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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서재

가원에 사는 힘_아나스타시아_한병석 옮김_210108 el ocho de enero el viernes

어제 인간극장에서 한병석이라는 사람을 보았다. 손수 집을 짓고 수영 가능한 연못까지 갖춘 '한 씨 가원'을 가꾸며 사는 사람이다. 들깨 농사를 지어 들기름을 짜서 판매하여 필요한 돈을 마련하고 부부가 사랑하며 산다고 한다. 즐거운 에너지가 넘친다. 가장 부러운 것은 커다란 실내 온실과 연못이다. 러시아어를 전공한 그가 영감을 얻은 책, 러시아판 월든으로 예상되는 책이 '아나스타시아'다. 마침 전자책이 있기에 대출했다.

 

영상에서 재미있었던 것은 예쁘게 만든 들기름병을 신문지로 둘둘 말아서 판매하는 장면. 플라스틱이나 비닐을 쓰지 않기 위해 지난 신문을 사용한다고 하니 얼마나 소박하고 정겨운지 모르겠다. 벌써 50대 후반이다. 매우 건강하니 적어도 70세까지는 부부가 현재의 삶을 충분히 영위해 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 15년을 행복하게 살았고, 앞으로도 15년을 행복하게 산다고 하니 보고 있는 나로서도 뿌듯한 일이다.

 

다차. 그는 러시아의 힘을 다차로 보았다. 동감이다. 모든 시민이 다차를 가지고 운영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해왔다. 다차는 스스로 시행하는 단기 하방이다. 귀한 노동은 귀하고, 자연과의 교감을 위한 힘든 노동은 힘든 노동대로 가치가 있다. 땀 흘린 뒤의 가치다. 그러면서 귀한 사람들이 노동자들의 귀중함을 깨닫는다면 좋겠다. 노동자에게도 다차는 소중하다. 노동자들도 틀에 박힌 노동 말고 스스로 선택하는 노동, 자연의 도움을 받는 노동을 통해 위로받을 수 있다. 다차를 한병석의 말대로 '가원'이라 부르겠다.

 

80쪽까지 읽었는데, 재미있는 환상이다. 인간이든 자연이든 공통의 조상인 하나의 세포에서 발생했다. 이 생각은 진화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도 받아들일 수 있다.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가니까. 우려스러울 정도로 극단으로 나아가지 않기를 바란다.

 

아나스타시야의 인간 중심주의는 착취가 아니라 공생이다. 자연과 더불어 살게 되면 평화롭고 건강한 생존이 보장된다. 사람이 너무 멀리 자연과 떨어져 살고 있기 때문에 과거에는 모든 사람이 잘 알고 있었던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을 잊게 되었다. 빛을 통해서 모든 사람과 원격 통신까지 가능하다는 환상도 아름답다. 아름다운 꽃은 꺾이는 순간 생명을 잃는다. 아름다운 환상은 지켜보고, 향기와 모양을 즐기는 것이 된다. 내 삶 속으로 가지고 들어올 필요는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열매의 본래 목적은 사람의 생명 유지보전이다. 열매는 사람들이 만드는 현재 또는 미래의 어떤 약보다 사람의 병을 싸워 이기는데 더 효과적이고 강하다. 씨앗은 이를 위하여 사람의 상태에 대해 알아야 한다. 그러면, 특정 사람의 치료를 위해, 혹 그가 앓고 있거나 아니면 앞으로 발생할 수 있는병 치료를 위해 식물이 익어가는 열매에 적절한 함량의 물질을 담을 수 있다." (81쪽)

 

약간 고민이 된다. 어른들을 위한 환상 이야기를 계속해서 읽어야 하는가. 환상에서 빠져 나와 현실로 회귀하는 전환이 이루어질까. 그런 궁금증은 있다. 그래, 조금만 더 읽어보자. 재미, 없다고 할 수 없으나, 어린 시절의 요술공주 밍키를 보는 재미가 아닐까.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예쁜 공주 밍키의 어른판이다.

 

나이가 들면서 병원을 가까이 하게 되는 상황이 자꾸 벌어진다. 누군가의 도움을 간절히 원할 정도로 불편하고 아프다. 붓고, 가슴이 뛰고, 식은 땀이 흐른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고통받는지를 알 수 없으니 날이 밝으면 병원으로 달려가야 한다. 아나스타시야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한다. 멋진 환상이다. 환상 그 이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주치의가 있어. 그건 바로 네 몸이야. 몸은 언제 어떤 풀을 써야 할지 원래부터 알아. 어떻게 먹고 어떻게 숨을 쉬어야 할지도 알아. 병이 외부로 나타나기 전에 미리 막을 수도 있지. 어느 누구도 네 몸을 대신할 순 없어. 몸이 네 주치의이고 하느님이 직접 너한테만 내린 거니까. 네가 건강히 살도록 몸이 설명해주는 거야. 텃밭의 식물들(의사)과 상호관계가 정립되면 식물은 너의 병을 치료하고 너를 보살필 거야. 식물 스스로 정확한 처방을 내리고 바로 나만을 위해서 특별히 효과가 높은 약을 지을 거야." (84쪽)

 

우주의 기운과 소통하는 이야기는 박근혜 때문에 유명해진 이약기다. 간절히 원하고 기도하면 우주의 기운이 응답할 것이라는 생각은 인간을 위로한다. 믿거나 말거나 위로와 격려가 된다면 유용하다. 이런 이야기를 악용하지만 않으면 된다.

 

"우주의 힘이 당신과 함께하며, 생각조차 하기 어려운 밝은 꿈을 이루게 하고 마음의 평화를 주고 가까운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게 하고 이들이 당신을 더욱 사랑하도록 돕습니다." (97쪽)

 

아이들과 텃밭 농사를 지으며 자연이 생명을 키우는 것을 보게 해야 한다. 텃밭에 가서 아이에게 스마트폰이나 바비 인형을 쥐어주는 대신에 밭둑의 풀과 꽃을 흙냄새를 맡게 해야 한다. 이것은 의심없이 실천해도 좋다. 마치 아나스타시야 사용 설명서를 작성하는 느낌이다.

 

"별 하늘 아래서 잠잘 때도 아이를 데려다 옆에 눕히고 별 하늘을 보도록 해. 별의 이름이나 네가 알고 있는 별의 기원이나 별의 본래 목적이 무엇인지 아이한테 설명하면 안 돼. 너도 잘 알지 못할뿐더러 그렇게 하면 너의 뇌에 있는 도그마는 아이를 진실로부터 멀게 할 따름이니까. 아이의 무의식은 진리를 알고 진리는 스스로 그의 의식으로 옮겨가는 거야.‘빛나는 별을 보니 참 좋다.’고 아이한테 얘기할 수 있고, 어떤 별이 아이한테 최고 마음에 드는지 물어 보는 정도면 족해. 무릇, 아이한테 적절한 질문을 던질 줄 아는 거 엄청 중요해.” (102쪽)

 

까칠한 도킨스의 눈먼 시계공은 인간은 원시 세포에서 진화한 복잡한 기관이며, 다른 어떤 생명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연의 처녀 아나스타시야는 하느님을 믿고, 사람의 위대한 뇌를 찬양하며, 자연을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연 속에서 공부하고, 자연과 더불어 사는 것이 인간에게 가장 행복한 일이다. 자연은 모두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 도킨스나 아나스타시야나 서로 완전히 다른 이유로 자연을 존중한다.

 

도킨스는 과학을 통해 많은 것을 알아냈으므로 과학을 사랑하지만 아나스타시야는 과학기술이 별로 해낸 일이 없다고 한다. 자연을 더럽히기만 했다. 농부들이 자연과의 싸움에서 해방된 것은 과학 덕분이었다. 일이라는 고통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물론 모든 인간이 농부였다면 농부들은 자연과 싸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과학기술이 지배하는 도시로 99%의 사람을 빼앗긴 덕분에 전쟁은 치러졌다. 가원을 통해 전쟁터를 평화와 사랑의 공원으로 만들 수 있겠다. 아나스타시야의 꿈처럼.

 

아나스타시야는 자연에서 맞이하는 새로운 하루가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아침을 늘 화장실로 향하는 나는 어떤가. 몸을 일으키고 싶지는 않지만 의식이 돌아오는 그 순간에 하루에 대한 기쁨을 먼저 느낀다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그 여자는 새 날에 기뻐하지 않고 첫 생각이 먹을 걱정이야." (134쪽)d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