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도 다 지나고 있다. 3월이면 개학을 한다. 농원 건너편 산에서 건축 작업이 시작되면 논 메우기 작업으로 올해 농사를 시작하려고 했는데, 아직 움직임이 없다. 태양광 발전소를 짓기 위한 임시도로 건설 작업은 이번 주부터 시작되고 있다. 대형 면허를 따서 25톤 덤프트럭을 몰 수 있는 자격을 딸 것인지도 논 메우기 작업과 연관되어 있다. 한가한 시간이 끝나가고 있다.
제4부 인류사의 발전적 연구 과제와 방향
제15장 대륙 간 불균형 이론과 원주민들이 낙후된 원인
15장은 재레드의 호주 대륙에서 죽을 뻔한 경험과 실제로 죽은 탐험가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 이야기도 재미있지만 더욱 재미있는 것은 이 지도다. 호주의 원주민들이 유럽인들에 의해 말살된 이유는, 원래 거의 붙어있던 대륙과 떨어지면서부터다. 짧은 곳은 16km에 불과한 바다가 호주의 발전을 막았다. 식량 생산을 위한 환경 조건이 열악했고, 식량 생산기술을 들여오기에는 그 정도의 바다도 너무 컸다. 대륙간 불균형의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열악한 자연환경.
"40000년 전만 하더라도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사회는 유럽을 비롯한 그 어느 대륙의 인간 사회보다도 출발이 훨씬 빨랐다. 석기의 날을 갈아서 사용한 것도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이 세계에서 가장 빠른 편이었고 (중략) 바위 표면에 그린 벽화도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편에 속한다. (중략) 해수면이 높아지면서 그 낮은 땅이 물에 잠겨서 전에는 그레이터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이었던 부분이 오스트레일리아와 뉴기니로 갈라지게 되었다.
(중략) 뉴기니의 면적은 오스트레일리아의 10분의 1에 불과하지만 원주민 인구는 오히려 오스트레일리아의 몇 배에 달했다. (중략) 토러스 해협에서 가장 큰 섬은 오스트레일리아로부터 겨우 16k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더구나 섬사람들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뿐만 아니라 뉴기니인들과도 활발한 교역을 하고 있었다. (중략) 어째서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은 금속기를 모르고 여전히 석기시대에 살고 있었을까?" (446~450쪽)
이미 4만 년 전에 사피엔스들이 도착했고, 8천 년 전에 농작물을 경작하기 시작한 뉴기니인들은 뒤늦게 도입된 닭과 돼지, 고구마로는 충분한 인구와 강력한 전염병을 가질 수 없었다.
"고작 100만의 인구를 가진 뉴기니는 도저히 수천만의 인구를 가진 중국, 비옥한 초승달 지대, 안데스, 중앙아메리카 등지에서 발생한 것과 같은 기술, 문자, 정치 체제를 발전시킬 수가 없었다." (458쪽)
뉴기니라고 하는 작지만 풍요로운 땅이 - 1000개의 언어를 가지고 있는 땅이 백인들에게 쉽게 정복당하지 않고, 원주민들이 주된 시민으로서 섬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말라리아 때문이다. 아메리카와 비슷한 시기에 유럽인들로부터 침략을 당하기 시작한 뉴기니는 전염병을 만들어내는 가축들이 닭과 돼지 말고는 없었지만 늪지대에 모기들이 널려 있었다. 그것으로 위기를 넘겨 오늘날까지 문화와 민족의 생존이 가능했다. 바다에 둘러싸여 고립되고, 높은 산과 계곡으로 한 번 더 고립된 땅이었지만, 잔혹한 살육전에서 살아남게 해 준 눈물 나게 고마운 뉴기니 땅의 축복이었다. 또 한 가지 뉴기니의 문화와 민족이 생존한 이유는, 뉴기니에 대한 침략이 - 이미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에서 400년 동안, 너무나 많은 살인을 저지르고 난 뒤 - 백인 자신들이 야만스런 행동이 너무 심했다는 것을 깨달은 뒤에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슬픈 야만의 시대였다.
야만과 문명의 경계를 재레드는 문자, 기술, 정치 조직 등으로 규정했지만 가장 중요한 기준은 역시 생명 존중이다. 동식물과 강과 바다를 포함한 모든 생명에 대한 존중과 배려의 마음이 있고 실천이 뒤따른다면 그것이 문명이다. 침략과 약탈을 가장 적게 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문명이다. 나의 즐거움과 다른 사람이나 자연의 즐거움을 함께 누리는 것이 문명이다. 여민동락의 與民同樂 마음과 실천이 문명이다.
"1526년 포르투갈 의한 해양 탐험가가 뉴기니를 '발견'했고 1828년 네덜란드가 서쪽 절반을 차지했으며 1884년 영국과 독일이 동쪽 절반을 나누어 가졌다. 최초의 유럽인들이 해안 지방에 정착해 내륙에 침투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1960년에는 이미 대부분의 뉴기니인들이 유럽 정부의 정치적 통제를 받고 있었다. (중략 / 유럽인들의 정착 계획을) 1880년대까지 번번이 좌절시켰던 요인은, 말라리아를 비롯한 열대성 질병이었다. (중략) 유럽의 식민지 정책은 원주민들을 대량 학살하거나 내쫓음으로써 백인들이 정착할 땅을 확보하는 것이었지만, 이 무렵 오스트레일리아나 네덜란드의 식민 정부는 이미 그 같은 만행까지 저지를 생각은 없었다. "(474~5쪽)
'엘니뇨 el niño의 남방 진동'으로 기후가 불안전하고, 연중 강수량은 500mm가 안되고, 식량 생산기술을 갖춘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이 이동하기에는 바다와 사막의 거친 기후가 가로막았다. 그래도 호주 대륙에는 가능성이 있었다. 유라시아 대륙에서 1만 년 동안이나 충분히 식량을 제공해 온 각종 작물들과 가축들을 호주 대륙의 일부, 즉 원주민들이 개척해 놓은 땅 위에 이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뉴기니에서 실패한 백인들이, 원주민들을 사살하고 병원균을 전파시킴으로써 호주 대륙으로의 진출에는 성공했으며, 30만이었던 호주의 원주민은 6만 명이 되었다. 슬프지만 받아들여야 할 역사다. 깨달은 자들의 선한 마음이 전파되지 않는 제국주의자들의 시대였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식량 생산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이처럼 토종이 아닌 농작물과 동물들이 들어와야 했다. 그러나 이들 동식물은 호주와 기후가 비슷한 세계 여러 지역에서 가축화 작물화되었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오기 전에는 호주에 도착하지 못했다. 뉴기니와 달리 호주의 대부분 지역에는 유럽인들을 물리칠 만큼 심각한 질병이 없었다. (중략 / 뉴기니의 점령은) 20세기 의학의 발달과 함께 비로소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중략 / 유럽인들의 전략은) 원주민들을 사살한 일이다. (중략 / 더불어 ) 1년도 지나기 전에, 유행병으로 죽은 원주민의 시체를 흔히 볼 수 있었다. (중략) 그리하여 40000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원주민들의 전통은 유럽인들의 이주가 시작되고부터 1세기 이내에 거의 사라졌던 것이다." (479~480쪽)
제16장 동아시아의 운명과 중국 문화의 확산
중국과 한국의 사피엔스들은, 접촉과 교류가 활발하고 인구가 많았으므로, 당연하게도 신석기 문명의 유물인 토기도 훨씬 오래전부터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하면 틀린다. 오히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토기가 발굴된다.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 중국의 오랜 유적지는 오래되었기 때문에 더 오래된 토기들이 이미 가루가 되도록 사용해서 흔적조차 남지 않았고, 일본의 토기들은 발전이 늦어져 전파 이래 오래도록 사용되었기 때문에 고고학 유물로 남겨진 것은 아닐까. 홍적세 말기의 빙하기에는 일본 열도도 한반도와 연결되어 있어서 유라시아 문명권에 속해 있었다. 구석기시대가 끝나갈 무렵에 빙하가 녹으며 일본은 섬이 되었다.
"전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도 모두 그렇듯이 동아시아의 고고학적 기록을 살펴보아도 그곳의 인류 역사에서 대부분의 기간에는 토기도 없이 뗀석기만 사용하던 수렵 채집민들의 흔적뿐이다. 그러다가 동아시아 최초로 다른 증거물이 발견되는 곳이 바로 중국이다. BC 7500년경 무렵부터 농작물의 잔해, 가축의 뼈, 토기, 간석기(신석기) 등이 나타난다. 이 연대는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신석기시대 및 식량 생산이 시작된 연대로부터 1000년 이내에 해당한다." (491쪽)
중국을 중심으로 동남아시아와 인도 쪽에 형성된 다양한 어족들의 분포를 살펴보면, 중국 티베트 어족들이 토착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중국화를 진행시켰을 것으로 추정한다. 당연히 폭력적인 과정이었을 것이며, 유럽의 백인들이 신대륙을 개척할 당시와 비슷한 야만 행위를 이미 3천 년 전에 시작했다. 통일 국가를 이룩한 진시황의 분서갱유는 중국의 지식인과 문헌들만을 태운 것이 아니라 수많은 민족들의 문화와 언어를 몰아내고 중국의 문화를 불도저로 흙을 밀어내듯이 퍼져 나가게 했다. 저 멀리 이스터 섬까지.
"중국 문자가 한국과 일본에서 끈질기게 버틴 것은 거의 10000년 전 중국에서 시작되었던 동식물의 가축화 작물화가 20세기에 남겨놓은 생생한 흔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동아시아 최초의 이 농경민들이 이룩한 업적 덕분에 중국은 중국화 되었고 (중략) 타이에서 이스터 섬으로 건너간 사람들이 중국인의 사촌들이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497쪽)
제17장 동아시아와 태평양 민족의 충돌
집중력이 떨어지고, 관심이 없던 폴리네시아 이야기와 언어 이야기가 길게 이어진다. 중국 남부에서 타이완과 필리핀, 인도네시아를 거쳐 폴리네시아로 이주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유럽인들은 기술을 비롯한 여러 가지 이점을 바탕으로 태평양 일대의 섬들과 열대 동남아시아의 대부분을 일시적인 식민지로 만들어 지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대부분의 지역에는 이미 토착적인 식량 생산자들과 병원균이 있었으므로 많은 유럽인들이 정착하지는 못했다. 이 지역에서 오늘날 많은 유럽인들이 살고 있는 곳은 뉴질랜드, 누벨칼레도니, 하와이(면적도 가장 넓고 가장 변방에 있으며 적도에서도 가장 멀고 온대에 가장 가까운 유럽과 유사한 기후를 가진)뿐이다. 그리하여 오스트레일리아 및 남북 아메리카와 달리 동아시아와 대부분의 태평양 섬들은 지금도 동아시아 및 태평양 민족들이 차지하고 있다." (524쪽)
제18장 남북 아메리카가 유라시아보다 낙후됐던 원인
재레드의 기본 생각은 식량 생산이다. 존재를 위해서건 문명을 위해서건 식량 생산이 이루어져야 한다. 사피엔스들이 너무 늦게 들어가지만 않았다면 13,000년 전의 식량 생산이 이루어지는 환경에 의해 그 지역의 역사 발전 단계가 결정된다.
유럽인 침략자들이 아메리카를 점령한 요인은, 1) 인간이 살기 시작한 시기가 유라시아가 훨씬 빨랐다 2) 작물과 가축으로 만들 수 있는 야생의 동식물이 유라시아 대륙에 훨씬 많았다 3) 유라시아 대륙이 확산과 전파를 방해하는 지리 생태 장애물이 더 적었기 때문에 유라시아가 빨리 발전했고, 유라시아 대륙의 76% 정도인 충분한 넓이를 가진 아메리카 대륙의 발전이 늦어졌다.
유럽인의 아메리카 대륙 침탈은 1492년 이전에도 있었다. 스코틀랜드인들이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를 거쳐 캐나다 북동부 해안과 섬을 점령했었다. 이 시도가 실패한 것은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한 것과 그린란드라는 중간 기착지가 13세기의 단기 빙하기의 영향으로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사실이다. 13세기의 단기 빙하기는 원나라가 중국 대륙을 지배하지 못하고 피폐해진 주요 요인이라고 분석하는 학자도 있다. 강력한 원제국이었지만 빙하기로 찾아온 기후 식량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한족들의 반란으로 북부 초원지대로 쫓겨나게 된다.
제19장 아프리카는 왜 흑인의 천지가 됐는가
이제 19장과 에필로그만 남았다. 아프리카는 인류의 기원인 곳이다. 700만 년 전에 인류의 조상이 태어난 곳이고, 사피엔스도 이곳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그리하여 흑인에서 백인까지 6개의 인종 중 5개의 인종이 이곳에서 살아왔고 살고 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지루해 보이는 언어에 대한 이야기가 매우 소중해서 아끼고 아껴왔단다. 고고학의 유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사실들을 언어를 연구함으로써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를 기록한 구약, 신약, 코란의 언어는, 히브리어 - 아람어 - 아랍어로서, 아프리카아시아어족의 하나인 셈어족에 속하고 아프리카에서 탄생했을 것으로 추정한다는 사실을, 언어 연구를 통해 밝힐 수 있기 때문이다. 마다가스카르가 아프리카어족이 아니라 오스트로네시아 어족이라는 것은 놀랍다. 더 빨리 발전한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이 아프리카인들보다 마다가스카르를 점령했다는 증거다.
어떤 작물이나 도구를 가리키는 단어가, 넓은 지역의 여러 가지 방언에서도 같은 발음으로 같은 뜻을 가리킨다면, 그 작물이나 도구는 그 언어를 사용하던 민족의 조상에서 개발되어 오래도록 사용되어 온 것이다. 언어와 민족이 조금씩 발전해 나갔지만 도구와 단어는 그대로 가져다 쓰는 것이 편리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작물이나 도구의 이름이 그다지 비슷하지 않고 언어의 계통도 맞지 않다면, 그 작물이나 도구는 그 언어를 사용하던 민족의 조상들이 개발한 것들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받아들인 것이다. 각자 받아들였기에 방언마다 작물이나 도구를 부르는 단어가 달라지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어떤 언어의 방언들이 서로 비슷해서 의사소통이 가능할 정도면 그 언어와 방언들은 분화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증거다. 너무나 뻔한 이야기라서 이해하기가 쉽다. 이런 쉬운 분석틀로 아프리카 대륙을 분석하고, 아메리카 대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고학과 언어학, 작물학, 동물학 등 여러 분야의 연구들이 축적되어야 가능하다. 이론은 단순하지만 관련 연구가 그리 쉽지만은 않다.
"높은 인구 밀도, 병원균, 기술, 정치 조직을 비롯한 힘의 요소들이 바로 식량 생산에서 생겨났기 때문이다. 지리적 입지라는 우연으로 인해 식량 생산을 시작하거나 물려받게 된 민족들은 그 덕분에 지리적 혜택을 덜 받은 사람들을 침탈할 수 있었던 것이다." (570쪽)
재레드의 계속되는 기술에 의하면 가장 먼저 인류가 살기 시작했던 아프리카에서도 분명히 침략의 과정이 존재했다. 반투족이 서아프리카에서 시작하여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 전체를 장악하는 과정이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아메리카를 점령하고, 원주민들을 대체하는 과정과 같았기 때문이다. 결국 인류는 그 누구도 야만을 건너뛰어 문명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제국주의와 신대륙의 발견이라는 야만과 침략의 시대는, 사피엔스들이 결코 극복할 수 없는 흐름이다. 분노해야 할 일이 슬프게도, 아니다. 그러나 깨달은 이상 더 이상 과거처럼 살 수는 없다. 함께 살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내야 한다. 그것을 알면서도 행동하지 않는 삶, 그런 삶은 비난하고 분노할 수 있다. 미얀마의 군부 쿠데타가 바로 비난받아야 할 삶이고, 그들을 지원하는 러시아와 중국의 태도 또한 비난받아 마땅할 일이다. 제2의 시리아 사태로 가지 않으려면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폭력에 맞서는 신중한 접근은, 단결뿐이다. 베이징과 홍콩, 그리고 시리아에서 신중한 접근이 실패하는 것을 잘 보았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성공했다. 미얀마라고 성공하지 말라는 보장은 없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서 실패했더라도 다시 시도해 볼만한 일이다. 평화와 민주주의를 외치는 순수한 방법으로도 폭력과 야만을 극복할 수 있다.
"사하라 이남의 가축들은 북아프리카에서 들어왔을지 모르는 몇 종을 제외하면 모두 유라시아에서 들어온 것들이었다. 결과적으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 가축이 도입된 시기는 유라시아에서 문명의 태동과 함께 가축이 이용되기 시작한 뒤 수천 년이 지난 후였다. 아프리카야말로 대형 야생 포유류의 대륙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이 같은 사실은 일견 놀라울 수도 있다." (588쪽)
에필로그 : 과학으로서의 인류사의 미래
다 끝났다. 끝없이 반복되는 주장과 논거로 완전히 설득당했다. 즐거운 일이다. 인종 차별이나 민족 차별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확실한 근거를 제공해 주는 책이다. 제레드의 논지가 맞든 그르든, 야만의 시대가 거의 끝나가고 있다. 전 세계에 걸쳐 폭발하듯 늘어나는 인구는 코로나로 잠시 주춤했고, 도시로 몰려가는 바람에 숨 쉴 공간이 생겼다. 그나마 다행이다.
재레미 다이아몬드는 이제 인류사도 과학이라고 주장한다. 연구 과제가 많지만 자연환경의 중요성 또는 지리 결정론이 과학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메소포타미아 일대의 비옥한 초승달 지대와 그리스 지역이 역사의 무대에서 밀려난 것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주장한다.
"고대에는 그리스를 포함한 지중해 동부 일대와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많은 지역이 숲으로 덮여 있었다. 이 일대가 원래의 비옥한 삼림 지대로부터 침식된 잡목 지대 또는 사막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고식물학자들과 고고학자들에 의해서도 자세히 밝혀졌다. (중략) 지나치게 많은 염소를 방목하는 상황에서는 (중략) 땅을 덮고 있던 나무와 풀이 사라지면서 토양 침식이 진행되어 계곡에 침니가 쌓였고, 강우량이 적은 환경에서 관개농업을 했으므로 자연히 염분이 축적되었다. (중략 / 비옥한 초승달 지대가 농업에 부적합한 땅이 되어버린 데다가) 페트라 부근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숲들은 제1차 세계 대전 직전에 오스만 터키가 헤자즈 철도를 건설할 당시 벌채되어 없어졌다. (중략) 그리하여 비옥한 초승달 지대와 지중해 동부의 인간 사회는 생태학적 불모지 (중략) 그들은 자원의 기반을 스스로 파괴하는 생태학적 자살을 저질렀던 것이다.
(중략) 지중해 동부의 사회가 차례차례 자멸함에 따라 힘의 중심은 차츰 서쪽으로 이동했다. (중략) 강우량이 더 많아서 식물이 더 빨리 재성장 할 수 있는 곳에 사는 행운을 타고났다. (중략) 유럽은 농작물, 가축, 기술, 문자 등을 모두 비옥한 초승달 지대로부터 받아들인 셈인데, 그 이후 비옥한 초승달 지대는 힘과 혁신의 중심지라는 위치를 잃어버렸던 것이다." (600~1쪽)
이제 그만 읽고 공부해야 하는데, 결국 더 읽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