는 보지 못했지만 대략의 틀은 나와서 페인트 가게에 가서 상의하기로 했다.

 

택배가 왔다고 해서 정수 필터를 받아 들고 금왕의 페인트 가게로 갔다. 오일 스테인은 덧칠할수록 진한 색으로 변경해야 한단다. 우리가 원하는 밝은 색으로는 불가능하다. 부천으로 돌아오는 길에 천재가 검색을 해 보니 오일 스테인을 세척하고 나면 색을 입힐 수 있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일 스테인 세척액 뿌리고 고압 세척기로 물을 뿌려 제거하는 작업을 먼저 해야 한다. 나는 하고 싶지 않은데 그리미를 포함해서 가족 모두는 귀찮더라도 예쁜 집을 위해서는 힘을 내서 일을 하자고 한다. 검토를 더 해야겠다.

 

금왕 시장에서 5만 원어치 고기를 사들고 돌아와 정수기 설치 작업에 들어갔다. 우주신은 잠을 퍼 자고 있고, 그리미는 안마 의자에서 푹 쉬고 있다. 약 한 시간에 걸쳐 정수기 필터를 설치하고(싱크대 하부에 나사못 2개만 6cm 간격으로 박으면 된다. 작업 공간이 좁아 쉽지는 않다), 파우셋을 설치할 준비를(싱크대 구멍 뚫기) 끝냈다. 찬물관에다 정수기 필터를 연결했다. 물이 새지 않도록 잘 결합만 해도 된다. 물을 틀어 십분 정도 물을 배출해 놓은 다음에 물을 받아서 마셔 보았다. 오, 물맛이 좋다. 성공이다. 총 14만 원이 들었고, 앞으로 6개월 이상은 추가 비용이 들 일이 없다.

 

저녁을 먹고 8시가 넘자 교통 상황이 풀린다. 어머니를 홀로 두고 부천으로 돌아오는 길에 차 안에서 바깥 벽 색칠하기 일에 대해 의논을 하고, 부천 집의 정수기도 농원의 정수기와 같은 것으로 바꾸기로 했다. 다만 싱크대가 십 년이 넘어서 교체를 검토하기로 했다.

 

매우 뿌듯한 첫 가원의 날이었다.

 

 

쥐똥나무 가지치기 중의 망중한. 톱 연주 중인 우주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