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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농사 이야기

슬픈 열대와 기쁜 논둑_180712 취뜨예르그 Четверг

좋은 아침(도브라예 우뜨라 доброе утро) 은 아니었다. 유튜브에서 최양락을 비롯한 옛날 개그맨들의 웃기는 이야기를 듣다가 잠을 설쳤다. 잠이 오는 바가바드 기타 동영상을 보면서야 간신히 잠들었다. 8시 반에야 눈을 떴다. 충북 주민자치 경연대회에서 우리 풍물패가 대상 다음의 최우수상을 수상해서 광주에서 열리는 전국대회에 참가해야 한단다. 상금은 전국대회 준비 지원금까지 포함해서 800만원. 10월에 열린단다. 축하하는 저녁 식사 자리에서 소맥을 대여섯 잔 마셨더니 온몸에 졸음이 쏟아진다. 졸린 속에서도 20일에 열리는 장구 발표회를 위해 한 시간 반을 연습했다. 술이 확 깬다.


장마가 완전히 물러갔다는 전제 아래 고추에 약을 치기로 했다. 농약방 농업 의사 선생님의 지도를 받아 약을 친다. 총 세 개의 약을 친다. 나방약이 어떻고 저떻고 하는데,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연로하신 아버지를 대신하여 약을 친다. 고무장갑을 끼고 두터운 겨울옷을 입고 고글에 버프, 모자까지 완벽하게 갖춰 입은 후 농약을 뿌린다. 만들어진 농약은 뿌연 하늘색이다. 보기에도 살벌하다. 물론 선입견 때문일 것이다. 냄새도 고약할텐데 몸에서 되도록 멀리해서 냄새를 맡지 않았다. 약을 다 칠 때까지. 일주일 간격으로 적어도 2회는 뿌려야 한단다. 두 시간 반에 걸쳐서 900주의 고추나무에 농약을 뿌렸다. 간간이 벌들이 날아왔다가 도망친다.


그리미가 들려 주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어느 부부가 귀농을 해서 농사를 짓는데, 쇠비름(portulaca)이 너무 번성해서 도저히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고 한다. 뿌리를 완전히 뽑아서(발본색원 拔本塞源) 던져 두었는데도 어느 날 가보면 뿌리를 내려 다시 살아나곤 했고, 가만히 두고 보면 어마어마한 생명력으로 자라는 쇠비름(포르츄래카 portulaca). 쇠비름을 처리하기 위한 연구를 하다가 이것이 당뇨병(다이어비티즈 diabetes)에 좋은 약초이기도 하고 효소를 담궈 먹어도 맛이 좋다는 정보를 얻었다. 그렇다면 쇠비름(portulaca) 농사를 지으면 잡초 걱정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겠다며 기뼈했다. 이듬해부터 쇠비름 농사를 시작했는데, 또 다시 실패하고 말았다. 쇠비름을 애지중지 키우려 했더니 이번에는 다른 풀들이 번성하여 쇠비름이 제대로 자라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농사에 이이제이(以夷制夷)란 없다.


뒷 정리를 깨끗이 하고 옷과 몸을 깨끗이 하고 쉰다. 즐거운 오후(도브르이 진 Добрый день)


어머니는 권외과에 모셔다 드리고 골프연습장으로 갔다. 거의 10개월 만이다. 골프 실력이 없으니 찾아주는 친구도 없고, 비즈니스가 없으니 더더욱 골프 칠 일은 없다. 재미있는 운동인데,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열심히 할 수가 없다. 골프 연습장은 좋다. 두 시간에 15,000원으로 실컷 땀을 흘리며 통쾌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연습장에서는 이렇게 재미있는데, 열 배나 더 비싼 필드에서는 만족감을 느끼지 못한다. 돈 버리고 몸 버리는 일이다. 90분 13,000원 요금도 있었는데, 없애 버린 모양이다. 할 수 없이 두 시간을 끊어서 몸이 부셔져라 공을 쳐댔다. 형편 없는 실력이지만 통쾌한 맛은 있다. 운동을 끝내고 물리치료를 끝내신 어머니를 모시러 갔다가 마트에 들려 막걸리, 맥주, 소주를 각 1병씩 샀다.


술 한 잔 마시고 쉬다가 5시 반에 논으로 갔다. 장마가 끝났다고 하니 이제 물을 가볍게 채우고 다시 풀관리를 해야 한다. 찰벼 논에 열 평 이내로 풀이 훌쩍 커 있다. 몇 개만 뽑아내면 사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허장성세다. 논가의 풀들은 정성을 들여서 베어내야 한다. 예초기를 이틀 정도 돌려서 큰 풀을 제거한 뒤에 뒷 마무리 작업을 하는 것이 좋겠다. 찰벼 논에 두 개의 모터를 돌려서 물을 채우고 전체 논의 물꼬를 모두 막았다. 논둑에 앉아서 논을 바라보며 음악 감상을 했다. 농사 오래 짓다 보니 이런 날이 다 온다. 온 몸에 땀이 흐르는 슬픈 열대지만 일 없이 바라보는 기쁜 논둑이다. 언듯 구수한 밥냄새가 난 것 같기도 하다.


참깨 밭에 들깨를 심으러 갔다. 어머니는 벌써 두 줄을 심으셨다 한다. 숨이 턱에 차서 물을 먹고 앉아서 쉰다. 이랑 양쪽에 들깨 모를 심기로 한다. 진도 엄청 안 나간다. 8시가 다 되어 해가 저무는데도 겨우 절반 정도를 심었다. 능률이 나지 않는다. 어머니는 벌써 들어가셔서 저녁 식사 준비를 하신다. 어떻게 할까 하다가 그냥 들어가기로 했다. 어차피 다음 주까지 계속 해야 하는 일이다. 하늘은 여름의 아름다운 구름을 펼쳐 보여 주다가 자귀나무(a silk tree)와 잘 어울리는 분홍빛 석양을 마지막 인사로 보내준다. 샤워를 하며 그 멋진 광경을 바라본다. 


100.3 충주 kbs 세상의 모든 음악. 참 멋진 음악들이 흐른다. 농부로서 이만하면 호사다.