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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서재

무릎 아래에서 가름침을 받다_신들의 나라, 인간의 땅_180816 취띠예르그

점심을 먹고 샌드위치 한 조각을 입에 물고 죽음의 책을 뒤로 물리고, 뭐 없을까 하고 뒤적거리다가 고진하의 '신들의 나라, 인간의 땅'을 잡았다. 제목에 우파니샤드가 있었기 때문이다. 표지 날개에 시인을 소개하고 있는데, 감리교 신학대학을 나왔다는 여위고 안경 쓴 얼굴의 목사 시인. 서문을 읽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책이라도 좀 차분히 읽어 나가자는 생각에 서문을 읽었다.


그리고 두 달째 읽고 있는 아프리카 이야기도 슬픈 인도도 죽음의 문화도 제치고 읽기로 했다. 물론 계속 읽을지는 알 수 없으나 서문은 강렬했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몸뚱이까지 하나가 되어 있는 글의 느낌이 확 전해온다. 이 책이 1판 1쇄다. 흠, 무라까미 뭐의 뭔 시대가 160쇄가 넘었다고. 흠.


 "내가 온몸으로 만난 우주의 주재인 하느님이 그런 그물 속에 갇혀 계시겠는가. 그분이 뭐 참새나 쏘가리라도 된단 말인가. 그 쫀쫀하고 답답한 틀을 깨뜨리고 인간들이 쳐놓은 숱한 울타리를 걷어내기 위해 예수는 십자가 형틀에 자청하듯 매달려 죽었고, 붓다 같은 이는 부귀영화가 보장된 왕좌를 걷어차고 고행의 길을 나섰던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그분들이 남긴 가르침을 '으뜸의 가르침'이라 하지 않던가. 나의 인도행은 '으뜸의 가르침'의 고갱이를 온몸으로 만나고자 하는 발품 외에 다름아니다.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인도 땅을 돌아다니며 활자로만 읽던 으뜸의 가르침 <우파니샤드>를 싱싱하게 살아있는 풍경으로 읽고 내면화할 수 있었다. 활자와 풍경이 내 안에서 포개질 때 나는 '앎'의 즐거움을 얻을 수 있었고, 활자와 풍경이 포개지지 않고 어긋날 때도 '모름'의 신비 앞에 내 가슴을 닫지 않았다. 가슴을 닫지 않음으로 나는 거대한 인도 대륙에 주눅 들지 않고 '앎'과 '모름' 사이의 그네뛰기를 즐기며 여행을 계속할 수 있었다." (8~9쪽)

 

힘들면 짜증이 나고 화를 내고 기운이 빠지고 후회가 된다. 여유가 있으면 즐겁고 행복하다. 가난한 사람이 여유를 갖기는 어렵다. 못배운 사람도 끊임없이 몸을 혹사하지 않고는 삶을 유지하기가 어렵기에 여유를 가질 수가 없다. 그런데도 인도의 가난한 오토릭샤 왈리는 만족한다. 그것은 깨달음의 결과일까 받아들이는 것일까. 고진하는 그것을 모름의 희열이라고 한다. 직접 만나서 겪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리라.  

 

 "가난한 농사꾼의 집안에서 태어난 카틱은 학교도 다닌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동안 오토릭샤 기사 노릇을 하며 귀동냥한 영어 실력으로 손님들과 간단한 대화는 나누었다. (중략) 당신은 행복하오 (중략) 집에는 닷새쯤 먹을 수 있는 쌀과 감자가 있답니다. 그리고 아내는 매일 아침 숲에서 땔감을 구해다가 차를 끓여 줍니다. 아내가 끓여주는 차는 아주 맛있습니다. 그걸로 나는 만족합니다. (중략) 나는 보리수나무를 보면, <우파니샤드>라는 책에 나오는 '거꾸로 선 나무'가 자꾸 생각 (중략)  저는 그런 책을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중략) 유일한 소망이 하나 있는데, 자기가 공경하는 신 크리슈나가 허락하시면 '바울'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바울이란 주로 벵골지역에서 유랑하는 음유시인들을 말한다.  (중략) 우리는 장엄하고 불가해한 우주적 신성 앞에서 '앎'이라는 장난감을 버리고 '모름'을 머금은 채그 품에 안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만한 지성은 그 알량한 '앎'의 희열만 알았지 '모름'의 희열은 모른다." (55~67쪽)  

 

 

인도의 소에 대한 이야기가 재미있다. '인도의 운전사들은 소를 위해서는 브레이크를 밟지만 보행자를 위해서 늘 브레이크를 밟지는 않는다는 우스개 소리(98쪽)'가 웃기지 않을 정도로 인도의 소들은 이상했다. 소를 신성하게 여겨서 그렇다고 설명하지만, 재산으로의 가치가 높고 농업 생산에서의 기여도가 높아서 그렇다고 하는 설명도 있는데, 수긍이 가는 설명은 아니다. 도로를 무단 점유하여 복잡하게 만들고, 더러운 환경을 더욱 더럽히는 소들. 그들의 거대한 덩치도 위협이다. 순한 눈망울이 예쁜 송아지의 점프가 아무리 귀엽다 해도, 굶는 인간은 있어도 굶는 소가 없는 상황은 이해할 수가 없다. 어디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어슬렁거리는 소의 꽁무늬를 쫓아 어슬렁거리며 시골길을 걷다 보면, (중략) 호떡처럼 손바닥으로 꾹꾹 눌러 붙여 놓은 소똥들. (중략) 아낙은 쇠똥으로 불을 피워 홍차를 끓여주었다. (중략 / 브라흐마와 같이 태어난 소) 실제로 쇠똥 칠은 벌레가 생기지 않게 하고 습기를 막아주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중략 / 소의) 이마에는 시바 신이, (중략) 시바 신은 거대한 몸집의 흰 소 난디를 타고 싸운다. 흔히 시바 사원에서 난디 동상은 사원의 중앙으로 들어가는 입구와 마주 보게 서 (중략) 흰 소 난디는 시바와 파르바티가 결혼할 때 시바의 장인인 다크샤(브라흐마의 별칭)에게서 결혼 선물로 받은 것 

 

 (중략 / 인도인들의 소 숭배와는 무관한 이야기지만) 소년은 스승의 아쉬람에서 수년 동안 배울 수 있는 모든 것을 배웠다. 그는 모든 베다를 기억하였고, 당시에 접할 수 있는 모든 과학과 학문을 통달했다. (중략) 키가 훌쩍 큰 아들은 자만심에 찬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아들의 모습을 보며 아버지는 슬퍼졌다. 그것은 진정으로 앎을 얻은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중략) 너는 그것 하나를 앎으로 해서 더 이상 배움이 필요 없고, 그것 하나를 앎으로 해서 모든 고통이 사라지는 그것을 배웠느냐? 다시 말하면, 가르쳐 질 수 없는 그것을 배웠느냐?  (중략) 너는 내 아쉬람에 있는 사백 마리의 소 떼를 끌고 인적이 없는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가거라. 거기서 어떤 말도 하지 말고 소 떼와 함께 살아라.

 

(중략) 새와 동물들, 나무와 바위와 강과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만 있을 뿐 그와 이야기를 나눌 대상이 전혀 없었다. (중략) 많은 지식을 자랑스레 여기던 과거는 떨어져 나갔고, 과거가 떨어져 나감에 따라 미래 또한 떨어져 나갔다. 그는 단지 지금 여기에 존재할 뿐이었다.  (중략) "보아라! 저기 천 마리의 소 떼가 오고 있다. 저기 슈베타케투는 없구나." 스승은 한 마리 짐승이 되어 돌아온 슈베타케투를 반갑게 맞이하면서 환희의 춤을 추었다. 그는 슈베타케투를 두 팔로 부둥켜안으면서 말했다. "이제 너는 가르쳐질 수 없는 그것을 알았는데, 왜 나에게 돌아왔느냐?" 슈베타케투가 공손히 절을 올린 뒤 대답했다. "단지 스승님께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입니다." (100~108쪽)
 

 

오후 한 시가 다 되어가는데 한 끼도 먹지 않고 책을 읽고 있다. 도서관은 너무 춥다. 집중이  되지 않을까 우려해서 오지 않았는데, 인도에 관한 책들이 재미있어서인지 한 눈 팔 틈이 없다.

 

 "순수한 바울은 자기들이 숭배하는 신과의 합일을 위해 세속적 욕망을 모두 버린 것처럼 보였다. (중략) 바울들은 대체로 정상적인 교육을 받은 이가 드물고 스승의 아쉬람에서 노래를 배우고 요가를 습득한 이들이다. 그들이 배운 요가는 '박티 요가'이다. '박티'란 말은 조건 없는 사랑을 의미하며, (중략) 가슴이라는 말은 '여기에 참 자아가 있다'는 말이니 (중략) 바울들은 가슴으로 노래하고, 가슴으로 춤추며, 가슴으로 신의 사랑을 찬미하는 사람들이다. (중략) 고대 인도에서 춤과 음악은 주로 사원에서 관장되었는데, 바울들은 사원에 갇힌 춤과 음악을 사람들의 평범한 삶의 자리로 끌어낸 것처럼 보였다. 바울들의 음악과 춤은 그것 자체로 종교적이었지만 그들은 그것을 제도 종교의 틀에 가두지 않고 저잣거리에서 대중과 함께 나누었다." (133~4쪽)


간디와 함께 불가촉천민(찬달라)들을 '하리잔(신의 자녀)'라 부르며 그들을 인간 차별의 고통에서 해방시키려고 노력한 암베드카르에 관한 이야기가 우파니샤드의 구현이었다는 고진하의 생각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힌두교를 버린 인물이 힌두교의 경전을 가장 잘 실현한 인물인 것이다. 언제나 역설은 매력이 넘친다.


  
 "카르마는 산스크리트어로 삶의 '행위' 혹은 '행위의 결과'를 가리키는 말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카르마는 '행위의 잠재력'을 일컫는 말이다. (중략) 카르마의 법칙을 뛰어넘으려는 시도는, 자기의 그림자를 뛰어넘으려는 것만큼이나 무모하다. (중략) 자신의 본질이 업의 씨 없는 존재 즉 '아트만'임을 자각하고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업을 짓지 않는다.

 

(중략) 인도 근대사 속에도 자신의 저주받은 카르마를 넘어서 영혼의 자유를 실현한 이들이 있다. 이미 널리 알려진 것처럼 불가촉천민(찬달라) 출신으로, 불가촉천민의 해방자로 알려진 암베드카르 같은 이가 그렇다. (중략) 그는 하층민을 그 카르마에 얽매이게 하는 힌두교의 법전을 불사르고, 끝내 타락한 힌두교를 버리고 불교로 개종했다. 종교가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지 인간이 종교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며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없고 영혼의 자유를 누릴 수 없게 만드는 힌두교를 버렸다."   (238쪽)

 

 

이 모든 지혜의 말을 아들에게 전하면 이렇다.

 

 

 "내 심장에서 네가 나왔다. 너는 내 아트만이다. (중략) 아들아, 너는 진정 빛이니, 백년 가을을 살아라." (250쪽)

 

 

수레(육신)의 주인(아트만)이 고삐(마음)를 잡고 있는 마부(지혜)에게 명하여 말(욕망)들이 이리저리 마구잡이로 나아가는 길(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가고자 하는 길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요가다. Atman - wisdom - heart - horse on the right road - wagon의 지휘 체계가 살아있다는 것이 허탈하지만 해탈에 이르는 길이다.   

 

 "우리는 인간의 욕망 자체를 부정하면 안된다. 살아있음 자체가 욕망 아닌가. 식욕, 성욕, 수면욕, 자기 보존 욕과 같은 가장 기본적인 욕망을 부정하면 삶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중략) 욕망의 에너지를 하나로 모아 숭고한 목적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숭고한 목적은 말할 것도 없이 윤회를 끝내고 해탈에 이르는 것이다.

 

(중략) 촛불은 부드러운 미풍에도 꺼진다. 그것은 바깥에 있는 것에 의해 점화되기 때문이다. 반딧불이는 폭풍에도 빛을 잃지 않는다. 그 빛이 자기 안에 있기 때문이다. (중략) 요가는 궁극적으로 자기 안에 광휘로 빛나는 '참자아'를 발견하고 우주의 주재인 '신'과 일체가 되어 그 희열을 맛보는 일이다." (295~7쪽)

 

300쪽에 이르는 글을 단숨에 읽어낼 수 있을 정도로 쉽고 재미있으며 강렬하게 썼다. 우파니샤드에 대해 알면 알수록 '역시 종교는 관념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논리나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고, 직관이나 가슴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자신의 경험과 윗세대의 경험을 공유할 때 믿음이 생긴다. 이렇게 말하면 내 가슴속에 신이 들어갈 자리가 없어서 결국 경지에 오를 수 없다는 말이 될까. 종교의 근원으로 들어가면 알 수 없음이 가득하다. 그것으로 사람을 위로한다면 좋은 일이다.

 

- 신들의 나라, 인간의 땅 / 글과 사진 고진하 / 비채(2009년 1판 1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