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총균쇠를 읽어야겠다. 그리고 백기완 선생님이 10년에 걸쳐 쓰신 유작 소설 '버선발 이야기'를 읽어야 한다. 니나들의 이야기를 쓰셨다고 한다. 재미없겠지만 한 가지라도 의미를 찾아 계승해야겠다. 버선발이 자신이 아닌 모든 니나들에게 땅을 나눠주는 이야기는 '한 가정 가원 만들기'와 같은 개념이다. 땅이 고르게 소유되어야 행복한 노나메기 세상이 될 수 있다. 버선발은 버선을 신은 발이 아니라 '벗은 발' 즉 맨발을 말한다.
제12장 식량 생산 창시와 문자 고안과의 밀접한 연관
문자를 만들어 내는 데 있어서 중요했던 일은 재산 상황이나 거래 상황을 기록하는 일이었다. 양이나 곡물의 분량과 거래 상대방을 기호로 간단하게 표시하기 시작하면서 문자의 싹이 트기 시작한 것이다.
"독립적으로 문자를 만들어 낸 것이 확실한 민족은 BC 3000년보다 다소 앞섰던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인과 BC 600년 이전의 멕시코 인디언들이다. (중략) 몇 세기에 걸쳐 회계 기술, 배열 방식, 기호 등이 발달하면서 곧 최초의 문자 체계가 형성되었다. (중략 / 우르크의 옛터에서) 수메르 문자 최초의 기호들은 각각 무엇을 가리키는지 식별할 수 있는 그림이었다. (중략) 화살 그림은 '화살'과 '목숨'을 모두 뜻하게 되었다. (중략) 언어학자들은 오늘날의 말장난에서도 흔히 발견되는 이 획기적인 혁신을 일컬어 '리버스(rebus, 그림 기호 문자 등을 맞추어 어구를 만드는 수수께끼 그림 - 역주) 원리'라고 부른다.
(중략) 고대 문자 체계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이집트의 상형 문자도 대체로 독립적인 발명의 소산으로 추측되고 있지만 중국 문자의 경우에 비하면 아이디어 확산에 의한 것이었다고 판단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다. 상형 문자는 BC 3000년경 거의 완성된 형태로 갑작스럽게 나타났다. (중략) 수메르 문자와 이집트 문자가 만들어진 후 이란, 크레타, 터키에서 나타난 문자 체계도(중략) 수상쩍기는 마찬가지다. 이들 문자는 각기 이집트나 수메르로부터 빌려온 것이 아닌 특이한 기호들을 사용하고 있지만 각 지역의 사람들은 당시 이웃 지역의 교역 상대자들이 쓰고 있던 문자를 모르고 있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중략) 이집트인들을 비롯한 여러 민족은 수메르인들로부터 문자에 대한 아이디어와 함께 어쩌면 몇 가지 원리까지 배웠고 그 밖의 몇 가지 원리와 글자들의 형태는 그 후에 스스로 고안했을 것이다." (318~339쪽)
수메르의 설형 문자가 발전하는 과정 중에서 가장 어려운 내용이 rebus에 대한 내용이다. 재레드의 설명만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어서 검색을 했더니 마침 서진영의 건축학과 석사학위 논문에 자세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그중 일부를 가져와 봤다. 그림을 발음이 비슷한 글자로 생각하고 만들어 낸 수수께끼 같은 새로운 문자나 글자를 만드는 것을 말한다. 역시 어렵다.
한자에는 파자破字가 있는데, 이 개념을 도입해 이해해 보면,
1) 쓰고 싶은 문장을 만든다 : Aide-toi et Dieu t'aiera!
2) 이 문장을 깨뜨려 비슷한 발음의 새로운 단어들의 조합으로 만든다 : E de toits, E de yeux, T de rats
3) 위 문장의 일부 단어를 그림으로 바꾼다 : 아래의 그림과 같이 바꾼다
4) 위 3) 문장을 제시하고 1)의 문장을 유추해 내도록 하는 것이 rebus다.
수메르 문자 발전 과정에서 리버스를 다시 한번 위 서진영의 논문에서 인용한다.
"수메르인과 이집트인들도 간단한 리버스(rebus)체계를 이용하였다. 그림문자를 사용할 때, 대상 자체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을 나타내는 소리를 기록하는 아이디어를 창안했다. 예를 들어 양탄자를 나타내는 “carpet"을 쓰고 싶다면, 그 단어의 음소(音素-소리값)인 ‘car(차)’ ‘pet(애완동물)’의 그림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두 그림은 car와 pet으로 자연스럽게 연결하여 읽으면 carpet이 되어 그림과는 무관하게 그 뜻(양탄자)를 전달하게 되는 것이다." (서진영, 리버스(Rebus)를 통해본 순화동 근대 문학관 계획안, 한양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7쪽)
논문의 내용이 재미있으니 하나 더 인용한다. 앞으로 누군가 식사 초대를 하면 볼테르가 한 데로 "G.a."로 답을 해야겠다.
"볼테르는 친구의 식사 초대에 대하여 G와 A를 써서 다음과 같이 답했다. “G.a." 대문자 G와 소문자 a를 프랑스어로 표기하면 "G grand a petit" 이를 소리 나는 대로 읽으면 "J'ai grand appetit(저는 식욕이 왕성합니다).”로 답장을 하였습니다." (위 논문 9쪽)
문자는 메소포타미아와 중앙아메리카에서 양이나 식량의 수량을 기록하는 용도로 시작되었다. 문자는 왕과 필경사를 중심으로 공유되었으며, 시민들은 배울 수가 없을 정도로 모호했다. 그러다가 술과 노래에 의해 비로소 시민들에게 공유되었다. 일리아드와 오딧세이아는 문자를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 창작되고 역시 문자를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 향유되다가 수백 년이 지나서 기록되었다. 문자를 처음 만든 곳은 식량 생산지였지만 모든 식량 생산지가 모두 문자를 만든 것은 아니다. 사막이나 정글이 문자의 전파를 막았다. 이 장도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정리한 내용으로 끝내는 것이 좋겠다.
"독립적으로 발생한 문자가 그토록 드문 이유 중 하나는 앞서도 언급했듯이 문자를 새로 만들어내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수메르 문자나 초기 중앙아메리카 문자와 그 파생 문자들 때문에 다른 지역에서 새로운 문자를 독립적으로 만들어 낼 기회가 견제되었기 때문이다." (326쪽)
제13장 발명은 필요의 어머니
필요가 발명의 어머니가 아니라 발명이 필요의 어머니다. 그러므로 특출한 영웅 발명가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이 만들어지면 사람들이 쓰일 곳을 찾아낸다. 이것이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결론이다.
"20년이 흐른 후에야 비로소 에디슨도 축음기의 주된 용도는 음악을 녹음하고 재생하는 일이라는 데 마지못해 동의했던 것 (중략 / 1866년) 오토가 만든 엔진은 힘이 약하고 무겁고 높이는 2.1m에 달하여 결코 말보다 호감이 가는 물건은 아니었다. (중략) 제임스 와트가 증기 기관을 고안한 것은 원래 광산에서 물을 퍼내기 위해서였지만 증기 기관은 곧 방적 공장에 동력을 공급하게 되었고 다시 (훨씬 더 많은 수익을 거두면서) 기관차와 배를 움직이게 되었다." (353~4쪽)
guns, germs and steel을 읽기 1년 여 전부터 든 의문. 왜 과학기술 혁명이 중국이나 조선이 아니라 유럽에서 일어났을까. 그 때의 결론은 데카르트의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의심의 대상이고 오직 생각하는 나만이 유일한 존재라는 철학이 출발점이었다고 생각했다. 데카르트의 철학은 신과 자연이라는 위대한 존재 앞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선언하는 것과 동시에 자연을 조작의 대상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뉴턴의 프린키피아가 역학의 법칙을 정리한 것도 산업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중국과 조선에서는 자연은 여전히 경외의 대상이었고, 천체 역학은 농사에 활용하는 역법 이상의 역할을 하지 않았다.
재레드의 생각은 다르다. 천재들의 발명이나 위대한 철학 때문에 과학기술혁명이 일어난 것이 아니다. 유라시아 대륙은 다른 대륙들에 비해 면적도 크고 인구가 많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내가 얻으려는 답이 아니지만 이 장도 재레드의 글로 요약한다.
"(1990년 현재) 유라시아(북아프리카 포함)는 남북아메리카의 6배에 가깝고 아프리카의 8배, 오스트레일리아의 230배에 가깝다. 인구가 많다는 것은 곧 발명가 수도 많고 경쟁 사회 수도 많다는 뜻이다. 도표 13-1만 보더라도 유라시아에서 총기와 쇠가 만들어진 이유가 충분히 설명된다. (중략) 뉴기니인들 중에는 잠재적인 에디슨이라고 할 만한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그들은 그 천재성을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서 필요한 기술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활용했다. 즉, 축음기를 발명하는 문제보다는 뉴기니의 정글에서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은 채 살아남는 문제에 주력했던 것이다." (383쪽)
재레드는 일본의 문자와 일본의 도기에 대해 매우 깊은 인상을 받았나 보다. 문자와 기술 편에서 계속 일본을 인용한다. 물론 뉴기니를 언급하는 것은 이보다 훨씬 많다. 뉴기니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일본이 불에 구운 최초의 점토 그릇을 가지고 있다고. 14,000년 전에. 일본 최초가 아니라 세계 최초라고. 한 번 확인해 볼 사항이다.
"도자기류 중에서 가장 빨랐던 것은 27000년 전에 현재의 체코슬로바키아 지역에서 구워 만든 점토상들인데, 이것은 불에 구운 최초의 점토 그릇(14000년 전의 일본) 보다 훨씬 앞선 것이었다." (379쪽)
검색을 해 보니 최종택의 토기에 대한 간단한 연구 자료가 있다. 재레드의 주장과 같다. 사실인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이 신석기 문화가 가장 빨리 융성한 지역이었다는 증명은 아니다. 전 지구에 신석기 문명은 존재했다. 일본의 신석기 유적이 섬의 특성 때문에 잘 보존된 것 뿐이다.
"인류가 흙을 빚어 토기를 만든 것은 후기 구석기시대의 일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25,000년 전의 유적인 체코 공화국의 돌니 베스토니체(Dolni Vestonice)에서는 점토를 빚어서 구운 여성상이 출토되었다. 그러나 그릇으로서의 토기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이보다 한참 뒤의 일로 지금으로부터 약 12,000년 전으로 추정되는 일본 규슈[九州] 지역의 동굴 유적에서이다. 이때는 신석기시대가 시작되는 시기로 비슷하거나 조금 늦은 시기에 우리나라 동남해안 지역과 연해주 지역, 터키의 아나톨리아 지역, 중국 동북부와 남부 지역 등 세계 각지에서 토기가 제작되기 시작한다.
이처럼 토기의 제작은 신석기시대의 시작과 관련이 있다. 과거 500만 년 동안 인간은 추운 빙하기에 적응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15,000년 전 무렵부터 기후가 점차 따뜻해져 오늘날과 비슷한 기후환경이 형성되었다. 따뜻해지자 추운 기후에 적응한 큰 짐승들은 북쪽으로 이동하였고, 인간이 이용할 수 있는 식량자원은 물론 생계 방식에도 변화가 시작되었다. 인간은 작고 날랜 짐승을 사냥하기 위해 화살과 같은 새로운 도구를 발명하였으며, 짐승을 길러 가축화하고 식물을 개량하여 농사를 짓게 되었다." (한국문화사 중 최종택의 '토기의 등장과 확산' 중에서 발췌)
에필로그에 내가 궁금해 하는 문제에 대해 답을 하고 있다. 시원한 답은 아니지만 이것 이상의 답도 기대하기 어렵다. 최적 분열의 원칙. 한반도와 중국이 발전한 것은 많은 인구와 분열된 국가의 경쟁과 확산 때문이었다. 명과 조선의 건국 이후 중국과 한반도는 통일된 절대 권력의 지배로 개혁 또는 혁명의 기운이 약해졌다. 반대로 유럽은 끊임없는 분열과 경쟁과 전쟁이었다. 통일된 힘으로 강력한 발전을 추구할 수도 있고, 분열된 나라들이 전쟁으로 피폐해 질 수도 있었지만 중국에서 유럽으로, 아랍에서 유럽으로 끊임없는 기술의 청사진들과 정보들이 전해졌고, 이 기술들이 생존을 건 경쟁의 와중에서 필요로 전환될 수 있었다는 것이 일반의 해석이다.
"분열된 유럽은 박해받는 개혁자에게 피난처와 그 외의 지원책을 제공하고 각 나라 사이의 경쟁을 촉진함으로써 기술, 과학, 자본주의의 진보를 육성했지만, 통합된 중국은 그러지 못했다. (중략 / 그러나) 분열 자체는 획일적인 것이 아니라 다면적인 개념이다. (중략) 기술 혁신을 위해서는 최적 상태의 정치적 분열이라 할지라도, 경제적 생산성, 정치적 안정성, 인간 행복에는 최적이 아닐지도 모른다." (661쪽)
재레드는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 그의 입장은 그램 랭의 말을 빌려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중국의 지리, 생태 환경은 유럽과 달라서 통합을 통한 안정 지향으로 갈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이 기술혁명을 억압하는 결과를 낳았다. 다만 최적 분열의 원칙과 생태 지리학의 관점을 융화하여 좀 더 진전된 이론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그 이유는 미래의 중국과 미래의 유럽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국가와 지역 사회를 운영해 나가야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중국은 분열과 파괴로 이어지지 않는 상태로 혁신을 꾀하면서 정치 체계를 분산시킬 수 있는 과제가 있으며, 유럽은 경제와 정치의 통합을 위해 나아가면서도 혁신의 동력을 잃지 않는 과제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제14장 평등주의부터 도둑 정치까지
제3부는 지배하는 문명과 지배받는 문명이 왜 발생하는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1) 균 germs 2) 문자 character 3) 기술 technology 3) 도둑 정치 theft politics다. 이일 저일 하다보니 집중이 안되서 큰 틀에서 종합을 하지 못해 아쉽다.
13000년 전에 홍적세의 최후 빙하기 말기에 사피엔스들은 식량 생산에 나서서 작물과 가축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모두가 일했고, 예술가들도 그의 손을 망쳐가며 옥수수 밭을 일궜다. 어느 날 추장이나 권력자가 나타나서 생산물들을 걷어간다. 종교와 폭력, 정보에 기반한 권력을 가진 소수의 엘리트들이 온갖 이유를 들어 시민들을 설득하고 회유하고 억압한다. 생산의 주인공들은, 즉 시민들은 남는 것이 있거나 없거나 그들의 생산물들을 함께 사는 사람들을 위해 자의반 타의반으로 내어 놓는다. 그렇게 모아진 생산물들은 이제 분배된다. 분배의 경제학이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이전에 인류 역사에서 분배의 경제학은 가장, 부족장, 추장 또는 군장(우리 역사는 추장이 아니라 군장의 역사라고 정리한다), 왕 또는 권력자가 행사한다. 신의 논리, 엘리트 민주주의, 전제군주의 지배 논리를 만들어 생산물의 분배(세금의 분배)를 권력자와 소수 엘리트에게 집중하는 일, 그것이 도둑 정치다 theft politics.
"대중의 정치를 받지 못하는 도둑 정치는 항상 전복당할 위험을 안고 있다. 더러는 짓밟힌 평민들이 들고일어나기도 하고 더러는 새로운 도둑 정치자가 나타나서 앞으로는 도둑질한 열매에서 더 많은 비율을 대중을 위해 쓰겠다고 약속함으로써 대중에게 지지를 호소하기도 한다. 그 한 예로, 하와이의 역사는 억압적인 추장에 대한 반란으로 점철되어 있다. (중략) 고금을 막론하고 도둑 정치가들은 다음 네 가지 해결책을 혼합하여 사용했다. 첫째, 대중을 무장 해제하고 엘리트 계급을 무장시킨다. (중략) 둘째 거둬들인 공물을 대중이 좋아하는 일에 많이 사용하여 재분배함으로써 대중을 기쁘게 한다. 셋째, 무력을 독점하여 공공질서를 유지하고 폭력을 억제함으로써 대중의 행복을 도모한다. 이 방법은 비록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지만 중앙 집권적인 사회가 그렇지 못한 사회에 대하여 갖고 있는 크나큰 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중략) 넷째, 도둑 정치가가 대중의 지지를 얻는 마지막 방법은 도둑 정치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나 종교를 구성하는 것이다." (400~2쪽)
종교와 이데올로기 문제는 항상 머리를 복잡하게 만든다. 의미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생각을 해야 하고, 생각을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 좋은 생각은 나와 가족에 대한 사랑, 신 앞의 겸손, 자연과 신의 위대하고 끔찍한 모습을 모두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생겨난다. 자연은 존재하는 것인데, 과연 신은 내가 만든 것일까,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는 신이 되셨을까. 그런 생각이 자꾸 들어서 신을 믿기도 부정하기도 힘들다. 그리하여 결론은, 만물과 만인이 모두 신이다. 어쨌든 종교는, 평화를 지향하고 공동체에 기여하는 선한 역할을 하는 차원에서 매우 유용하다. 그렇지 않은 종교에 대해서는 아무리 위대한 믿음이라도 경계해야 한다.
"종교는 도둑 정치가들에게 부가 이동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일 말고도 중앙 집권적 사회에 두 가지 중요한 이득을 가져다준다. 첫째, 이데올로기나 종교를 공유하고 있으면 서로 무관한 개인들이 서로 죽이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데 보탬이 된다. (중략) 둘째, 이데올로기나 종교는 사람들에게 유전적인 이기심을 떠나서 타인을 위해 목숨까지 희생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한다." (402~3쪽)
재레드는 농업의 확대에 따른 관개기술의 발전이 국가라는 복잡한 정치 조직을 만든 것은 아니라고 본다. 국가 없이도 소규모 관개 시설이 지어진 사례가 있고, 대규모 관개 시설 없이도 마다가스카르나 멕시코에서 원시 국가가 만들어졌다는 것이 주된 이유다. 그밖에도 수많은 사례들을 들어가며 알기 쉽게 설명해 준다. 원인과 결과를 잘 구분할 수 있어야 미래를 예측하고 야만에서 문명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국가의 지향은 시민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를 수 있으므로 항상 감시해야 한다. 나와 시민들이 없다면 국가는 없다. 권력을 위임받은 소수의 엘리트들이 국가라는 추상 뒤에 숨어서 사익을 추구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사이비 국가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지표는, 분배다.
재레드는 루소의 아름다운 사회계약론도 기분 나쁘지 않게 무시해 버린다. 국가가 무슨 사회계약이라는 아름다운 행위로 이루어졌냐는 이야기다. 어느 부족사회나 추장 사회도 그의 인격에 감화되어 자신들의 자율권을 버리고 항복하지 않는다. 맞아 죽기 직전에 항복하는 사례가 너무도 많다. 셀 수 없이.
그러면 왜 국가가 생기는가. 식량 생산으로 여유가 생기자 식량 생산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생존할 수 있는 권력자들이 생기고, 인구가 늘어나면서 이해 충돌이 심각해 폭력과 살인이 증가하자 통제의 필요성이 생긴다. 게다가 인구 밀도가 높아져서 사람에게 나누어질 수 있는 땅의 넓이가 점점 좁아진다. 국가는 엘리트를 중심으로 복잡한 계층을 만들어 사람과 생각을 지배하고 폭력 행사를 통해 더 큰 폭력을 피했다. 소수의 손에 권력이 집중된 부족이나 추장 국가가 동원 능력이 더 강해지면서 그렇지 못한 다른 부족과 추장 세계를 통합하여 국가가 만들어졌다. 국가는 사피엔스 무리들의 진화의 결과다.
"현실을 아무리 관찰하고 역사적 기록을 뒤져 보아도 그처럼 냉철한 선견지명이 있는 고상한 분위기에서 국가가 형성되었던 예는 단 한 번도 찾아낼 수 없었다. (중략) 식량 생산이 잘 이루어지면 잉여 식량을 비축할 수 있게 되고 결과적으로 경제적 전문화와 사회적 계층화가 가능해진다. 잉여 식량은 추장과 관료를 비롯한 엘리트 계급, 필경사와 기능인 등 식량을 생산하지 않는 전문가들, 공공 토목 공사에 동원된 농경민 등등 복잡한 사회에 존재하는 온갖 부류의 사람들을 먹여 살린다.
(중략) 현존하는 대규모 사회는 모두 복잡한 중앙 집권적 조직을 갖고 있다. (중략) 한 가지 이유는 서로 무관한 사람들 사이의 갈등이라는 문제다. (중략) 두 번째 이유는 인구 규모가 커질수록 공동으로 어떤 결정을 내리기가 점점 불가능해진다는 점이다. (중략 / 세 번째 이유는) 남아도는 물자가 있으면 그것은 일단 중앙 집권적 권위체로 이동했다가 다시 그 물자가 모자라는 개인들에게 재분배되어야 하는 것이다. (중략 / 네 번째 이유는) 인구가 조밀한 지역에는 복잡한 조직을 가진 대규모 사회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 (409~417쪽)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부족 사회나 추장 사회들을 통합해야 하고, 그 과정은 대부분 폭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계약이 아니다. 폭력의 정점인 전쟁은 사피엔스 10만 년의 역사 어디에서나 있었지만 초기에는 전쟁으로 통합이 이루어지고 국가라는 복잡한 조직으로는 나아가지 않았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에 대해 재레드의 설명은 단순 명쾌하다. 식량 생산이 늘어나면서 인구 밀도가 높아지고 늘 있었던 전쟁이 결합되면 과거와는 다른 결과가 나타난다. 패배한 사람들의 운명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수렵 채집민들의 무리 사회가 점유하고 있는 지역이 대체로 그렇듯이 인구 밀도가 매우 낮은 곳에서는, 패배한 집단의 생존자들은 적으로부터 멀찌감치 이동하기만 하면 그만이다. (중략 / 인구 밀도가 높은 곳에서) 패배자들은 도망칠 곳이 없지만 승리자들은 이제 그들을 살려두면서 (중략) 패배자들을 노예로 쓸 수 있다. (중략) 승리자들은 패배자들을 그대로 내버려두는 대신 정치적 자율성을 빼앗고 정기적으로 식량이나 물품 등 공물을 바치게 하면서 그들 사회를 자기들의 국가나 추장 사회에 융합시킬 수 있다." (438~9쪽)
재레드는 3부 전체를 요약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너무나 뻔한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인류사 전체에 해당하는 사례들을 주욱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이야기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거대한 유라시아 대륙에서 식량 생산이 활발히 일어나면서 세균과 기술, 문자와 국가가 발전하였다. 인구 밀도가 낮고 문명의 교류와 전파 속도가 늦은 곳에서는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아 더 무서운 세균, 더 무서운 기술, 더 쉬운 문자, 더 큰 국가가 채 형성되지 못했다. 그리하여 어떤 문명은 지배하고, 어떤 문명은 지배받는다. 중위도의 넓은 동서축의 다양한 환경들이 축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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