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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서재

대학은 큰 건물이 아니라 큰 학자가 있는 곳이다_01 토지 1부 1권과 중국인이야기 1_200802 el dos de augusto el domingo_два Воскресенье

오늘 새벽 폭우가 쏟아져서 무일농원 인근이 일죽에서부터 제천, 충주까지 많은 피해를 입은 모양이다. 어머니께 전해들은 바로는 아직 큰 피해는 없는 모양이다. 인명 피해도 거의 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다. 다음 주에도 일은 제대로 못할 것이다. 논에 이삭거름 뿌려야 하는데, 하늘이 어찌할 지 알 수 없다. 

 

1. 토지 1부 1 :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토지 1부 1권의 전자책은 빌리기가 매우 어렵다. 예약을 해 두고도 상황을 알지 못해서 마지막 날인 오늘에서야 첫 장을 넘겼다. 그동안 토지를 몇 번이나 읽으려 했지만 집중하지 못해서 계속 던져 버렸는데, 오늘 전자책으로 읽는다. 집에 토지가 있으니 전자책으로 읽다가 재미가 붙으면 종이책으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1969년부터 26년이 걸려 1994년 8월 15일에 완성한 소설이다. 1897년의 한가위로부터 시작한다.  그 전에 박경리가 토지 1부를 출판하며 1973년 쓴 서문에 쓴 글. 진실을 담지 못하는 소설가의 아픔을 말하고 있다.

 

"독자는 이 소설에서 울부짖음도 통곡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소설일 따름, 허구일 뿐이라는 얘기다. 진실은 참으로 멀고 먼 곳에 있었으며 언어는 덧없는 허상이었을 뿐이라는 얘기다. 마찬가지로 진실은 내 삼장 속 깊은 곳에 유폐되어 영원히 침묵한다는 얘기도 되겠다." (1권 자서 自書 중에서)

 

그렇게 읽기 힘들었던 토지 1권이 술술 익히니 기분이 좋다. 별다른 긴장감 없이 잘 익힌다. 구천과 별당아씨가 도망가는 장면이 생략되어 버린다. 나중에 나오려나. 죽는 날까지 아들의 평안함을 바라시던 아버지 생각이 난다.

 

"이놈아! 잘 들어라! 생일이라는 것은 열 달 배 실어서 낳아주신다고 고생한 어매한테 정성 바치는 날이라 말이다! 니 같은 불효막심한 놈은 지 배애지 부른 것만 알았지, 이놈아! 사램이 사램의 근본을 알고 아가리에 밥 처넣으란 말이다!" (1부 1권 24%)

 

이제는 죽은 말 내지는 죽은 문장이 되어 버린 말들이 아스라하게 살아난다. '토지'가 살아 있는 한 이 말들이 계속 생명력을 가질 수 있을까. 국문과 학생들의 컴퓨터에나 들어있지 않을까. 일상에서 써 보려 해도 떠오르지를 않고. 문화의 죽음이라는 것이 이런 것인 모양이다.

 

"이놈의 살림살이 탕탕 뽀사버리고 내가 머리 깎고 중이 되든가 해야지 / 간에 천불이 나서 못살것다 / 꼭두새벽에 오니라고 욕본다 / 새벽달 보자고 초저녁부터 오나 / 밤새도록 뚜디린 징짝 같은 낯짝 해가지고 사내도 없는 년이 그런 일이라 카믄 바지 한 가랭이에 두 다리 넣고 나선다 카이 / 에미가 무당이믄 딸년도 무당이지. 오리 새끼 물로 가지 어디로 갈꼬? / 아아니 무신 쇠 뺄 말을 했다고 이러노? 장에 가서 매 맞고 집에 와서 제집 친다 카더마는 / 좋은 일 끝에 싸움 안 하는 법이니라 / 한 정기에서 팔촌 나더라고 촌수 멀어지는 것도 잠시니라. 그러면 붙이라고는 자네들뿐인가? " (토지 1권 6장에서)

 

2. 중국인이야기 1 : 김명호 지음 / 한길사

 

또 읽는다. 일본을 몰아내고 내전이 발발했을 때 근거지 동북의 중심인 선양을 비롯한 도시는 내어주고 시골로 들어 간 린뱌오의 전술은 탁월했다. 국민당의 부패한 군부는 도시를 분탕질 했고, 린뱌오의 홍군은 악덕 지주와 친일부역세력(한간)들을 처단하고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하며 같이 일하고 싸웠다. 마오쩌둥도 린뱌오의 전술을 오해했으나 결국 그의 손을 들어줬다. 2년이 채 못되어 동북 3성을 린뱌오가 장악했고, 마오쩌둥은 중국 대륙을 차지했다. 그런 린뱌오가 1971년 항공기 사고로 죽는다. 중공 성립 후에 군권을 장악했고, 문혁 시기에도 마오에게 철저히 복종했는데 말이다. 부인 예췬은 언제나 류샤오치의 뒤를 따르지 말자고 했다. 그렇게 조심조심 살았는데, 천안문에 걸린 마오의 인자한 초상은 그런 사람도 용납하지 못한 것일까. 혹시 이것 때문일까. 죽을 때 죽더라도 정략결혼은 하고 볼 일이었을까. 귀한 아들은 죽었고, 딸은 고초를 치렀다.

 

“마오 주석 아이들과 우리 아이들이 인연을 맺는 것은 정략결혼이다. 쓰레기들이나 하는 짓이다. 지들 맘에 드는 사람 만나 연애하게 내버려둬라. 일반 간부나 평범한 집안 자녀일수록 좋다. 고급간부 집 애들 중에서 억지로 찾으려고 하지 마라.” (1권 17%)

 

캉성의 이야기도 끔찍하면서도 즐겁다? 김명호의 이야기 능력이 아닐까. 역사는 이미 벌어진 일. 배울 것 배우되 괴로워서 들여다보기 싫은 것 보다는 즐거운 것이 낫지 않을까. 중공 이후의 피비린내 나는 역사는 그 뒤에 캉성이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마오에 대한 끝없는 충성을 무기로 하여 온갖 음모를 꾸며내어 살육을 자행하였다. 별명이 '사람 목 치는 사형 집행인, 회자수'였다. 

 

"문화혁명도 캉성의 치밀한 각본대로 진행됐다. 그의 사고방식에 의하면 단결·통일·합작·우호는 수정주의를 상징했고, 대립·분열·투쟁이 혁명을 의미했다.

 

(중략) 모든 음모가와 야심가들의 말로가 좋지 않았지만 캉성은 천수를 누렸다. 문화혁명이 끝나기 1년 전에 국가부주석 직에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도 국장이었다. 사후에 당적이 박탈되고 열사무덤에서도 쫓겨났지만, 캉성은 중국 역사상 가장 성공한 모략가였다. " (19~ 20%)

 

문학과 예술에 대한 묘한 사랑이 특히 캉성의 즐거운 부분이다. 문혁 4인방 중 가장 많은 문화 보물들을 빼돌려서 즐긴 사람이다. 즐기는 방법이 오묘하다.

 

"일도일각(一刀一刻), 전각(篆刻)의 대가 소리를 듣기에 손색이 없었다. 대화가이며 전각가인 치바이스는 원래 목수 출신이었다. “네가 제(齊)라면 나는 노(魯)다. 너는 희지만(白) 나는 붉다(赤). 물(水)은 돌(石)을 뚫는다”며 노적수(魯赤水)라고 각한 인장을 자신의 작품에 찍곤 했다. 그의 문화 수준은 깊이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였지만 드러낸 적이 없고, 남들이 알아주기도 바라지 않았다. 문을 닫아 걸고 혼자서만 즐겼다. 이유도 분명했다. “재능이 알려지면 세상살이만 복잡해진다.” (1권 19%)

 

일본 제국주의의 잔학성은 글과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 남녀노소와 문화역사를 구분하지 않는다. 모두 동등하게 말살해 버린다. 지옥이 궁금하다면 si, 일본 우파들이 저지른 아시아 침략사를 그대로 옮겨 놓으면 된다. 말과 글이 아니라 영상으로. 

 

"중국 최초의 사립대학인 톈진의 난카이대학(南開大學)은 7월 29일과 31일, 일본군의 두 차례에 걸친 폭격으로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 특히 31일은 공중에서 폭탄을 퍼붓고 100여 명의 일본 기병(騎兵)이 휘발유를 가득 실은 군용차량 2대를 몰고와 도서관과 교수 숙소, 학생 기숙사를 불구덩이로 만들어버렸다." (1권 20%)

 

베이징대와 칭화대, 사립 난카이 대학이 임시로 연합대학을 결성하고, 베이징에서 창사로, 다시 창사에서 쿤밍으로. 1938년 8월부터 8년간 존속한 시난연합대학의 총장은 칭황대 총장 메이이치가 이끌었다. 왜놈들의 침략에도 당당하게 그는 외쳤다.

 

"대학은 큰 건물이 있는 곳이 아니다. 큰 학자가 있는 곳이다. (중략) 한 가지 재능만 갖추면 된다는 식의 교육은 장인을 배양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대학의 할 일이 아니다." (1권 20%)

전자책 1권에 실린 소설의 배경지를 스마트폰으로 촬영했다. 생각보다 잘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